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34)
봄이 오다
* * *
머리가 반 토막 난 아르구르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악마의 죽음은 즉각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아르구르의 하수인과 추종자는 그들의 주인에게 전해 받은 힘을 크게 잃었고, 악마의 군세는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약해진 적군을 아군이 가차 없이 몰아세웠다.
적들은 여전히 많은 숫자가 남았지만, 기세가 넘어간 순간부터 승패가 판가름 난 것과 다름없었다.
마침내 악마의 군세가 이리저리 흩어져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기쁜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살았어! 살았다고!”
“어머니…….”
그리고 병사들은 이 승리의 주역이 누군인지를 잘 알았다.
“기사단장 만세!”
“흑기사 데일 경 만세!”
“두 분께 영원토록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사단장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나를 띄워주는지.”
“겸손이 과한 것 같소.”
“겸손이라니.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르구르를 떨어트린 것도. 녀석의 불꽃을 방어해 틈을 만들어내준 것도. 마검으로 놈의 머리를 벤 것도 자네 아닌가. 난 숟가락밖에 얹지 않았네.”
기사단장은 진심이었다.
자기는 거들기밖에 안 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데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누가 얼마나 공을 세웠든, 악마를 죽였으면 된 거다.
“자. 어서 자네도 손을 흔들어주게. 다들 자네의 이름을 외치고 있지 않나.”
기사단장의 조언대로 데일은 병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더욱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베른바르트가 다가와 껄껄 웃었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군! 앞으로는 자네의 시대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우리 같은 퇴물은 슬슬 은퇴할 때가 되긴 했지.”
기사단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격렬한 전투가 끝이 났다.
밤새 싸운 병사들은 하나같이 기진맥진했다.
하지만 바로 쉴 수는 없다.
뒤처리를 해야 한다.
악마와 그 하수인들의 시체에는 사악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냥 놔뒀다가는 대지가 오염되고, 또 다른 괴물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살아남은 사제들은 신성한 불꽃으로 시체들을 불태웠다.
에스델이 한차례 손을 휘저을 때마다 하수인의 시체가 조그마한 입자가 되어 바스라졌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시체 앞에 섰다.
기사단장은 승리의 주역에게 기꺼이 시체를 양보해줬다.
“마음껏 먹게. 빛의 교단에서는 발작하겠지만, 뭐 어떤가.”
“고맙소.”
“고맙기는.”
“근데 그 먹는다는 표현은 좀…….”
어쨌거나 보상을 거둘 시간이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몸에 건틀릿을 박아넣기 전. 생각했다.
‘아르구르의 피에도 특별한 힘이 있다.’
가니아고스의 피를 마시면 마력이 크게 늘었던 것처럼, 아르구르의 피에도 특별한 효과가 있다.
‘마시면 근력을 늘려주던가.’
문제는 아르구르의 피가 강산성이라, 피부에 닿으면 녹아버린다는 점이다.
하지만 데일에게는 문제없다.
데일은 투구를 벗은 뒤.
아르구르의 상처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치이이익!
얼굴 가죽이 녹아내리며 뼈가 드러났다. 하지만 상관없다. 회복하면 그만이니.
데일은 아르구르의 피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식도가 녹았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그 기괴한 광경에 기사단장과 군단장은 얼굴을 찡그렸다.
“어. 그런 식으로 먹을 줄은 몰랐는데.”
“괜찮은 거 맞소 저거?”
“……괜찮을 거요. 아마도.”
그렇게 데일은 아르구르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몸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변화가 있다.’
전신의 근육이 이전보다 훨씬 탄탄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데일은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방패를 하나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아주 가볍게 그 모서리를 쥐어 보았다.
우드득.
너무나 간단히 우그러지는 방패.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슨 쇠를 종이처럼 구겨버리나. 이 정도 근력은 내 부하들이 마력을 끌어올려도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여전히 시체가 남아 있다.
데일은 아르구르의 시체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적당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흡수한다.’
과욕은 도리어 해가 된다.
특히 아르구르처럼 사악한 악마의 생기와 잔혼을 거두면, 그만큼 데일의 정신에도 영향을 끼친다.
너무 많이 흡수했다가는 선배 흑기사인 케인과도 비슷한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데일은 흡수를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들이 데일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아르구르가 도시를 습격해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광경.
