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83)
영웅들
* * *
데일이 살벌하게 달려들자 기록관이 서둘러 양손을 쫙 펼쳤다. 입안으로는 주문 구결을 외웠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고서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마법사?’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였다.
데일은 팔을 휘둘러 고서를 쳐냈다.
그와 동시에 벽장에 걸려 있던 책들이 와르르 튀어나오더니, 데일의 머리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퉁! 투퉁!
무거운 책이 데일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데일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마치 책 자체에 의지가 있는 것 같이 행동했다.
하지만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데일에게 타격을 줄 수 없다.
데일은 고개를 돌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양탄자가 뱀처럼 기어오더니 데일을 휘감으려 했다.
데일은 마검을 내질러 양탄자를 꿰뚫은 뒤, 양탄자의 한자락을 밟아 그대로 반으로 찢어버렸다.
양탄자는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부림치다,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기록관이 외쳤다.
“안 돼! 내 양탄자”
한데. 왜인지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데일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저 위쪽 벽장 꼭대기에 기록관이 서 있었다.
“야 이 무식한 것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기록관이 팔을 붕붕 휘두르며 역정을 냈다.
데일이 그런 기록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쪽이 싸우자 했지 않소.”
“누가 무기 휘두르면서 싸우재? 어? 사람이 어, 머리도 좀 쓰고, 지혜도 좀 겨루고 그래야지!”
“…….”
데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무기로 싸우면 안 되오? 그 편이 더 속 편한데.”
“시끄러! 내 말대로 안 할 거면 썩 꺼져!”
한숨을 속으로 삼킨 데일이 말했다.
“일단 알았으니까 거기서 내려오시오.”
기록관을 아래를 슬쩍 본 뒤,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못 내려가.”
“또 왜 그러시오.”
“방금 마력을 다 써버렸어.”
“겨우 그거로?”
“겨우라니!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그리고 실전 마법은 내 전공이 아니야!”
데일은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뛰어내리시오. 받아주겠소.”
“정말 받아주려는 거 맞아? 일부러 나를 떨어트려서 죽일 속셈 아니야?”
“싫으면 계속 그렇게 있으시던가.”
그건 달갑지 않은지 기록관은 헛기침을 한차례 한 뒤, 침을 꿀꺽 삼키고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풀썩.
데일은 요령 좋게 기록관의 겨드랑이를 붙잡아주었다.
삐쩍 마른 기록관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내려줘.”
기록관이 머쓱하게 말하자, 데일은 기록관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새삼 기록관을 보니 그 키가 매우 작았다. 드워프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시선을 눈치챘는지 기록관이 말했다.
“혹시라도 오해 할까봐 말하는 거지만 나는 노움과 인간의 혼혈이다. 나 정도면 꽤 큰 편이라고.”
데일은 일전에 만났던 노움인 레온의 키를 생각했다. 딱히 기록관이 레온보다 큰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마법사였소?”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면 이런 병신 같은 모자를 쓰겠어?”
기록관은 자기가 뒤집어쓴 큼지막한 고깔모자를 가리켰다.
데일도 수긍했다.
“확실히 그렇군.”
“거기서는 빈말로라도 모자가 멋있다고 했어야지!”
뭐 어쩌라는 것일까.
“하여간. 이래서 요즘 것들은 말이야.”
데일은 이 나이 많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게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새기 전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뭘 어떻게 겨루자는 거요.”
“아. 그래.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지.”
기록관은 흰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기록이란 건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 다들 간과하고 있지만 종이와 글자야말로 우리 사회를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그런 귀한 걸 아무에게나 넘겨줄 수 없지.”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혀가 길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면 안 되겠소?”
“쯧. 인내심도 없어가지고는. 요는 이거다. 나는 나보다 멍청한 놈들에게 내 소중한 지식들을 넘겨줄 생각이 없어. 특히 허리에 칼 찬 놈들에게는 더더욱!”
기록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데일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요.”
“나는 널 농락한 수백 가지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재미도 없고, 정당한 승부가 되지 않겠지. 너와 겨룰 건 이거다!”
기록관이 손가락을 튕기자, 고서더미 한편이 스르륵 밀려나며, 그 아래 잠들어 있던 나무판이 저절로 굴러왔다.
나무판 위에는 흰색과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말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데일에게도 익숙한 게임.
체스다.
기록관이 으스대며 말했다.
“이건 전쟁을 본떠 만든 놀이다. 너희 칼 찬 놈들이 좋아하는 전략과 전술 역시 들어가 있지. 어때. 이 정도면 공평하지 않겠어?”
기록관은 규칙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데일이 알고 있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데일이 물었다.
“이걸로 이기면 되는 것이오?”
“그래. 이기기만 한다면, 뭐든 해주마.”
기록관은 장난에 성공한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물론 네가 이길리는 없겠지만!’
기록관은 그간 자신을 찾아온 299명을 체스로 꺾어낸 무패의 승부사다.
심지어 불리했던 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건 상대의 수와 심리를 읽어내면 이기는 싸움이다.’
수에서는 생각이 드러난다.
그리고 적의 생각과 심리를 읽기만 하면 승리는 놀랍도록 쉽게 거머쥘 수 있는 법이다.
‘내가 읽어내지 못하는 수 따위는 없다. 날고 기는 마법사들도 나를 이기지는 못했어. 적어도 인간은 나를 이길 수 없어!’
기록관은 나이 많은 마법사들 특유의 끝 모를 자신감을 내비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자! 어디 한번 덤벼봐라!”
