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82)
영웅들
* * *
싱글 플레이어 게임.
즉, 주인공이 캐릭터를 조종하며 세계관을 탐험하는 그런 류의 게임이다.
다른 사람을 만날 일도 없고, 다른 캐릭터를 키우려면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런 류의 게임.
처음 데일이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데일은 여러 가설을 세웠었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온 걸까?
아니면 게임과 배경만 같은 세계에 다시 태어난 걸까.
혹은, 나는 원래 이 세계의 주민인데 어느 날 갑자기 미쳐버려서 지구에 대한 거짓된 기억을 얻은 걸까.
가장 받아들이기 쉽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건 첫 번째 가설이었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왔구나.’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데일은 게임 속의 배경과 가끔 마주치는 게임 속 인물들을 보며 반쯤 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설이 지금 흔들리고 있다.
데일이 키웠던 캐릭터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이곳이 게임이 맞다면,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건 대체.’
데일은 조각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턱이 각진 용병.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한 여사제. 단발머리에 음울한 눈을 한 마법사. 십자 모양으로 눈구멍이 뚫린 투구를 깊게 눌러쓴 기사.
모두 데일이 기억하는 그대로다.
착각이 아니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영웅이니 용병이니 하는 것들은 그렇게까지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아보는 걸 뒤로 미뤘다. 그 밖에도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이 네 명이 지닌 비밀이야말로 데일이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될 것 같다고.
데일은 강한 확신을 가졌다.
문득 밤의 여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계속 정진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과 알고 싶은 것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 했던가.’
그 말 그대로였다.
데일은 고생 끝에 상위구역에 입성할 수 있었고,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렇게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처음 오고 얻은 실마리.
이걸 놓쳐서는 안 된다.
‘정보를 알아봐야 해.’
한가하게 상위구역을 둘러볼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이 실마리를 따라 움직일 때다.
하지만 어디서 정보를 알 수 있을까?
‘최대한 신빙성이 높은 정보를 얻고 싶은데…….’
그렇게 데일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문득,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깨달았다.
너무 집중해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것이다.
데일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음?’
젊은 여인이 두 명 서 있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서로 얼굴이 닮은 걸 보니 자매인 듯했다.
‘귀족인가?’
귀족이 이렇게 대로를 돌아다니다니. 상위구역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두 자매는 어째선지 데일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데일이 물었다.
“무언가 볼 일이라도 있으시오?”
데일이 말을 걸자 두 여인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더니, 언니 쪽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처음 보는 기사님이 조각상을 보고 계시기에…….”
여인은 데일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 그제야 그 갑옷이 흔히 볼 수 없는 색깔이라는 걸 알아챘다.
여인이 중얼거렸다.
“아. 흑기사…….”
그러더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데일 경이십니까?”
“……나를 아시오?”
데일이 묻자 두 여인은 서로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흥분한 목소리로 서로 속닥거렸다.
데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뇨. 그. 책에서 나와있는 것보다 잘생기셔서…….”
“책?”
“패, 팬입니다! 여기에 글귀 하나만 적어줄 수 있으신가요?”
그러더니 품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서 데일에게 내밀었다.
비싼 가죽으로 된 표지에 무려 금박으로 제목을 새겨 놓은 책이었다.
데일은 제목을 읽어내렸다.
‘명예로운 흑기사의 모험과 결투,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데일은 종이를 넘겨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주인공은 각지를 모험하며 약자를 돕는 명예로운 흑기사다.
어느 날 그는 오래된 왕국의 공주가 사악한 마법사와 비열한 기사의 농간에 넘어가 곤욕을 치를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참지 못한 주인공은 기사에게 결투를 벌여 승리하고, 그 부하와 사악한 마법사들까지 단칼에 베어버린 뒤, 공주를 무사히 구출해낸다.
그 뒤, 공주와 주인공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쯤에 데일은 책을 툭 덮었다.
여인들이 즐겨 읽는 그런 로맨스 소설이면서 남자들이 즐겨 읽는 기사도 문학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책이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낯이 익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주인공의 이름이 데일이다.
‘아니. 이거 내 얘기잖아.’
누가 보더라도 데일의 이야기를 가져다가 썼다. 허락도 없이 말이다.
심지어 책 뒤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이야기에는 조금의 허구가 섞여 있지만, 대부분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해둡니다.]데일이 보기에 이 소설의 9할은 거짓이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실화에 기반한 사건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이니, 그걸 노린 상업적 전략인 걸까?
덕분에 데일은 꽤나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두 여인은 눈을 초롱초롱 뜨며 말했다.
“간악하고 끔찍하며 여인을 희롱하기 좋아하고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 크리스틴 경과의 결투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으신가요?”
“음. 크리스틴이 여자를 희롱하는 건 모르겠지만 냄새는 안 났던 것 같소.”
“무고한 아녀자를 마법을 연구를 위한 실험체로 삼아버리는 마법사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세요!”
“으음.”
“아! 공주와는 지금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시고 계신가요?”
“엘레나는 키가 내 허리에밖에 안 오는 어린애요.”
데일은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허구임을 한참이나 설명해야 했다.
두 여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로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결국, 데일은 그들이 지닌 소설책의 앞장에 ‘카타리나와 마리카. 항상 행복하시오.’ 라고 적고 나서야 질문 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고로 카타리나와 마리카는 자매의 이름이었다.
간신히 벗어난 데일은 다시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매가 말했다.
“참 잘 깎은 조각상이죠? 저희도 영웅들을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이지. 외모가 이 조각상이랑 똑같았답니다.”
고민하던 데일이 물었다.