일부러 귀족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어 가족을 직접 죽이게 시킨 일.
사람들을 가지고 놀다 가차 없이 버린 가벼운 장난들.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이 눈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아르구르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는 별거 없다.
유희.
즐거우니까 그리 행동했을 뿐.
악마답다면 악마다운 이유였다.
“…….”
데일은 흡수를 계속했다.
아르구르의 기억은 대부분 그런 끔찍한 광경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기억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기억이 있었다.
‘이건?’
기억 속. 아르구르는 누군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상위 악마일까? 아니다. 아르구르보다 훨씬 작은 상대는 분명 사람의 형상이었다.
로브를 걸친 여성. 아니. 남성일까? 중성적인 외모 탓에 잘 구분되지 않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봐서는 마법사 같은 느낌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사처럼 다부진 근육도. 사제 특유의 경건한 분위기도 있었다.
어쨌거나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그의 가슴에는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으니 말이다. 검신 위에는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룬 검?’
아르구르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4군단을 공격해 시선을 끌어라. 미끼가 되란 말이다.
아르구르는 굴욕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에게 고개를 조아려 굴종했다.
그것만으로도 둘 간의 상하관계가 명확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놈은 대체 누구지?’
데일은 그 얼굴을 살폈다.
낯이 익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낯이 익다.
하지만 누군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데일의 기억 속에 저런 기묘한 인간은 없었다.
아니. 인간이 맞기는 한 걸까?
낯이 익으면서, 기억에는 없는 모순된 경험.
데일은 가슴에 검이 박힌 저 괴인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피려 했다.
하지만 한계가 찾아왔다.
여기서 더 생기를 흡수하면 걷잡을 수 없다. 그만둬야만 한다.
데일은 아쉬웠지만, 생기를 거두는 걸 멈췄다.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도 그렇게 끝이 났다.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방금 본 광경에 대해 생각했다.
‘미끼가 되어 시선을 끌라니. 무슨 소리지?’
괴인은 악마조차 굴복시킬 정도로 강력한 존재다.
그런 자가 아르구르를 미끼로 던지고, 할만한 일은 무엇일까.
데일이 깊은 고심에 잠겨 있자, 에스델과 하켄. 그리고 하티가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경?”
“아까 봤습니다. 공중에서 화려하게 하시던데요? 근데 왜 그러고 서 있습니까?”
데일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동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내저어주었다.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다.”
“저번에도 그렇고. 싸움 후에 멍하니 계시는 횟수가 늘었어요.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 아니죠?”
“괜찮다.”
“그래! 데일 경이 뭐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이 정도는 거뜬하지.”
“하긴. 데일 경이라면…….”
그제야 에스델도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일행은 아르구르의 시체를 소각했다.
하티가 놈의 살점을 한입 뜯어먹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데일이 말렸다.
‘이런 걸 먹었다간 지옥견 같은 게 되지 않을까.’
데일이 말리자 하티가 불만스레 울어댔다.
마치 ‘왜 너만 먹냐’라고 면박을 주는 것 같았다.
데일은 그런 하티의 반응을 모른척하며, 장작을 날랐다.
아르구르의 시체는 너무나 거대해서 에스델의 신성만으로는 전부 불태울 수 없었다.
기름과 장작이 아르구르의 위에 쌓이고. 이내 불꽃이 피어올랐다.
썩은 고기 타는 냄새가 전장에 진동했다.
그때 병사들은 처음으로 실감했다.
저 두렵고도 강대한 악마 역시, 죽으면 한낱 고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병사들은 너도나도 모여들어 아르구르의 시체가 불타는 모습을 구경했다.
몇몇은 눈물을 흘렸다. 먼저 떠나간 전우들을 생각하는 것이리라.
몇몇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전투는 누가 뭐라 해도 아군의 승리였으니, 병사들은 기뻐할 권리가 있었다.
또 몇몇은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아마 마음속으로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베른바르트도 데일의 옆에서서 이 우중충한 캠프파이어를 구경했다.
그가 물었다.
“그때. 자네가 한 말 있잖아. 이 전쟁을 끝내겠다는 거. 그거. 진심이었나?”
“진심이었소.”
“그래. 진심이었단 말이지.”
조그맣게 중얼거린 베른바르트가 아련한 표정으로 불덩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먼 과거를 담고 있었다.
