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2)
빈민가
* * *
정오가 되자 일행이 모두 일어났다.
데일은 마차를 끌고 왔다.
하켄은 다시 유적에 내려가 죽은 용병들의 장비를 챙겼다.
마차에 오른 뒤는 다시 평온한 이동이었다. 하지만 이 평화를 지루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죽을 위기에 한번 처하니, 이런 여유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발튼은 고개를 젖힌 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하늘에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눈부신 걸 보듯 쳐다보았다.
“설마 이 풍경을 살아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소.”
“거 감상적인 드워프 양반이구만.”
하켄이 피식 웃자 발튼도 미소지었다.
“그대들에게는 도움을 받았소. 특히 데일 경께는 더욱. 목숨의 빚을 졌으니 반드시 갚도록 하겠소.”
발튼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나는 기계 장치를 만지는 기술자이자 여느 드워프들처럼 대장장이이기도 하오. 게다가 석궁을 제법 다룰 줄 아는 용병이기도 하지.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기계 장치라.
데일은 발튼이 건네주었던 상자가 떠올렸다. 버튼을 누르면 비수가 나가는 장치.
그 조그마한 상자에서 쏘아져 나오는 비수는 악마의 두개골도 뚫었다.
그 정도로 솜씨 좋은 드워프이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거다.
데일이 덤덤하게 말했다.
“생각해둔 게 있는데, 나중에 얘기하겠다.”
“기대하고 있겠소.”
이때다 싶은 하켄이 끼어들었다.
“그러면 나는 방패 좀 봐줘요. 한동안 수리를 안 했더니 영 불안하네.”
“한번 보겠소. 이런. 상태가 영 좋지 않군.”
데일은 일행의 대화 소리와 말발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검을 닦았다.
마검이 햇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다.
* * *
사흘 뒤 정오 무렵에 이레네에 도착했다.
빈민가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아이들이 몰려왔다.
이제는 데일이 식량을 적선해준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데일은 넉넉히 준비해뒀던 식량을 에스델에게 넘겨주었다.
“나눠줘라.”
“예? 제가 말입니까?”
“나는 아이들이 무서워한다.”
식량이 든 배낭과 데일을 번갈아 쳐다보던 에스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무서운 흑기사보다는 어여쁜 사제가 더 인기가 많았다.
평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에스델은 아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며 말했다.
“저기 있는 기사님이 나눠주신 거야. 데일 경께 감사하며 먹으렴.”
“감사합니다 사제님!”
“아니, 나 말고…….”
에스델은 일부러 데일의 이름을 들먹였다. 호의를 베푼 자가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데일은 구태여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켄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으며, 발튼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웬 흑기사가 아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준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당연히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발튼이 물었다.
“데일 경.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뜬금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밤의 세례를 받은 흑기사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지녀야 감정들이 대부분 결여되어 있다 들었소. 그나마 남은 인간성도 뒤틀린 데다, 언데드로서의 충동까지 있다고 들었지. 그래서 위험한 것이고.”
“아니. 이 양반은 별 얘기를 다 하네…….”
하켄이 슬쩍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하지만 데일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고, 발튼도 말을 계속했다.
“나도 흑기사를 몇 번 만나본 적이 있었소. 전장에서였지. 적들이 너무 강했는데, 흑기사가 놈들의 한복판에서 맹수처럼 날뛰었소. 그러다 집중 공격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소. 그때 그 흑기사가 어떻게 했냐면…….”
“아군을 죽여 회복했겠지.”
말을 받은 건 하켄이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이런 일이 전장에서는 생각보다 흔히 벌어지는 듯했다.
“맞소. 흑기사는 아군을 죽여 회복했고, 적을 죽이다 또 상처를 입으면 근처에 있는 아군을 죽였소. 지휘관들은 그냥 내버려 두었지. 적어도 흑기사가 아군보다 적군을 많이 죽였으니까. 그건 절대 인간이 아니었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소.”
데일은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질 거라고 느꼈다.
그래서 무감정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데일 경은 그들과 다른 것 같소. 그것도 상당히 많이. 특히 오늘은 놀라울 정도인데…….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데일 경은 정말, 저들을 돕고 싶어 돕는 것이오?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오?”
데일은 발튼에게 눈길을 주었고, 발튼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데일과 시선을 마주쳤다.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묻고 싶었던 게 이거였나.’
다른 의도라. 애매한 표현이었다.
무얼 의심하는 걸까.
혹시라도 데일의 행동에 사악한 음모라도 숨어 있다 여기는 건가?
‘아니. 표정 보면 그건 아닌데. 그냥 진짜로 궁금한거군.’
지식인 특유의 호기심일까.