* * *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서관 사서는 책을 분류하던 중,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웬 흑기사가 왔었지.’
사서는 고개를 옆으로 들었다.
저 책상 앞에 여인들이 모여 두꺼운 책을 읽으며 꺄르륵 대고 있었다.
최근 상위구역의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설이었다.
‘저 소설의 주인공도 흑기사였던가.’
아쉽지만 사서는 소설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보다는 자신의 상관인 기록관에 대해 생각했다.
‘괜찮으려나. 무기도 찼던데.’
그 괴팍한 노인네를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도 열 받았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덜컥 무기를 뽑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별일은 없겠지만.’
기록관이 뛰어난 마법사라는 걸 아는 사서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지금쯤 기록관은 갖은 구실로 체스로 승부를 걸어, 흑기사를 박살내고 있을 것이다.
체스로 상대를 꺾어 상대를 멍청하다고 비웃는 건 기록관의 고약한 취미 중 하나다.
기록의 중요성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구실에 불과하다.
사서도 처음 이곳에 취직했을 때 원치 않는 체스를 두느라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한번 가서 볼까.’
그 큰 덩치의 흑기사가 얌전히 체스를 두는 건 잘 연상이 가지 않았다.
사서는 쟁반에 차와 과자를 담아 계단을 올랐다.
‘조용하네?’
사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지금쯤이면 체스로 상대를 박살내고 비웃음을 흘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서는 빼꼼 고개를 내밀며 안을 살폈다.
둘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데일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반명, 기록관의 이마에는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사선은 체스판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떴다.
“!”
박살이 나고 있는 건 데일이 아닌 기록관이었다.
체스판에는 데일의 하얀색 말이 지배하고 있었고, 검은 말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상 승부가 난 상황.
그 사실을 기록관도 알지만 차마 인정하지 못하고 애꿎은 말만 만지작거렸다.
사서는 감탄하며 데일을 쳐다보았다.
‘기록관님을 이기시다니. 똑똑하기로는 도시에 적수가 없으신 분인데…….’
기사들은 무식하고 우악스럽다는 편견이 지금 산산이 깨져나갔다.
사서는 체스판의 상황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번의 수가 오고 간 뒤. 승부가 났다. 데일이 말했다.
“승부가 난 것 같소만.”
기록관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삼세판.”
“?”
“그래! 애초에 두 번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거였다!”
“…….”
데일과 사서가 둘 다 한심한 시선으로 기록관을 바라보았다.
기록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뜻을 굽히지는 않았다.
고집스럽게 판 위의 말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하는 짓이 어째 마법사나 거인이나 똑같구나.’
데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백색 말을 가지런히 배열했다.
기록관은 데일을 우습게 봤지만 사실 데일은 꽤나 수준급의 체스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 게 그것밖에 없었지.’
데일은 조부와 함께 보육원의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곤 했다.
하지만 보육원의 아이들이 즐길만한 놀이는 많지 않았다.
낮에는 축구를 하고, 해가 지면 체스나 오목을 두었다.
매일 하다 보면 당연히 잘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날이 갈수록 아이들의 수준은 훌쩍 올랐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느 똘똘한 아이가 컴퓨터의 체스 기보를 외워왔다.
당시 체스는 이미 컴퓨터에 정복당한 상태였다.
그런 컴퓨터의 기보를 외운다는 건 곧 보육원에서 적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날부로 아이들은 너도나도 기보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기기 위해. 데일 역시 마찬가지다.
재미를 느끼고 우호를 다지는 체스가 아닌, 오로지 이기기 위한 냉철하고 기계적인 체스를 두어야 했다.
보육원에 체스 열풍이 끝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때 고생깨나 했지.’
당시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새로운 문물에 익숙지 않은 조부는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도 다 아련한 추억이었다.
‘애들은 잘 지내려나.’
그리고 그때 했던 노력이 시간을 지나 이런 곳에서 빛을 발했다.
데일은 큰 고민 없이 말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기록관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기록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도대체 이 수에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태 만나온 어떤 상대도 이런 수를 둔 적은 없었다. 기록관은 도저히 데일의 의중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얼굴을 통해 심리를 읽어내려 했지만 그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데일의 무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다.
인간을 상대로는 절대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기록관이다.
솔직히, 방금 전판은 방심해서 실수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록관은 느꼈다.
‘수에서 아무런 생각도 읽어낼 수 없어. 마치 바위랑 두는 기분이다.’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
수를 거듭할수록 기록관의 손은 느려졌고, 판 위의 상황은 시시각각 안 좋아졌다.
그리고 결과는 어김없이 참패.
기록관은 멍하니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데일이 말했다.
“내가 이긴 것 같소.”
“…….”
“이제 약속을 지킬 때요. 설마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생각은 아니리라 믿소.”
“크으으윽.”
분한 듯. 이를 악문 기록관이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책 중 몇 권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기록관은 그 책을 내밀었다.
“영웅들에 대한 일 중, 사실이 확인된 사건만을 기록해둔 책이다. 내가 직접 기록한 것이니, 거짓은 없을 거다.”
데일은 책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분량이 컸다. 정말로 상세하게 기록해둔 모양이다.
목적을 달성한 데일이 곧장 떠나려 했다. 그런 데일의 망토 끝자락을 노인이 붙잡았다.
“왜 그러시오.”
기록관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한 판 더 둬. 네놈의 수를 이제 이해할 것 같다. 더 두면 내가 이길 것 같단 말이다!”
그런 기록관을 물끄러미 쳐다본 데일이 물었다.
“맨입으로?”
기록관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