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1)
마검
* * *
마검은 잠시 불꽃을 갈랐을지언정,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다.
방안을 가득 메웠던 불꽃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불꽃에 삼켜진 데일의 갑옷이 군데군데 녹아버렸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데일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 흐느적거리는 하시나가 보였다.
놀랍게도, 하시나는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반으로 쪼개졌던 머리가 어느새 다시 붙어 있었다.
‘질긴 녀석이군.’
하지만 머리 외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눈동자가 흐릿하다. 점점 생명이 꺼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악마의 힘을 받았어도, 이 정도의 타격을 입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데일이 다가갔다.
하시나가 허망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이, 이럴 줄 알, 았으면 아르구르를 따르는 게 아, 니었는데.”
데일이 말을 받았다.
“아르구르가 아니면 뭐. 가니아고스라도 따를려고?”
데일이 게임에서 상대해봤던 악마 중 하나였다.
마법사들의 우상.
기상천외한 주문을 사용하는 게 몹시 짜증 나는 적이었다.
하시나는 웃었다.
“흐. 흐흐. 어디 산속에 처박혀 지냈어? 가니아고스가 뒤, 진지 언젠데.”
잠깐 멈칫한 데일이 곧바로 물었다.
“……그놈이 죽었다고? 누가 죽였지?”
하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경 거슬리게 하는 웃음을 계속 흘리며 자기 할 말만 내뱉었다.
“언데드야 지금 승리를 마음껏 기뻐해라. 주인께서 나의 눈으로 너를 보았으니, 반드시 복수해주실 것이다.”
“……방금까지는 아르구르를 선택해서 후회한다며.”
“아아. 별이 가까워지고 있어. 이 넓은 우주에 자그마한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바스러지는구나.”
하시나는 제정신이 아닌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돌연, 그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너무나 인간적인 표정이었다.
“내,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무슨 짓을 해버린 거야. 난 그저 힘을 얻어 복수를. 어머니, 아버……!”
써걱!
데일은 하시나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 심장에 건틀릿을 박아넣었다.
어마어마한 생기와 잔혼이 흘러들어왔다.
녹아내렸던 갑옷이 빠르게 원상태를 되찾았다.
굳이 하시나의 기억을 엿보지는 않았다. 솔직히, 관심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다.
하시나는 그녀 나름의 이유와 사연으로 인류를 배신하고 악마를 섬겼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다.
하시나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많은 죄를 저질렀다는 것.
그 이상 데일이 알 필요는 없었다. 데일은 그저 만족할 뿐이었다.
‘어쩌면 등급이 오를 수도 있겠는데.’
더 많은 성장. 그리고 튼튼한 검.
데일은 이번 의뢰로 얻은 게 많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유적을 떠나기 전에 데일은 하시나의 머리를 두어 번 더 베었다.
악마의 하수인이니 혹시나 되살아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마무리 작업까지 마친 데일은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마치 조금 전까지의 소란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옛 드워프들의 유적에는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 * *
유적을 나서자마자 데일은 하켄과 에스델, 그리고 둘의 부축을 받는 발튼과 마주쳤다.
셋은 홀로 나오는 데일을 보며 깜짝 놀랐다.
“데, 데일 경!”
“정말 데일 경 맞아요? 혹시,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거나.”
데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여깄나. 도망치라고 했잖아.”
에스델과 하켄은 서로 눈짓을 하며 우물쭈물 얘기했다.
“그게, 역시 그냥 두고 가기는 좀 그래서…….”
“저는 왠지 데일 경이 이길 것 같더라고요.”
한쪽은 양심 때문이고, 한쪽은 데일이 이길 것 같아서 남았단다.
동료를 버리지 않는 그 마음은 좋게 봐줄 수 있으나…….
“만약 내가 패배했다면, 누군가는 길드에 소식을 전했어야 한다. 하지만 너희는 여기 멀뚱히 서 있다가 하수인 놈에게 사로잡혔겠지.”
“예…….”
“큼.”
“특히 하켄. 에스델은 몰라도 용병 생활을 오래 한 너는 그러면 안 됐다.”
데일의 말이 옳았다.
이들이 여기에서 기다린다고 데일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겠는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게 맞았다. 그게 이성적이다.
하켄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죄송합니다 데일 경. 도망쳐야 하는 게 맞았는데……. 면목이 없습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데일이 생각하는 하켄은 노련한 용병이다.
그는 과거 원아이 무리에 쫓길 때도, 늘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용병에게서 그때의 냉정함은 보이지 않는다.
데일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
‘아니면 심정에 변화가 있던가.’
문득, 그가 술집에서 혼자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랐다.
오랜 친우의 죽음이 하켄을 바꾼 것일까?
데일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데일은 이겨서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
비록 하켄과 에스델의 판단력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지만.
적어도 둘이 전투 도중 동료를 버리고 냅다 도망쳐버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된 거다.
어느새 흐릿한 빛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싸우느라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출발하기에는 에스델과 하켄이 너무 지쳤다.
발튼의 상태 역시 좀 더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둘러앉았다.
하켄은 온기를 쬐며 중얼거렸다.
“의뢰 출발하기 전까지는 악마 하수인과 싸우리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데일 경. 뭐 값나가는 물건들은 없었습니까? 하수인 놈이 보석이나 금화 같은 걸 들고 있지 않았나요?”
“아니. 있었어도 모두 불에 녹았을 거다.”
“아. 그렇습니까. 이번에는 허탕이었나.”
“대신 이걸 주웠다.”
데일은 하시나를 어떻게 이겼는지 짧게 설명하고는 검은색 롱소드를 보여주었다.
