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46)
두르핀
* * *
두르핀이 빠르게 굴러오자 거인들이 다급해졌다. 자기들끼리 도망쳐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이 거인 가족이 대체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데일은 당황한 거인들에게 말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와 친구가 되어서 저 악마와 싸우는 것. 다른 하나는 다 같이 죽는 것.”
“치, 친구? 너! 친구 아니다! 친구! 이런 거 아니다!”
그야 악마를 꼬리에 물고 다가온 놈을 친구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데일이 굳이 친구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다.
“공통된 적과 같이 맞서서 싸우면 그게 친구다. 그리고 친구는 전투가 끝난 후에도 친구지.”
“으으.”
“약조해라. 싸움이 끝난 뒤에도 우리들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기껏 악마와 싸워 이겼는데, 또다시 거인과 싸우는 건 사양이다.
데일의 제안에 거인들은 갈등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데일이 맞았다.
하지만.
‘마, 맛있겠다.’
‘인간 고기. 먹고 싶다.’
눈앞에 차려진 만찬을 포기하라니!
거인들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데일은 냉정히 말했다.
“그래. 그러면 우리는 가겠다.”
“무, 무슨 소리냐.”
“너희랑 달리. 우리는 저 협곡을 건너가면 되니까. 너희들이 악마랑 싸우는 사이 우리는 지나가겠다.”
협곡을 이어주는 다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건너 협곡 저편으로 지나갈 수 있다.
거인은 그러지 못한다.
결국. 참지 못한 거인이 외쳤다.
“알았다! 싸우겠다! 그러니 우리. 버리지 마라!”
“잘 생각했다. 다만.”
데일은 마검을 뽑고. 살벌한 기세를 흘리며 말했다.
“저번처럼 약속해놓고 딴소리를 하면, 그때는 가만 있지 않을 거다.”
“아, 알았다. 우리. 약속 지킨다.”
그 흉흉한 기세에 거인들은 주춤했다. 눈앞의 흑기사는 일전에 봤던 때랑은 전혀 달랐다.
‘가, 강해졌다. 껍질 인간.’
‘건들지 않는 게 좋다.’
대체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거인과 인간의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거인 가족 넷은 어디선가 뽑아온 나무줄기를 들고 쿵쿵 앞으로 나섰다.
비전투 인원들은 뒤로 빠지고.
병사들과 거인이 함께 섰다.
“…….”
“……이거 괜찮은 거 맞냐.”
인간과 거인이 함께 싸운다니.
서로가 뻘쭘함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한가한 감상을 가질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르핀이 빠르게 굴러 지척에 다다른 것이다.
저 파멸적인 돌진 앞에서 방패 진형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뭉개질 뿐.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거인들이 주춤하던 그때.
데일이 땅을 박찼다.
맹렬히 굴러오는 두르핀을 향해 몸을 던졌다.
사람들이 당황했다.
“!!”
“데, 데일 경!”
저런 것에 몸을 던지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걸까?
하지만 다음 순간. 사람들이 본 것은 놀라운 광경이다.
쿵!
데일과 두르핀이 부딪혔다.
굉음과 함께 데일은 튕겨나갔다. 맞부딪힌 견갑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두르핀도 옆으로 밀려나며, 돌진하는 방향이 크게 꺾여버렸다.
결국.
두르핀은 회전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악마는 데일을 노려보았다.
“너. 먹음직스러운 영혼을 가지 흑기사. 네놈이 운 좋게 내 동지들을 죽인 걸 안다. 하지만 이 두르핀은 다를 것이다.”
“글쎄. 죽은 네 동료들보다 네가 더 강할 것 같지는 않은데.”
두르핀은 성질이 더럽고 호전적인 악마다.
데일의 도발에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하찮은 게 입을 놀리는구나!”
두르핀이 고함을 내지르자, 놈들의 부하가 아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 주인과 비슷하게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하수인들은 병사들의 창칼을 무시하며 호전적으로 싸웠다.
두르핀도 다시 몸을 말아 땅을 구르려 했다.
그냥 지켜볼 데일이 아니다.
데일은 두르핀에게 달려들어 그 몸을 둥글게 말지 못하게,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렇게 해서 구르는 걸 막을 생각이었다.
“하! 네까짓 게 감히 날 막으려…… 윽.”
비웃으려던 두르핀은 당황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 몸을 부여잡고 있는 흑기사의 힘이 범상치 않았다.
‘무슨 이런 터무니없는.’
등급이 오르고.
아르구르의 피까지 마셔 더욱 강해진 데일이다.
