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708
◈ 708. [Side Story] 상태 점검
그날 저녁. 영주 집무실.
나는 손에 들린 만년필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전사자 시체 수습도, 도시 재건도……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이뤄지는 중이다.’
진짜 멸망이 코앞까지 왔다가 사라지자, 이곳 전선이 하는 일의 위중함을 제대로 실감한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자원해서 몰려들었다.
덕분에 인력은 넘쳐나고 있고, 앞으로 더 넘쳐날 예정이다. 의용군 규모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하지만 각국에서 모은 정예 병력은 사실상 전멸했다고 봐야 한다.’
바로 그 정예 병력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내일 아침에도 자원자와 인부들이 떠날 것이고…….
나는 쓰린 마음을 다잡으며 현재 전선의 상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병력.’
세계수호전선에서 모은 세계 각국 엘리트들만 모인 3만 부대는 전멸. 비공함대 역시 마찬가지로 깨끗하게 궤멸했다.
현재 운용할 수 있는 비공함은 ‘라 만차’ 단 한 척. 그마저도 ‘나이트 클로징’ 작전 때 너무 무리한 바람에 한동안 보수에 들어가야 하고.
‘불행 중 다행이라면, 처음부터 크로스로드 소속이었던 병사들은 아직 남아 있다.’
1년 차부터 나와 함께 이곳 지옥을 굴러온 대 괴수전 스페셜리스트. 오합지졸 애송이에서 괴물 잡는 달인으로 성장한 괴수전선 본대(本隊).
여기에 에버블랙 제국군 보병대 또한 병력을 온존했다.
이종족 부대 역시 병력을 온존했으나, 애초에 이들은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각자 자치구에서 억압받으며 살아오던 상황이라 많은 병력을 갖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대신 병력의 질은 높은 편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잔존부대가 남았고, 여기에 마지막으로.
‘의용군…….’
가을 축제 때부터 크로스로드에 편입되기 시작한 의용군.
규모도 꽤 크고, 그때부터 착실하게 훈련 또한 진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설프다. 특히나 이번 상대는 그 흑룡이었기에 아예 전장에 투입하지 못했다.
‘의기(義氣)는 드높은데…….’
이들이 과연 괴수와의 전투에 나설 수 있을까. 나선다 해도, 3년 차 후반부의 끔찍한 괴수들과 맞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
이외에도 잔존 부대와 각지에서 온 소규모 부대를 재편하는 방안을 서류로 정리한 뒤.
나는 다음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새 서류에 펜을 올렸다.
‘다음은, 방어 설비.’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크로스로드는 이제 무너지고 다시 짓는 일에 아주 능숙해졌다.
도시 내부의 각종 설비와 무너진 시설들은 금세 복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문제라면…….
‘성벽이군.’
파리대왕의 몸통박치기에 이은 자폭에 완파 당했고, 힘들게 새로 지었더니 나이트 브링어의 브레스와 어둠에 갈가리 찢겼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남쪽 성벽 수난 시대다.
‘복구를 해야 한다.’
그래,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이걸. 아이고.’
성벽 같은 설비는, 당연한 말이지만 연 단위의 공사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재건에는 호수왕국에서 가져온 마법 건축 기술, 그리고 황도 뉴 테라에서 통째로 공수해온 성벽 파츠 덕분에 공기(工期)를 괴악한 수준으로 단축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요행을 부릴 수가 없다.
‘절단이 난 성벽…… 또 작살이 난 전진기지…….’
손으로 이마를 짚은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진짜로 공사가 다망하네.’
당장 뾰족한 해법이 안 보인다.
그나마 뉴 테라에서 가져온 성벽이 파츠를 조립하는 방식이었기에, 파손되지 않은 부분은 멀쩡히 버티고 서 있다. 그쪽 중심으로 일단 복구 공사를 하면서 어떻게 방책을 강구해보기로 하자.
성벽, 전진기지, 병영, 군수창고…… 파손된 설비 내역을 줄줄이 살피며 대강의 복구 플랜을 정리한 뒤.