발튼 나름으로는 큰 모험이었을 거다. 기분 나빠진 데일이 언제 훼까닥해서 검을 휘두를지, 그는 모르니까.
그래서 최대한 빙빙 돌려서 설명한 것일 거다.
데일은 기꺼이 이 용기 있는 드워프에게 답해주기로 했다.
“나도 모른다.”
“……예?”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인지 아닌지.
데일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
“굳이 답하자면,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군.”
“음. 그래도 뭔가, 좀 더 설명을 해주시면…….”
귀찮은 듯. 투구를 긁적이던 데일이 말했다.
“내 조부께서 말하길, 원래 이런 일은 특별한 의도 없이 그냥 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조부의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그냥이라…….”
데일의 대답을 곱씹던 발튼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을 들었소. 경의 조부께서는 실로 훌륭하신 분이군.”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것 빼면 좋은 분이었지.”
만족스런 대답을 얻은 발튼은 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조용히 눈치만 보던 하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드워프 형씨는 궁금한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적당히 단순하게 사는 게 속 편하고 좋은데.”
“하하. 이리 태어난 걸 어찌하겠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에스델이 빈 배낭과 함께 되돌아왔다. 에스델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후.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다른 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에스델이 다시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도시를 향해 느릿하게 이동했다.
어느새 몰려들었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 아이들은 이쪽을 흘끗거리다, 데일과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까딱 숙였다.
데일은 손을 휘저었다.
아이들이 후다닥 도망쳤다.
어깨를 으쓱한 데일은 마차에 등을 기대려 했다. 하지만 그때. 뒤쪽에서 찌릿한 적의가 느껴졌다.
적의에 민감한 데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전처럼 허름한 집들이 서 있을 뿐이었다.
데일의 맞은편에 있던 하켄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데일 경?”
“아니. 아무것도. 기분 탓이었던 것 같다.”
“그런가요?”
마차가 도개교를 넘어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 * *
일행은 우선 용병 길드로 향했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악마 하수인의 출현은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다.
넷은 각각 다른 길드 직원에게 의뢰 내용을 보고했다.
데일의 상대는 가란드였다.
데일은 악마 하수인 하시나를 상대한 얘기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간결하게 설명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가란드는 악마 하수인 얘기가 나오자 크게 놀랐고, 그 하수인을 데일이 처치했다는 대목에서는 경악했다.
“아르구르의 사도 하시나. 제법 유명한 악마 하수인입니다. 그 괴물을 데일 경 혼자서 토벌했다니…….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데일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가란드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지 않네요.”
“무엇이 말이오.”
“요즘 들어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군인이나 용병들이 이곳 아레네로 돌아오는 경우가 잦아졌습니다.”
데일이 말을 받았다.
“하켄 같은 경우 말이오.”
“비슷합니다만, 하켄은 냉정히 말해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죠. 하켄보다 훨씬 강력한 실력자들이 도시로 흘러들어오고 있어요.”
“그렇군.”
“심지어 이번에 악마의 하수인이 도시 근처에 나타났으니, 후방을 수호한다는 명분까지 생겨버렸군요. 더 많은 수가 몰려들 겁니다.”
데일이 물었다.
“실력자가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니오? 용병 길드에 일이 너무 많아 늘 사람이 모자란다고 들었는데.”
가란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들이 순순히 용병 일을 해줄지 의문이군요. 게다가 이레네의 세력 구도는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곳에 새로운 힘이 흘러들어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균형이 깨질 것이다.
그리고 균형이 깨진다면 혼란이 발생할 거다.
가란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요즘 빈민가가 쪽 움직임이 수상쩍습니다. 성안에 진출하려는 건달들도 있고,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려는 낌새도 있고.”
외곽 안에 진출하려는 건달? 분명 데일 역시 얼마 전에 그런 놈들과 마주했었는데…….
‘취한 노새 여관.’
문득 빨간 머리 여주인과 그녀를 괴롭히던 건달들이 떠올랐다.
그 사이에 건달들이 보복하러 오지 않았을까?
여관이 없어지면 데일은 또 다시 마구간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그 당찬 여자라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확인할 필요성은 느껴졌다.
“보고는 끝났으니, 일어나겠소.”
“아.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길드를 대표해 말하겠습니다. 악마 하수인을 처치하고, 용병을 구출해준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수나 준비해두시오.”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는 가란드에게 데일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출구로 걸어갔다.
그 등을 향해 가란드가 말했다.
“한동안 도시가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부디 데일 경도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시면 좋겠군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가란드는 한숨을 쉬고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고, 전선에는 여유가 생겼다. 왜인지 전선의 장군들은 이레네로 자기 병사를 야금야금 보내고 있어. 심지어 이번 악마 하수인의 출현으로 명분까지 생겨버렸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공교로운데.’