“예전에는 많았지. 자네처럼 전쟁을 끝내겠다느니. 몸을 바쳐 평화를 가져오겠다느니. 터무니없는 말을 당당히 외쳐대던 머저리들이.”
“…….”
“어느샌가 그런 말을 떠드는 놈이 안 보이더군. 다들 무기력했던 거야.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우리는 이미 마음속 깊이 패배했었네.”
베른바르트가 고개를 돌려 데일과 눈을 맞추었다.
그 눈동자에는 의지라는 이름의 불꽃이 빛나고 있었다.
“고맙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걸 자네가 깨우쳐 주었어. 그래. 황제가 평화를 바라지 않으면 뭐 어떤가. 아직 도끼를 휘두를 힘이 있고, 나를 따라주는 병사가 있어. 끝까지 해볼 생각이네. 그래야 죽은 전우들을 볼 면목이 서지 않겠나.”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투로 4군단은 씻지 못할 상처를 얻었다.
전방의 요새는 함락되었고, 이리스 성 역시 크게 피해를 입었다.
복구를 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모르긴 몰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하지만 어떤 희생을 치렀더라도 상관없다.
악마를 죽였다는 것. 그리고 이 늙은 장군과 병사들이 의지를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었다.
한참을 타오르던 아르구르의 시체가 마침내 부스러기가 되어 흩날렸다.
불도 꺼지고.
사위에는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사위가 그림자 속에 잠겨들었다.
“하하. 그나저나 벌써 악마를 둘이나 처치하다니. 대단하군. 이제 자네에게는 악마 살해자란 별명이 붙을 걸세. 어때. 마음에 드나?”
“악마 살해자라…….”
데일은 그 단어를 입에서 몇 번 굴려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이니 뭐니 불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소.”
드물게도 마음에 드는 별명이다.
앞으로 데일이 걸어야 할 길을 알려주는 훌륭한 별명이 아닌가.
“자네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그때.
저 지평선 너머로 동이 터오르기 시작했다.
그림자에 뒤덮였던 세상이 다시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아진 데일은 투구를 썼고, 베른바르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해가 일찍 뜨는군. 아무래도 봄이 오는 모양이야.”
봄이 오고 있었다.
* * *
이레네에서 그리 머지않은 마을.
본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주민들의 담소가 활기차게 들려오던 마을은 지금. 불길한 적막에 쌓여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노인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에 다섯. 저 위치에는 열을 배치하라.”
노인은 수정구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그 수정구에서는 눈동자 하나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수정구 속 눈동자가 시키는 대로 술식을 그리고, 사람들을 옮겼다.
꽁꽁 묶인 사람들의 숫자만 1,000명이 넘었다.
노인 혼자서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노동. 하지만 눈동자는 가차 없었다.
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고, 몸을 혹사해가며 겨우겨우 술식을 완성해냈다.
눈동자가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자. 이제 마력을 불어넣어.”
고개를 꾸벅 숙인 노인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와 술식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산제물들이 미친 듯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졌다.
수정구 속 눈동자가 무감정하게 말했다.
“악마의 마법은 불필요하게 가학적이란 말이지.”
다음 순간.
산제물들이 털썩 쓰러지고.
술식을 따라 공간이 커튼 걷히듯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가슴에 룬검이 박힌, 데일이 괴인이라고 표현했던 이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놀랄만치 위력적이야.”
괴인은 한차례 숨을 깊게 들이마시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가슴이 들썩였고, 몸에 박힌 룬검도 움직였다.
“쿨럭!”
괴인은 피를 토해냈다. 아무리 사제물을 사용했더라도, 이 정도 마법을 사용하려면 몸에 무리가 가기 마련이다.
“빌어먹을 아렌.”
욕설을 내뱉은 괴인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끔찍한 몰골을 한 군세가 열을 맞춰 걸어 나왔다.
괴인이 말했다.
“자. 가서 이레네로 쑥대밭으로 만들어라. 머저리 황제의 숨통을 끊고, 제국을 불살라라. 그리고 알려라. 내가 돌아왔다고.”
명령을 받은 군세가 기괴한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그 거센 파도의 한복판에서 괴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스한 햇빛이 얼굴에 쏟아져내렸다.
“비로소 봄이 오는 모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