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449
◈ 449. [Side Story] 상징 (2)
하나도 못 건졌다.
다른 동료들도 하나같이 맛이 간 디자인만 제출했다. 그러면서 다들 의기양양한 게 어처구니없는 포인트였다.
결국 이날 저녁.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발표했다.
“수상자는…… 없다.”
우우우우!
즉각 야유가 쏟아졌다.
“폭거다!”
“영주 권한 남용이다!”
“사실 보너스 주기 싫어서 그런 거죠?!”
“아니, 너희가 좀 괜찮은 걸 냈어야지! 이 자식들아!”
내가 바락 소리치자 영웅들이 자기의 도화지를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애쉬님! 저희 엘프들의 이 풍성한 나뭇가지 디자인이 뭐가 어때서요!”
“너희 엘프 국기가 이미 풀덩어리잖아! 이 식물성애자들아! 겹친다고!”
“대장, 내가 혼신을 다해 그린 이 그림은 뭐가 부족한 거요?”
“주먹만 그렇게 큼직하게 박혀 있으니까 무슨 폭련단 같잖아, 이 격투가 자식아!”
“과인이 그린 이 아름다운 유화는 왜 거절당한 게냐?”
“용이 불 뿜는 건 브링어 공국 상징이잖아요! 색깔만 다르게 한다고 뭐가 바뀌어?!”
아우성을 쳐대는 영웅들을 뒤로 물리고 나는 재차 한숨을 폭 뱉었다.
“알았다, 알았어. 여러분의 정성을 참작해서, 인기상 정도는 뽑도록 하겠다. 우승 상품도 인기상 수상자에게 주도록 하지. 자, 각자 보기에 가장 우리 전선에 맞아 보이는 그림에 한 표씩 행사하도록.”
“역시 영주님이 뭘 아신다니까?”
“다수결로 하면 당연히 내 작품이 1등이지!”
“다들 보는 눈이 있다면 내 걸 뽑겠죠?!”
그리하여 영웅들이 각자의 깃발 디자인에 투표한 결과.
우승자는…….
“……데미안의 작품 ‘햄스터 포동이’가 우승이다.”
득표율 50퍼센트를 넘는 압도적 지지로, 데미안의 그림이 우승했다.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햄스터 그림을 들고 앞으로 나온 데미안이 살짝 울먹이며 감회를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포동이에게 돌릴게요!”
“축하드려요! 포동이 보러 놀러가도 되나요?”
“그럼요! 신전에 오시면 볼 수 있어요.”
“이거 끝나면 다 같이 보러 가자!”
특히 엘프들이 꺄꺄거리며 난리였다. 똑같이 견과류에 환장하는 설치류 생물끼리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귀엽네.”
“귀엽긴 하네요.”
“내 깃발의 웅장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뭐…… 저 정도면 인정이지.”
다들 데미안의 깃발 디자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너네는 진심으로 이게 좋은 거냐?”
나는 골치가 아파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들 진심인가? 햄스터가 우리 괴수전선의 상징이 되어도 좋다고……?!
“주군! 저는 우리 전선의 상징은 주군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요! 그러니까 이거 벽화로라도 써 주면 안 돼요?!”
“고맙다…… 도움은 전혀 안 되지만…….”
끝까지 자신의 그림(내 얼굴)을 들고 어필하는 기사 듀오도 밀어내고.
“다 꺼져! 신전 가서 포동이랑 놀아, 이 자식들아!”
“아니 저녁때인데 밥은 주고 쫓아내쇼, 대장!”
“그래! 그럼 밥만 먹고 다 나가!”
데미안에게 상금 지급하고, 전부 저녁까지 알차게 먹인 뒤 내 저택에서 쫓아냈다.
***
“에구구, 힘들어…….”
구시렁대며 나는 내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뭐, 반쯤은 디자인 공모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큰 전투 앞두고 다들 긴장 풀어 주려고 모았던 게 더 크다.
앞으로는 혹독한 연전의 나날일 테니까. 기회가 있을 때 다 같이 웃으며 쉬게 해 주는 게 낫지.
‘그렇다고는 해도…… 쓸 만한 디자인 힌트라도 얻으려고 했는데…….’
