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121
◈ 121. [자유탐사] 조우 (2)
패자의 길은 처음 진입할 때에는 모든 스킬이 봉인된다.
그 말인즉슨 처음의 저주 존을 제외하면 별다른 위협이 없다는 뜻.
하지만 콜로세움을 제패하고 돌아올 때에는 통로의 일방통행 제약이 없어지며, 스킬 봉인 등의 제약도 해지된다.
다시 말해서…… 통로 내부에서 전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 발생이야 할 수 있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파티원들을 둘러보며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다고 대뜸 군주급 괴물이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건 좀 너무하잖아, 젠장!’
내 앞에는 이 사태의 범인이 가만히 서 있다.
흡혈귀 군주이자 다음 스테이지의 보스 몬스터인 노 라이프 킹, 셀렌디온.
생김새로만 봐서는 10대 초중반의 어린아이 같지만, 외면에 속아선 안 된다. 사실 수백 년은 묵은 괴물 영감탱이니까.
《…….》
셀렌디온은 빤한,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관찰하는 중이다.
그 시선이 마치 채집한 곤충을 관찰하는 어린아이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나와 이야기 할 마음은 좀 들었나, 플레이어?》
소년의 목소리에 나는 가시 돋친 대답을 내뱉었다.
“애쉬다.”
《음?》
“애쉬라고, 내 이름. 애쉬. 애쉬 ‘본헤이터’ 에버블랙.”
이 잡것들은 자꾸 사람 이름을 안 부르고 플레이어라고 퉁치네.
이름 물어보면 내가 안 가르쳐 줄 것 같나? 김애쉬 이 녀석 이름 아주 싸다고. 막 뿌린다니까?
내 이름을 듣고 잠시 눈을 깜빡이던 셀렌디온이 이윽고 손뼉을 짝 쳤다.
《아하, 참. 그렇지. 너희에게도 이름이 있지.》
“뭐라고?”
《너도 개미를 볼 때 개미라고 부르지, 개미들의 이름을 물어보진 않잖나?》
셀렌디온은 아주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사과한다. 내가 사려 깊지 못했군.》
“…….”
《거듭 말하지만, 네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너희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의도도 없었고.》
“없으셨어요? 그럼 이건 뭔데?”
주변에 쓰러진 파티원들을 가리키자, 셀렌디온은 파티원들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이해해라, 인간. 내게 있어서 너희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다.》
“…….”
《나는 그저 대화가 하고 싶을 뿐이다.》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는 놈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 새끼, 우리를 죽이러 온 건 아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제압만 한 것도 그렇도, 대화부터 하려는 것도 그렇고.
셀렌디온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왜?’
손가락만 까딱하면 짓이길 수 있는, 놈의 말마따나 개미 같은 목숨인 우리를…… 왜 굳이 살려 두려는 것인가.
“…….”
하지만, 뭐 좋다.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와 준다면, 까짓 대화 못 해 줄 이유도 없지.
털썩!
나는 그대로 복도의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런 나를 보는 셀렌디온의 시선이 의아해졌다.
《뭘 하는 건가?》
“앉은 거지. 너도 앉아.”
《음?》
“요기 앉으라고. 뭔 이야기를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뻘쭘하게 서서 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
《…….》
셀렌디온은 혼란스러워하는 듯했지만(좌식 문화는 겪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 잠자코 내 앞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마주 앉은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놓고 째려보는데, 셀렌디온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으로 면상 한 대 콱 후려치고 싶지만, 그랬다간 내 목숨도 거기까지겠지…….
아무튼, 숨을 가다듬고 물었다.
“그래서, 대체 나랑 무슨 대화를 그리 하고 싶으신지? 뭐가 고민인데? 학업? 진로? 사춘기? 어느 쪽?”
《……?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셀렌디온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궁금한 것은 한 가지다.》
“편하게 말씀해 보셔.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줄 테니.”
대답 안 했다간 목이 날아갈 판이긴 해.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직접 왕림하셨나 했는데, 다음에 날아든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올롭을 죽였지?》
“……뭐?”
미간을 찌푸린 내가 되물었다.