“영웅들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그러는데, 혹시 이들에 대한 얘기를 들을만한 곳이 있겠소?”
자매는 서로 속닥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는 저희도 해드릴 수 있답니다. 아! 그러면 저희 저택으로 오시겠어요? 차를 대접해드리면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데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되도록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 싶은 거라…….”
“으음. 객관적인 정보 말이죠.”
두 자매는 머리를 맞대고 고심에 빠졌다가, 이내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말했다.
“아. 그러면 도서관으로 가보시는 게 어떠세요?”
“도서관?”
“예! 도서관에는 중요한 일들을 기록해놓는 기록관님이 있다고 들었어요. 기록관님이라면 최대한 정확하게 기록해두지 않았을까요?”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인종은 역사에 주관을 섞을지언정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는다.
데일이 원하는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자매와의 진 빠지는 대화는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데일은 감사를 표한 뒤, 고개를 돌렸다.
데일의 등에 대고 자매가 말했다.
“또 봐요 데일 경!”
“다음에는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댔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일은 기억을 더듬어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3구역의 정경을 구경했다.
우선 가장 눈에 크게 들어오는 건 깔끔한 거리다. 잘 관리하는지, 도로에는 먼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옷도 비싸고, 삶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데일은 행인들의 수다를 엿들었다.
“연주회에서 들었던 새 음악 말이죠. 확실히 선율이 좋던 게 제 취향이었어요.”
“카리 남작가의 무도회에서 그 망나니가 또 소란을 일으켰다는군. 참 골치 아프겠어.”
“아가씨도 그 책 읽었나요? 흑기사가 공주를 위해 결투에 나서는 내용인데…….”
대화 역시 바깥에서는 쉬이 듣기 힘든 여유로운 주제들뿐이다.
평화롭다.
마치 바깥에 악마의 군세가 침공해 오는 상황이나, 각지의 국가와 도시가 무너져 피난민이 몰리는 상황은 자기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한 태도다.
빈민가와 외곽구역에서 늘 상 느껴지는 치열함도 없다.
마치 다른 국가. 다른 세상 같다.
성벽을 하나 넘는 것만으로도 펼쳐지는 별천지.
데일은 영 익숙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3 구역을 천천히 걸었다.
빈민가나 외곽구역처럼 골목이 우거지지 않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커다랗고 웅장하다.
황궁을 감싸는 마지막 성벽은 다른 그 어떤 성벽보다도 튼튼해보였고, 높이 솟은 회색 탑은 구름을 찌르는 듯했다.
저 회색 탑이 바로 마탑이었다.
기억대로 마탑을 지나쳐 더 걷다 보니, 널따란 광장의 끝자락에 위치한 5층 건물이 보였다.
‘저기가 도서관이군.’
다행히 기억 속 위치와 차이는 없었다. 데일은 도서관을 향해 다가갔다.
도서관에는 학자나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데일처럼 갑옷과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데일이 들어서자 젊은 사서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어, 저. 여기는 도서관인데요?”
“알고 있다.”
사서가 데일을 묘한 눈빛으로 보더니 다시 말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에요.”
“……왜 당연한 걸 설명하는 거지?”
하지만 사서는 여전히 데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기사가 도서관에 찾아오는 일은 적었다.
가끔 교단의 성기사들이 금지된 서적을 감시한다고 찾아오는 정도?
흑기사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사서에게 데일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기록관님을 찾아오셨다는 거네요.”
“내가 만날 수 있겠나?”
“되긴 됩니다. 되는데…….”
사서가 말을 흐리자 데일이 물었다.
“무슨 문제 있나?”
“문제라 해야 할까. 으음. 이건 제가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설명하는 게 낫겠네요. 따라오세요.”
사서는 데일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둘이 향한 곳은 먼지가 풀풀 나는 고서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산처럼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고서의 산 위에서 커다란 고깔 모자를 쓴 난쟁이가 지루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사서가 말했다.
“저분이 기록관님이에요. 성격이 괴팍하시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제가 괴팍했다는 말을 한 건 비밀이에요?”
데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서가 사라졌다.
데일은 고서의 산을 지나쳐 기록관에게 다가갔다.
기록관은 데일을 흘끔 보더니,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식의 보고에 검을 들고 오다니.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데일이 기록관에게 말했다.
“당신이 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모두 기록한다고 들었소. 묻고 싶은 게 있어 이렇게 찾아왔소.”
기록관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툭 내뱉었다.
“299명.”
“?”
“그런 식으로 나를 찾아온 얼간이가 299명이다. 하지만 그거 알아? 나는 멍청이들한테 내 귀한 지식을 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기록관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눈에서는 광기 비스무리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데일은 생각했다.
‘괴팍하긴하군.’
척 봐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노인네였다.
기록관이 외쳤다.
“감히 나에게서 감히 정보를 빼내가려면 나를 싸워서 이겨야 할 거다! 하지만 앞서 왔던 299명의 머저리는 실패했지. 자! 네가 300명째가 될 테냐?”
“알겠소.”
“음?”
“싸워서 이기면 된다는 것 아니오.”
“그래. 나랑 지혜로 승부를 겨뤄…….”
스릉.
데일이 마검을 뽑았다. 기록관은 마검이 풍기는 흉흉한 분위기에 굳어버렸다.
그런 기록관에게 데일이 말했다.
“싸움은 내 전문이오. 바로 끝내겠소.”
“자, 자, 자, 잠깐! 싸우자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데일은 기록관의 말을 끊어내듯. 바닥을 박차며 검을 들어올렸다.
기록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무패 신화가 깨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