그 용력은 악마라 해도 쉬이 뿌리칠 수 없었다.
데일은 상대를 단단히 고정한 채 외쳤다.
“거인들!!”
그러자 하수인들을 신나게 으깨고 있던 거인 가족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드니 데일이 악마를 붙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악마다. 악마만 없으면 훨씬 편한 싸움이 될 터.
그 정도는 거인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죽여!”
“죽이자!”
거인들이 쿵쿵 달려와, 나무줄기로 두르핀을 후두려 패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두르핀의 등껍질은 단단하다. 하지만 묵직한 충격을 전부 흘려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쉼 없는 몽둥이질에 두르핀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심지어 그냥 평범한 몽둥이질이 아니다.
거인들의 활약을 본 에스델은 생각했다.
‘거인에게도 축복을 걸어줄 수 있지 않을까?’
데일에게는 빛의 축복이 도리어 독이 되지만, 거인은 다르다.
문제는 신성력이 많이 든다는 점인데…….
‘이 성물이 있다면.’
에스델은 왼팔에 차고 있는 팔찌로 눈길을 주었다.
이번에 얻은 성물.
이 성물을 착용하고 있으면, 신성력이 샘처럼 솟아났다.
에스델은 양손을 뻗고.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당신의 가엾은 양들에게…… 양은 아니지만. 어쨌든 힘을 내려주소서.”
거인의 커다란 몸에 하얀빛이 서렸다.
거인은 이 변화에 놀라워했다.
“오오! 갑자기 몸이 가볍다! 기분이 좋다!”
“하얀 인간이 뭔가 했다!”
몸이 가벼워지고.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
빛의 여신의 자비를 처음 몸으로 느껴본 거인은 크게 감동해, 더욱 신나게 악마를 두들겨팼다.
“으윽! 그만! 그만하란 말이다!”
결국. 참다못한 두르핀이 외쳤다.
“버러지들아! 나를 지켜라!!”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병사와 싸우던 하수인들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싸우던 병사를 무시하고 두르핀에게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안간힘을 쓰며 두르핀을 붙잡고 있던 데일은 외쳤다.
“엘레나! 막아!”
“맡겨주세요!”
프라우의 호위를 받던 엘레나가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파도는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려던 하수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친 물결에 하수인들이 주춤했다. 엘레나는 계속해 마력을 퍼부었다. 파도를 움직여 점점 하수인들을 한데 모았고, 종국에는 파도를 넓게 둘러 하수인들을 가두는 데에 성공했다.
파도 감옥.
당황하던 하수인들은 이내 이게 평범한 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대로 파도를 뚫고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쩡!
파도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물속을 헤쳐지나가려던 하수인들은 산 채로 얼어버렸다.
따뜻한 봄날에 어울리지 않게 한기가 풀풀 날렸다.
“허억. 허억.”
과다한 마력의 사용으로 엘레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엘레나를 프라우가 들쳐업었다.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허억. 가두기만 했을 뿐이에요. 금방 빠져나가겠죠. 마무리 해야 해요.”
“마력을 과다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여기는 이제 저희한테 맡겨주시죠.”
“하지만.”
“기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꼬마 마법사님.”
서늘한 목소리에 둘의 시선이 돌아갔다.
사제장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들을 가두어둔 것만으로도 꼬마 마법사님은 할 일을 다 한 거예요. 나머지는 저희한테 맡기세요.”
엘레나는 불만스레 쏘아붙였다.
“꼬마 아니에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사제장이 프라우에게 말했다.
“프라우 경이었던가요? 저를 저 얼음 벽 위로 올려주시겠어요?”
“수상쩍은 주문쟁이를 업고 싶지는 않은데.”
“주문쟁이가 아니라 사제랍니다.”
“그거나 그거나.”
“죽고 싶지 않으면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알았다.”
프라우가 에리얼을 업고 얼음벽 위로 훌쩍 올라갔다.
벽에 갇힌 하수인은 얼음을 향해 몸을 던지며, 벽을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얼음 벽이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금방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수고했어요. 잠시만 눈을 감고 있으세요.”
“눈을 감으라고? 하! 적을 앞에 두고 전사에게 눈을 감으라니. 그럴 수는 없다.”
사실은 옆에 있는 사제장이 껄끄러워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거지만 말이다.
에리얼은 어깨를 으쓱였다.
“경을 배려한 건데. 싫으면 말고요.”
사제장은 안대를 벗었다.