브레인스토밍 한답시고 다 모았는데 어떻게 쓸 만한 아이디어가 하나도 안 나오냐.
‘깃발은 일단 됐고, 상자깡이나 할까.’
큰 전투 앞두고, 그동안 모은 상자들이나 다 깔 셈이었다.
– 해적의 랜덤 보상 상자 : 10개
– SR등급 보상 상자 : 3개
스테이지20 때 얻은 해적의 보상 상자 10개. 그리고 스테이지21 보상으로 나온 SR등급 상자 세 개.
‘해적새끼들 아니랄까 봐 보상 상자까지 장난질이야.’
해적의 랜덤 보상 상자는 이름 그대로, 보상이 랜덤으로 나온다.
N등급부터 SSR등급까지 랜덤하게 정해지고, 보상도 기존 상자와는 아이템 테이블이 조금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운이 좋다면 기존 보상 상자에서는 얻을 수 있는 희귀한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
……물론 말이 이럴 뿐이고, 보통은 N등급 폭사 엔딩이다.
그래서 싫어하기는 하는데, 뭐 어쩌겠어. 일말의 가능성에 빌면서 열어보는 수밖에.
‘일단 그냥 SR등급 상자 세 개.’
붉은 거미 군단을 해치우고 받은 보상 상자.
번쩍!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좋은 거 좀 있냐?!
[Rewards]– 표준형 최고급 마력핵(SR) : 3개
“……평타는 쳤고.”
SR등급 마력핵이면 뭐 손해는 아니다. 완제보다야 못하지만.
대충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본게임인 해적 상자 10개를 앞에 늘어놓았다.
“그래도 양심이 있으면 이중에 하나는 대박이 뜨겠지?!”
외치면서 10개를 동시에 열었다.
“쓰알 떴냐?!”
번쩍!
빛이 터져 나오고, 이윽고 내 앞에 놓인 것은…….
“…….”
잡동사니의 산이었다.
개잡템…… 쓰레기들만 그득하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템들을 손끝으로 집어 올렸다.
싸구려 럼주에, 구멍난 신발에, 부러진 키…… 맙소사.
“에휴, 됐다. 해적놈들한테 뭘 바라겠어…….”
구시렁대면서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심정으로 하나 둘 인벤토리에 던져넣는데, 이상한 게 하나 보였다.
반짝.
“응?”
잡동사니들 사이에 놓인 꾀죄죄한 반지가 하나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그것을 집어들었다. 설마!
“위대한 문어신 만세-!”
나도 모르게 이교도적인 외침을 뱉으며 두 팔을 위로 홱 치켜들었다.
아니, 크라켄이 문어인지 오징어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유령해적 군단장 베르나르트 포커의 아이템 드랍 테이블에서도 안 나오기로 악명 높은 그 쓰알템, 크라켄의 반지가 떴다!
효과는 매우 간단하다. 크라켄을 소환해서 부리게 해 준다.
비록 쿨타임이 자그마치 3스테이지로, 끔찍하게 길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게 어디냐! 스테이지 세 번당 한 번은 공짜로 보스급 소환수 쓰게 해 주는 건데!
[Rewards]– 크라켄의 반지(SSR)
– 그 외 9종
이렇게 그간 쌓인 상자들 다 처리하고.
상자깡 직후에 찾아오는 특유의 나른한 허탈감에 젖어서 잠시 멍하니 있는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다른 상자도 하나 남아 있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쭉 빼들고 주위를 휘휘 살폈다.
그러자, 집무실 책상 한켠에 얌전히 놓인 작은 상자가 하나 보였다.
이번에 알베르토가 황도에서 탈출해서 오면서 가져온 상자였다.
뭐라더라, 과거의 애쉬가 구축한 사조직 ‘바람맞은 여인들’이 건네준 물건이라고 하던가.
– 저도 모릅니다. ‘과거가 보낸 선물’이라는 것밖에는…….
“…….”
알베르토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가 보낸 선물.
즉…… 과거의 내가, 자신의 사조직에 남겨서, 현재의 나에게 보낸 무언가.
어쩐지 조금 무서웠다. 과거의 애쉬라는, 내가 아닌 나와 마주하는 것이. 그래서 여는 것을 미루고 있었지만.