“올롭?”
《검은 거미 군단의 군단장. 모든 거미들의 어미. 퀸 오브 타란튤라- 올롭 말이다.》
“그게 뭔데 이 씹덕…… 아니 잠깐.”
검은 거미 군단장이라면…….
‘전진기지 전투에서 죽인 검은 거미 여왕 말인가?’
스테이지0, 튜토리얼에서 해치운 그 검은 거미 여왕.
그 개체의 이름이 올롭이었나 보다.
‘그때는 네임드 개체로 표시가 안 됐었는데…… 그 녀석이 퀸 오브 타란튤라라고?’
퀸 오브 타란튤라.
설정집에 나와 있는, 모든 거미 괴물들의 친모(親母)를 뜻하는 호칭이다.
설정집에만 있고 인게임에는 등장하질 않아서,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 개체인 줄 알았는데.
튜토리얼의 그 새끼가 그런 거물이었단 말인가?
‘어째 더럽게 안 뒤지더라니. 군단장급이었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내게 셀렌디온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난 모양이군.》
“뭐, 당연히 기억하지. 그 새끼 때문에 죽을 고생 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죽을 뻔했다고. 거기서 게임 오버 날 뻔했다.
《올롭은 본래 직접 전선에 나서질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산란기였고, 인간의 육신과 절망을 섭취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웩.”
나는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끔찍한 이야기까지 줄줄 읊어 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죽었다.》
셀렌디온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바로 네가. 대포로 쏴 죽였다더군.》
“뭐, 그렇지.”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데미안이다만. 아무튼 간에.
“그래서, 뭐? 내가 그 거미를 죽인 게 맞다만. 이제 와서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복수?》
피식.
셀렌디온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그것은 이 흡혈귀가 자신의 얼굴에 처음으로 지어 보인 표정이었다.
《그깟 거미년을 위해서? 그럴 리가 없지 않나.》
“…….”
《왕께는 복수를 위해서라고 내가 출진하겠다고 말씀드리긴 했지. 하지만 그건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고…… 나는 그런 너저분한 거미년에게 측은지심 따위 가져 본 적조차 없다.》
“그럼 왜?”
내가 그 검은 거미 여왕을 죽인 것과, 이 자식이 나를 찾아온 것 사이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정답은 곧 밝혀졌다.
《나는.》
셀렌디온이 자신의 입으로, 또렷하게 내뱉었으니까.
《죽고 싶다.》
“……?”
잠깐, 이해가 안 가서 사고가 굳었다.
“뭐?”
《죽고 싶다고 했다, 인간. 나는…… 죽음을 맞고 싶다.》
셀렌디온은 천천히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에서 되살아난 지도 어언 오백년…… 나는 나를 다시 죽여 줄 수 있는 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
되살아났다고?
다시 죽기를 바란다?
대체 뭔 헛소리야. 이해를 못 해서 눈만 끔뻑이는 내게 셀렌디온은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죽이기는커녕, 변변한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
《그런데, 올롭이.》
셀렌디온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내 외면이 아닌, 내 속의 무언가를 훑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와 같은 군단장인 올롭이, 돌발적인 사태에 휩쓸려 죽었다더군. 고작 인간의 대포 따위에 맞아서 말이다.》
“…….”
《그때 직감했다. 올롭을 죽인 자라면, 나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셀렌디온의 붉은 두 눈에 간절함이 서렸다.
《너는…… 나를 죽여 줄 수 있나?》
“…….”
《이 끝나지 않는 꿈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줄 수 있나? 다시 나를 영면의 어둠 속으로 되돌려 줄 수 있나?》
한참 멍하니 듣고 있다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는 입을 열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너를 죽여 줄 수 있냐고?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괴물?”
《뭐?》
“처음부터 나는 네놈들을 죽이기 위해 여기에 왔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희 괴물 새끼들의 목을 뽑고, 육신을 조각내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고.”
나는 기억한다.
괴물들의 손톱과 이빨에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가던 사람들을.