프라우는 사제장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왜 안대로 얼굴을 가리고 있단 말인가. 장님일까? 아니면 화상 자국이 있나?
호기심을 가지고 고개를 돌린 프라우는 굳어버렸다.
에리얼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눈 감고 있으라고 했잖아요.”
이윽고 에리얼에게서 어둠이 흘러내려 얼음 벽 안에 갇힌 하수인들을 덮었다.
밤의 사제의 최상위 기술.
꿈 안개.
안개가 하수인들을 덮자, 사위에 정적이 흘렀다.
안개에 갇힌 하수인들이 비명이나 고함을 지를 법도 한데 그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개는 머지않아 걷혔다.
그리고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에리얼은 다시 안대를 썼다.
그리고 프라우에게 말했다.
“다시 내려주세요. 아직 하수인들은 많이 남았잖아요?”
“아, 알겠소.”
그제야 굳어 있던 프라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모르게 정중하게 말한 프라우가 다시 에리얼을 업었다.
얼음 벽을 훌쩍 뛰어내린 프라우는 생각했다.
‘……봐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이군.’
안대를 벗은 에리얼 사제장의 얼굴에는…….
프라우는 에리얼이 권고할 때 순순히 눈을 감지 않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 * *
아무리 단단한 악마라도, 강력한 축복을 받은 거인 넷이 쉴새 없이 몰매를 때리면 무사하기 힘들다.
두르핀은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지금은 그 뛰어난 기동성도 소용이 없었다.
놈에 대해서 잘 아는 데일이 두르핀이 제 특기를 발휘하는 걸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콱!
계속된 타격 끝에 마침내 상처가 생겼다.
뜨거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기회다.
데일은 그 안으로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두르핀은 겉은 단단하지만, 정신은 다른 악마에 비해 약하다.’
덩치만 큰 어린애라고 할까.
데일은 건틀릿을 박아넣어 산 채로 생기와 혼을 거두기 시작했다.
두르핀이 저항했다.
정신과 정신의 대결. 악마의 탁한 영혼에 데일의 정신이 오염된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버틸만하다.
두르핀은 영혼이 산채로 뜯겨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괴성을 내질렀다.
껍질이 단단하고.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일수록 갑작스러운 고통에 더 크게 놀라는 법이다.
데일은 그 점을 잘 이해했다.
“그어억!”
끔찍한 고통에 어떻게든 방어자세를 취하던 두르핀이 몸부림쳤다.
겉껍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한 배가 드러났다.
거인들은 이때다 싶어 그 부위를 신나게 두들겨 댔다.
‘좋아. 이대로 착실히 깎아나간다. 하지만 너무 몰아세워서도 안 돼. 이놈의 발광은…….’
그때. 두르핀이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두르핀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데일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이런!’
게임을 하던 시절. 데일은 여러 악마를 상대해보았다.
악마는 능력과 힘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악마는 상대하기 수월하나, 또 어떤 악마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두르핀의 경우에는 데일을 가장 많이 죽인 악마 중 하나였다.
두르핀이 강력하냐? 하면 아니었다.
두르핀의 전투 능력은 아르구르보다 떨어진다.
하지만 싸움의 승패가 힘의 고저로만 판가름나는 건 아니다.
두르핀의 진짜 무서운 점은 따로 있었다.
악의. 그리고 독기.
두르핀의 그 더러운 성미만큼은 다른 악마를 압도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아르구르가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타입이라면 두르핀은 정반대다.
자기가 죽는 걸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함께 죽이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한다.
자폭.
두르핀은 걸어다니는 폭탄이었다.
악마가 가진 힘이 한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등껍질 사이사이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머지않아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이 주위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폭발을.
‘실수했다.’
데일은 적당한 시점까지 두르핀을 몰아세운 뒤. 거리를 벌려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데일의 예상보다 아군이 훨씬 잘 싸워주었다.
에스델의 축복을 받은 거인들.
혼자서 하수인을 모두 가둔 엘레나.
그 하수인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에리얼까지.
덕분에 싸움이 예상 이상으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게 두르핀을 자극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런 와중에 데일이 산 채로 생기를 흡수해 고통까지 주었으니,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인내심이 무너져내리고 만 것이다.
‘이대로는 위험해.’
두르핀 주위에 있으면 전부 죽는다.
지금이라도 거리를 벌려야 했다.
하지만 두르핀은 한 번 더 그 악의를 발휘했다.
“날 고통스럽게 한 만큼, 네놈들에게도 고통을 주겠다!!”