더 이상 피할 수는 없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잡아들었다.
“후.”
숨을 들이쉰 뒤, 열었다.
달칵.
그렇게 열린 상자 안에는…… 짤막한 손편지 한 장과, 낡은 천조각이 하나 있었다.
나는 먼저 손편지를 들어올렸다. 편지는 몇 줄 되지 않는 간단한 내용이었는데, 휘갈겨 쓴 첫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 세계를 위해 싸우는 거, X같지?
“…….”
문장을 읽자마자 확신했다.
이걸 쓴 새끼는, 틀림없이 과거의 애쉬다.
– 처음부터 X됨의 연속이었지? 계속, 끝없이, X같이 힘들었지?
“놀리냐, 이 새끼가…….”
짜증에 이를 갈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
– 어쩌겠냐.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고생해라.
조소와, 연민과, 그리고…… 일말의 애정이 담긴 글씨로.
– 힘내라, 나.
그렇게 말하고는, 편지는 끝났다.
“……실없는 새끼.”
어처구니없어하며 그 편지를 보다가, 다시 접어서 상자 안에 던져 놓고.
나는 상자 안에 있던 다른 물건…… 낡은 천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사령관의 깃발 조각] (5/5)– 캐릭터 ‘애쉬’의 전용장비 [위대한 사령관의 깃발(EX)]의 다섯 조각 중 하나.
– 다섯 조각을 모두 모으면 하나의 깃발로 완성됩니다.
과거의 내가 안배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
다섯 번째.
최후의 깃발 조각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그동안 모은 깃발 조각들을 하나씩 인벤토리에서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다섯 조각을 하나로 맞추었다.
번쩍-!
새하얀 빛이 번뜩이더니, 다섯 조각의 깃발이 하나로 합쳐졌다.
[위대한 사령관의 깃발(EX)]–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시간 동안, 세계 최후의 플레이어로서 싸워 온 어느 남자의 깃발.
– 이 깃발을 모으는 여정 동안 당신이 이룩한 업적에 맞추어, 깃발의 성능이 결정됩니다.
–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영광과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 Welcome Back, Commander.
펄럭…….
완성된 깃발은 아무런 문양도 없는 흑기(黑旗)였다.
다섯 조각이 하나로 기워진 자국이 그대로 남은, 볼품없는 낡은 깃발.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깃발의 능력치 설명을 읽는 것은 조금 미뤄두었다. 대신, 나는 그 낡은 깃발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어떤 무늬도 상징도 없는, 그저 빈 깃발일 뿐인 그것을.
***
다음날.
영웅들을 불러모아두고, 나의 새 깃발을- 텅 빈 흑기를 옆에 세워 두고서.
나는 선언했다.
“상징은 사용하지 않는다.”
“네?”
다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를 물리치고 세계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내고 나면, 세계수호전선은 해산한다.”
“…….”
“우리의 목적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것도, 권력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다.”
순수하게. 단순하게.
세계를 구하기 위해 뭉쳤다.
“다른 전선 구성원들의 속내가 어떠하든, 전선의 리더로서 나는 세계를 구한다는 가치를 가장 앞세워야 한다.”
나는 진지한 말투로 계속했다.
“세계를 지키고자 한다면, 누구든 우리의 동료다. 상징이나 깃발로 서로의 소속을 가르거나 편을 나눌 필요가 없다.”
“…….”
“그러니까, 상징은 필요 없다. 나는 이 무상징(無象徵)을 우리 전선의 깃발로 삼겠다.”
모두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다들 왜 그렇게 실실 웃어. 이쪽은 진지하다고.”
“아니요, 뭐랄까.”
맨 앞에 선 에반젤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정의의 용사님이나 할 법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하셔서.”
어째 부끄러워졌지만 괜히 나는 거칠게 말했다.
“불만 있냐?”
“그럴 리가요. 그래서 선배님 휘하에 있는 게 좋은 건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옆의 내 깃발을 집어들었다.
“출정을 준비하라!”
상징 없이 텅 빈 깃발을 위로 치켜들고, 나는 외쳤다.
“황도로…… 뉴 테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