“당연히 네놈을 죽인다! 그리고 네놈뿐만 아니라, 네놈의 부하들! 네놈의 가족들! 그리고 네놈의 왕인지 어쩌고인지 하는 새끼까지!”
나는 기억한다.
일평생 괴물을 막다 결국 망가져 버린 채, 내 품에서 죽어 가던 변경백을.
“전부! 죄다! 쳐죽인다! 모조리! 싸그리!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절멸시킬 테다!”
나는 기억한다.
벌판에 놓여 있던 삼천 구가 넘는 시신을.
그 사이에서 불타오르던 새파란 성화를.
“그게 내가 이곳 전선에서 하는 일이고, 내가 이 생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해내야 하는 단 하나의 목표다!”
장례식의 포성을. 성가대의 곡소리를. 묵념에 뒤따르던 고요를.
켄을, 테인을, 론을, 지야를, 페케를…… 그리고 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무수한 전사자들을.
기억한다.
기억하고말고.
그렇기 때문에 네놈들을 사무치게 증오하는 것이, 이곳 전선의 사령관인 나의 의무인 것이다.
“네놈의 부탁이 아니어도 당연히 쳐죽여 줄 테니까 걱정 마시지, 흡혈왕! 조만간 내 검에 뒈질 때 낼 비명소리나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내 쩌렁쩌렁한 고함을 가만히 듣고 있던 셀렌디온은,
《……과연, 그런가.》
흐릿하게 미소했다.
조금 전의 조소와는 달랐다. 조용하고, 수줍기까지 한, 작은 미소였다.
《너의 그 태도가 허장성세라 할지라도, 나는 기쁘구나. 너의 그 적의(敵意)만은 진짜인 것 같으니.》
셀렌디온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도저히 모르겠군. 한낱 미물인 너희가 어떤 수를 써서 나를 죽이겠다는 것인지. 방법이 존재키는 하는 것이냐?》
“당연히 존재하지.”
게임에서 내가 네 모가지를 몇 번 떨궜다고 생각하는 거냐, 흡혈귀 자식아.
나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목 깨끗하게 닦고 내 성벽으로 기어오기나 해. 그럼 내가 책임지고 네놈의 구차한 일생을 끝내 줄 테니까!”
《…….》
싱긋.
셀렌디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일순 놈은 십대 소년이 아니라 여든 아흔 정도 먹은 노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놈은 다시 무표정해졌고, 십대 소년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조만간 만나러 가마. 부디 방금 네 말이 허언이 아니기를 빈다.》
저벅. 저벅.
나를 지나친 셀렌디온의 몸 끝이 안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부하들, 조금 전부터 정신을 차리고 나를 기습하려는 듯한데.》
“엥?”
《그만두게 하는 게 좋을 거다. 결전의 날에 너희가 만전의 상태이길 바라니까.》
나는 놀라서 바닥에 쓰러져 있던 파티원들을 보았다.
언제 깬 건지, 다들 보조 무기를 꺼내든 채 숨을 죽이고 셀렌디온을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급히 손사래 쳤다. 아서라, 아서! 어차피 지금은 대미지 제대로 못 줘!
《그럼, 플레이어…… 아니, 애쉬.》
완전히 검은 안개로 변해 사라지며, 셀렌디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대하고 있으마. 그날, 네가 정말로 나를 죽일 수 있기를.》
촤르르륵.
박쥐떼 같은 안개가 몰아치고, 놈은 완전히 사라졌다.
흡혈왕이 떠난 자리를 노려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그냥 곱게 자살하지, 뭔…….”
뭘 오고가고 번거롭게 죽여 달래.
그냥 자살해! 유서에 내 이름 쓰고! 그럼 서로 행복하잖아!
‘그게 안 되니까 남한테 죽여 달라고 하는 거겠지만.’
괴물의 사정 따위 이해해 줄 필요가 없지.
투덜거리던 나는 파티원들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고통스러운 얼굴로 하나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힘의 차이에 좌절할 필요 없다. 우리의 송곳니는, 반드시 저놈의 목에 닿는다.”
나는 신음하는 파티원들을 하나씩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여러분이 그렇게 해낼 거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보는 파티원들에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돌아가자.”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