나는 다음 서류 뭉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비.
최전선에서 악몽 속 괴수왕들과 직접 싸우는 영웅들의 장비는 어지간한 군수물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중요한 장비들이…….
‘와, 장난 없네.’
파손된 장비 내역이 빼곡히 적힌 서류를 넘기다가, 내 턱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미친, 대체 얼마나 갈아먹은 거야?
일단 내 장비부터 보자면.
[위대한 사령관의 깃발], 소실.“쿨럭!”
나도 모르게 거세게 헛기침을 한 뒤, 다급히 커피잔을 집어 들고 물처럼 들이켰다.
“후우, 후우, 후우.”
진정하자, 진정, 진정하…… 젠장할! 젠장, 젠장하겠다! 크아아악!
‘미친 흑룡 새끼야! 감히 내 전용 장비를! 내가 이거 얻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잘도!’
다섯 조각으로 쪼개져 있던 걸 가챠로 뽑아서 모았단 말이다! 쓰알신님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다 모으지도 못했다고!
개고생하며 깃발 조각을 모으던 날들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솟았다. 진짜 개 억울하네. 하.
그래도 내가 슈퍼-김애쉬로 합체…… 퓨전…… 조그레스……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진짜 애쉬와 하나가 된 덕분에 깃발에 있던 기능 대부분을 지금도 사용할 수 있긴 하다. 그거랑 별개로 전용 장비 태워 먹었으니 개빡치긴 한다만.
‘후, 됐다.’
그래도 기능 보존이라도 한 게 어디야. 다음 장비나 살피자.
‘[높은 탑의 주인], 수리가능. [빛과 그림자], 수리가능.’
파리대왕으로 만든 갑옷, [높은 탑의 주인]은 가루가 되다시피 조각이 나버렸지만 애초에 분해-합체가 콘셉트인 장비인지라. 다행히 수리가 가능하고.
백야로 만든 깃대 [빛과 그림자]는…… 함께 미끼로 사용했는데, 이 장비 녀석이 위험한 순간 스스로 결합을 해제하고 칼집과 예식검으로 똑 쪼개져서 또 큰 파손을 피했다. 원본 닮아서 생존본능 하나는 끝내줘요.
나머지 내 장비는 모두 인벤토리 안에 곱게 모셔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다음, 에반젤린…….’
이게 또 큰일이라는 말이지. 나는 우리 변경백작위 계승자의 장비 파손 보고서를 펼쳤다.
‘[크로스 가문의 창], [크로스 가문의 방패], 파괴…….’
오오 세상에 미친! 힘들게 업글하고 정령까지 발라놓은 내 전용장비…… 아니, 에반젤린의 전용장비가!
‘나이트 브링어 이 씹새야! 당장 이름 바꿔라, ‘전용장비 브레이커’로! 세상을 멸망시킨다더니 전용장비만 골라서 다 뽀개 놓고 가냐! 죽어! 이미 죽었지만 또 죽어!’
저주를 퍼부으며 나는 이를 까득까득 갈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켈리베이 말로는 장비의 외장은 다 부서졌지만 내부의 핵심은 무사하니까, 어떻게 손을 써볼 여지가 있다고는 하는데…….
“에휴. 다들 죽을 고생 했구나.”
그래, 좋게 생각하자. 애가 안 죽고 장비만 날아간 게 어디냐. 켈리베이가 뭔가 마법을 부려줄지도 모르고.
에반젤린의 갑옷 [스노우화이트] 또한 상당히 파손되었지만, 애초에 자가 복구가 가능한 마법 갑옷이기에 다행히 수리 중이라고 하고.
‘다음, 나이트메어 슬레이어들.’
쿠일란에게 들러붙었던 [만월광의 학살자]는 다시 분리되었다. 쿠일란 본인 또한 모든 늑대의 저주를 잃고 평범한 인남캐로 돌아왔다.
본인 말로는 무언가 심득(心得)을 했고, 그래서 권법의 경지가 높아졌다고 하는데…….