그렇게 외친 두르핀이 짤막한 두 다리로 일어서 쿵쿵 걷기 시작했다. 데일이 몸을 둥글게 마는 걸 방해하니, 그냥 서서 이동하기로 택한 것이다.
데일이 땅에 발을 디뎌 막아보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두르핀은 누가 공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으며, 그저 다리를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두르핀이 향하는 곳에 있는 것은…… 피난민들.
에리얼. 엘레나. 프라우. 에스델. 하켄. 하티. 데일과 관계 있는 모든 사람들.
두르핀은 제 한 몸을 불살라, 그 사람들을 모두 죽음으로 이끌려 하고 있었다.
‘막아야 해. 어딘가로 날려보낼 수 있다면…… 아.’
데일의 눈에 까마득한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깎아지르듯 서 있는 절벽과 그 아래에 흐르는 거친 물살.
“모두 밀쳐!!”
데일이 외쳤다.
짧은 두 마디.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우아아아!”
거인들이 힘껏 달려들어, 나무줄기를 마치 야구 배트처럼 휘둘렀다.
쿵!
강한 충격에 두르핀의 몸이 협곡 쪽으로 밀려났다.
크게 물러난 두르핀은 그러나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뒤뚱뒤뚱 걸었다.
악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는 악의가 두르핀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다.
“신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에스델이 만들어낸 장벽이 다시 한번 두르핀을 튕겨냈다.
두르핀은 다시 달린다.
사람들이 필사적일수록 두르핀은 더욱 힘차게 달렸다. 입가에는 조소가 어린다.
그게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엘레나가 한 올 남은 마력을 쥐어짜 전격의 창을 날렸다.
에리얼도 남은 여력을 쏟아 어떻게든 제지하려 했다.
힘이 남은 병사들은 달라붙어 두르핀을 날붙이로 찔러댔다.
전부 소용없다.
악마는 달린다.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두르핀이 점점 더 피난민들과 가까워졌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도 거세지고 있다. 한계에 다다랐다. 곧 두르핀은 폭발할 것이다.
‘안 돼.’
그래서는 안 된다.
기껏 여기까지 왔다.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데일 혼자서 도망치면.
그렇다면 데일은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 있는 이들을 모두 잃고 말겠지.
그런 건 싫다.
단순히 인간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는 조부의 당부 때문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 흉내도 아니다.
데일은 이들이 진심으로 살아남길 바랐다.
지금 당장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데일은 달렸다. 온몸의 마력과 간절함을 담아 기술을 사용했다.
‘영혼 지배.’
순식간에 빠져나간 마력이 두르핀을 향한다.
원래라면 악마에게는 어림도 없는 공격이다.
하지만 두르핀의 정신력은 다른 악마와 비교해 몹시 약하다.
데일과 두르핀의 정신이 다시 한번 대결을 펼친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리겠다는 두르핀의 악의가 데일을 짓누르려 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살리겠다는 데일의 간절함이 맞섰다.
그리고. 인간의 간절함은 때로는 놀라운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단 한순간. 한순간이나마 두르핀의 전진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영혼 지배가 먹힌 것이다.
머지않아 두르핀은 지배에서 풀려나, 다시 죽음의 전진을 재개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데일은 이 잠깐의 정지만으로도 충분했다.
데일은 멍하니 있는 두르핀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몸을 힘껏 붙잡았고. 가속된 속도 그대로 맞부딪혔다.
기우뚱, 넘어간 두르핀의 몸이 협곡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노오옴!”
지배에서 벗어난 두르핀이 분노하며 데일을 떨쳐내려 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절벽을 타고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데일은 두르핀을 잡은 손에서 결코 힘을 빼지 않았다.
두르핀이 소리쳤다.
“이 멍청한 것! 죽고 싶은 것이냐!!”
확실히 위험하다. 두르핀의 폭발을 바로 앞에서 얻어맞는 것은.
어쩌면 시체조차 남지 않고 소멸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데일은 오히려 차분했다.
늘 그렇듯. 두려움은 없다.
그 얼굴에서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데일은 두르핀에게 대꾸했다.
“함께 지옥으로 가자.”
“이노오옴!!!”
두르핀이 고함을 지른다.
절벽 위에서는 데일의 이름을 외치는 동료들의 비명이 들린다.
저 아래 거친 물살이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
사나운 바람이 온몸을 훑고 가는 소음.
온갖 소리가 데일의 투구 안에서 웅웅 울렸다.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데일은 그저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귓가를 어지럽히던 소음이 사라지고. 성대한 폭발이 온 협곡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