팽팽히 머리를 굴리던 가란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평의회를 소집해야겠어.”
그는 문밖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 *
데일은 취한 노새 여관으로 향했다. 원래는 밤의 신전부터 들를 생각이었지만, 순서를 조금 바꾸기로 했다.
“어서오세……. 데일 경!”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당찬 눈매의 카일라가 반갑게 맞았다.
여관 안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는데, 테이블 한구석에는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작은 체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데일 경. 이번 의뢰도 무사히 마치셨나요?”
레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여준 데일이 카일라에게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별일이요?”
“내가 박살 낸 놈들. 그놈들이 보복하러 오지 않았냐고.”
“음. 얼씬도 안 하던데요? 아. 혹시 걱정해주는 거예요? 맞죠?”
데일은 카일라를 깔끔히 무시했다. 그리고 레온 앞에 앉았다.
“글공부 중이었나?”
“예. 카일라 씨가 의욕이 넘치셔서요.”
“어차피 파리만 날리는데, 공부라도 해야죠. 이제 웬만한 건 다 읽을 줄 알아요!”
“카일라 씨가 빨리 배우더라고요.”
카일라는 허리에 손을 짚고 우쭐거렸고, 레온은 그런 제자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데일에게 물었다.
“그것보다 이번 의뢰 얘기나 해주세요.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
“이번에도 장물이 조금 있었지만, 다른 용병이 대신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런가요. 아쉽지만, 괜찮아요. 요즘 장물 시장이 성황이라 저도 두둑하게 벌고 있거든요. 이대로면 머지않아 학교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레온이 주먹을 불끈 쥐자, 카일라가 화색을 띠었다.
“와아! 그럼 나도 놀러 가도 돼요?”
“그럼요! 카일라는 제 첫 번째. 아니, 두 번째 학생인 걸요.”
레온은 학교를 세울 계획에 대해 재잘거렸다. 어디 건물을 쓸 거라느니, 학생은 어떻게 할 거라느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레온의 눈은 앞으로에 대한 희망과 꿈으로 빛나고 있었다.
데일에게은 이제 품을 수 없는 감정. 하지만 레온을 보니, 조금이나마 대리 만족할 수 있었다.
한참을 카일라와 떠들던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아내가 기다리겠어요.”
“엑. 레온씨 결혼했어요?”
“하하. 아직 경황이 없어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요.”
맑게 미소 지은 레온이 책과 종이를 가방에 챙겨 넣고, 총총 뛰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카일라가 중얼거렸다.
“쩝. 시간도 늦었는데 저렇게 혼자 보내도 될까요?”
“레온은 애가 아니다.”
“그치만, 생긴 건 아무리 봐도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잖아요.”
카일라는 레온이 못내 걱정되는지, 출입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학교를 세우려면 생각보다 고려해야 할 게 많았다.
레온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계획서를 꼼꼼히 점검했다.
‘의자는 공방에서 싸게 사기로 했고. 교재는 내가 직접 필사해서…….’
그러던 레온은 문득,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주위를 두리번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원래도 으슥한 빈민가의 거리였지만,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적었다.
불길함을 느낀 레온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로브를 눌러쓴 이인조였다. 깜짝 놀란 레온은 뒷걸음질했다.
뒷골목에서 로브 뒤집어쓴 놈들은 백이면 백 강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레온이 물러서자 괴한이 따라왔다. 레온이 다급하게 물었다.
“너, 너희 누구야.”
“레온. 최근 장물아비랑 붙어먹어서 짭짤하게 벌었다며? 돈 좀 있다고 들었는데. 맞아?”
레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레네에서 누가 돈 좀 만졌다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금방 퍼지기 마련이다.
그 소문에 이끌려 강도들이 꼬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많이 벌지는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 시선이 끌린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던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일단 도망쳐야…….
푹!
“어?”
레온의 가슴에 칼날이 삐죽 솟아났다.
대체 어느 사이에 접근했단 말인가. 레온은 고개를 돌려 적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대로 칼을 뽑았다. 꿰뚫린 심장에서 개울처럼 흐르던 피는, 이제 강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레온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들고 있던 종이도 와르르 쏟아졌다.
“안……돼.”
레온은 손을 뻗어 종이를 붙잡으려 했다. 이성이 아닌,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의 초점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괴한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뭐야. 싱겁잖아.”
다른 괴한이 말했다.
“온전한 상태로 데려오라 하셨다.”
“알았어 알았어.”
건성으로 대답한 괴한은 레온의 몸을 질질 끌고 사라졌다.
빈민가의 어둡고 으슥한 거리에는 피 묻은 종이 몇 장만이 바람에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