에스델과 하켄, 발튼 모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럼 불신자 드워프 왕국이 진짜로 있었다는 거예요? 허. 난 당연히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하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별로 좋은 느낌은 주지 않네요. 그냥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에스델은 꺼림칙하게 여겼다.
“…….”
마지막으로 발튼은 한참을 말없이 롱소드를 관찰했다.
그러다 눈을 감고는 중얼거렸다.
“신성 거부자.”
데일이 물었다.
“하수인도 그 이름으로 부르던데. 유명한가?”
“유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름 유명한 이야기요.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데일은 어서 더 설명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발튼이 이야기했다.
“먼 과거, 빛의 신께 저주받은 드워프들이 있었소. 왜 저주를 받았으며,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는 전해지지 않소. 그저 끔찍한 저주였다는 것밖에는. 신께서는 아마 이 드워프들이 참회하고, 회개하길 바랐던 것 같소. 하지만 이 불경한 드워프들은 그러지 않고 오히려 신앙을 거부해버렸지.”
“허. 미친놈들이구만.”
하켄이 중얼거렸고, 에스델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튼이 이어 설명했다.
“저주로 드워프들은 하나둘 쓰러졌소. 그러다 국왕만이 홀로 남게 되었지. 국왕은 백일 밤낮을 들여 검 하나를 만들었고, 그 검에 온 왕국의 염원을 벼려내었소. 그게…….”
“이거군.”
“그렇소.”
데일은 마검을 들어 올려 유심히 살폈다. 그 안에 깃든 역사를 들으니, 새삼 다르게 보였다.
그러다 검신에 새겨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데일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켰다.
“이건 무슨 글자지?”
“고대 드워프 문자요.”
“읽을 수 있나?”
발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열었다.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겠다.”
데일은 다시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신에 새겨진 글씨를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홀로 남은 드워프 국왕은 멀쩡한 정신으로 이 문장을 새겼을까, 아니면 이미 미쳐버린 후였을까.
발튼 역시 검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설명을 마무리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마검은 모든 신성을 베어낼 수 있다고 하오. 오직, 불신자만이 다룰 수 있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그건 거짓이었나 보오.”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시오.”
데일은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물었다.
“이 검이 하수인의 불꽃을 베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문으로 만들어낸 불꽃이었던 것 같다. 신성이 아니라.”
“어떻게 주문을 베었을까 물으시는 것이오?”
“그래.”
발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드워프 국왕에게는 주문이나 신성이나 별 차이가 없었던 것 아니겠소.”
“그렇군.”
“흠. 흠흠. 거기까지 하시죠.”
듣다 못한 에스델이 끼어들었다. 그녀가 듣기에는 너무나 불경하고, 신성모독적인 대화였던 탓이다.
하켄도 멍하니 있다가 얘기했다.
“음, 대화가 조금 어려운데. 어쨌거나 대단한 보검. 아니, 마검이 있었고, 악마 하수인 년이 그걸 찾으러 이곳까지 왔다는 거네요?”
발튼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깔끔한 설명이오. 대체 몇천 년간 파묻혀 있던 유적을 어찌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그 뒤로 일행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음이 풀어지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데일을 제외한 모두가 잠에 들었다.
데일은 투구를 벗고, 창백한 얼굴에 모닥불을 쬐며 여러 생각을 했다.
악마 하수인 하시나. 그녀가 보여준 막강한 악마의 힘. 신성 거부자. 불신자 드워프들.
그리고 이미 죽었다고 전해진 악마.
‘악마가 그렇게 쉽게 죽는 게 아닌데.’
이곳은 데일이 플레이어하던 게임 속과 배경이 같다. 덕분에 데일의 기억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건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 시대가 조금 다르다. 데일이 활동하는 지금 이 순간은 게임 배경에서 5년이 지난 후다.
데일은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보아왔던 5년전의 과거를, 그러니까 게임의 배경을 떠올렸다.
악마의 군세가 온 대륙을 집어삼키려 하던 처참한 시대.
당장 내일이면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세기말적 분위기.
플레이어가 구하지 않으면, 반드시 파멸에 이르는 그런 암울한 세계관.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최전선의 상황이 소강상태에 이르렀단다. 악마에게 속절없이 밀리는 게 아니라, 전선이 고착화 되었다.
하켄처럼 전선에 있던 용병들이 도시로 돌아오는 모습도 보인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증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데일의 기억 속 악마들은 불합리할 정도로 강한 적이다.
게임사가 밸런스를 잘못 설정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을 정도이니, 플레이어도 악마를 상대함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며, 가끔 꼼수도 부려야 했다. 가끔은 직업을 바꿔가며 도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끝끝내 악마의 왕을 토벌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정도로 악마는 강력하다.
그런 괴물들이 스러졌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어디까지나 게임과 같은 배경을 가진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게이머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 세계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악마를 사냥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
이런 고민을 계속하다 보면 늘 같은 의문에 다다랐다.
대체 누가, 왜 데일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걸까.
한때는 거의 매일 같이 그 의문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혼자 고민해본들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밤의 여신뿐이다.
그리고 밤의 여신은 대답을 주지 않았다.
정답에 다다를 수 있는 막연한 방향만 제시해주었을 뿐.
“으음. 얼마나 잔 거죠?”
졸음기 가득한 에스델의 목소리가 데일의 상념을 깨웠다.
에스델은 데일을 보고,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뭐 고민 있습니까?”
“왜.”
“아니 그냥. 평소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해 보여서 물었습니다. 그냥 제 감이지만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데일 경도 좀 쉬세요.”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투구를 다시 눌러썼다.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그가 가야 할 길은 단순했다.
더 강해지고, 정진한다. 그리하면 여정의 끝에 원하는 걸 거머쥘 수 있을지니.
데일은 자기를 묘하게 바라보는 풋내기 사제를 보며 생각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