‘장비 두 겹 입히는 거 개꿀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스펙은 다운그레이드 된 상황이다. 부정특성 ‘유리몸’도 되돌아왔고. 더 이상 달의 차고 기욺에 따라 버프 디버프도 받지 않는다.
‘대신 [만월광의 학살자]가 정화되었다.’
이 정화된 가죽 망토는 쿠일란에게 여러 가지 막대한 버프를 입혀주었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동안은 모든 종류의 저주로부터 면역이다. ‘유리몸’ 또한 일종의 저주로 받아들인 것인지, 걸치고 있는 한은 튼튼쿠일란이다. 24시간 내내 입혀놔야겠어.
‘……여름엔 어쩐대?’
아 몰라. 일단 이번 겨울을 나고 생각하자.
아무튼 정화된 [만월광의 학살자]는 그 외에도 쿠일란에게 여러 버프를 제공하는데, 전반적으로 그 효과가 스피드에 치중되어 있다.
이제 늑대의 저주도 잃었으니, 쿠일란은 맷집이 확 약해졌다. 초창기 때처럼 회피딜탱으로 캐릭터 콘셉트가 다시 돌아온 듯한데, 잘 버텨낼 수 있으려나.
‘버텨내 주길 바란다, 수인왕.’
……그런데 늑대의 저주 다 빠져나갔잖아. 그러면 수인이긴 한 건가? 이신의 축복이 아직 깃들어있는 걸 보면 종족신은 여전히 쿠일란을 아바타로 생각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됐고, 다음.’
그 외에도, 우리가 소지하고 있던 나이트메어 슬레이어들은 모두 ‘정화’되었다.
각 장비 사용자들이 강인한 의지로 각자의 마음 속 어둠을 이겨내고 각성한 덕이었다.
악몽 군단장의 마력핵으로 만든 여러 장비 외에도, 이번에 악룡들의 마력핵으로 주조한 각종 장비들, 그 외에도 어둠에 물들었던 장비들 또한 모두 무사히 정화되었다. 그리고 시련을 이겨낸 만큼 모두 스펙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중 특기할 만한 것은 역시 루카스의 장비인데.
‘아니, [엑스카니발] 이거 정화도 되는 거였어?’
마검 [엑스카니발]이 성검 [엑스칼리버]로 변해 버렸다.
상세한 내역을 살피자면 오히려 반대, 성검 [엑스칼리버]가 타락하여 마검 [엑스카니발]이 되었던 것이고, 이번에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해석이 맞는 것이겠지만.
‘……그 배고프다며 신선한 먹을 거 달라고 덜덜 떨어대던 피 묻은 칼이 성검이었다고?’
상상도 못 한 결과라 굉장히 당혹스럽다.
어쨌든 본모습을 되찾은 성검 [엑스칼리버]는 무지막지한 성능을 보유했다. 본래 루카스가 사용하던 [하사받은 검]보다 깡스펙은 오히려 훨씬 앞설 정도다. 덕지덕지 붙은 특능 또한 정신 나간 수준이고.
자세한 성능은 루카스와 함께 실전에서 하나씩 검증해보기로 하고…….
‘이렇게 보니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군.’
정화된 장비 목록을 주르륵 살피며 나는 신음을 흘렸다. 냉정하게 따지면 전화위복이랄지, 장비 측면에서는 오히려 득(得)이 더 크다.
‘뭣보다, 또 많이 얻었거든.’
정화된 장비뿐만이 아니다.
그 지랄맞았던…… 아니, 지랄맞은 정도가 아니지. 유사 이래 가장 엿같았던 괴수 흑룡을 쓰러뜨렸기에 그 보상 또한 엄청났다.
우선, 나이트 브링어의 시신에서 막대한 재료를 채취했다.
내가 막판에 빛의 폭격으로 놈을 죄다 태워버리는 바람에 온전한 시신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큼직한 장비 광산 하나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드래곤은 온몸이 최고급 장비 재료라 할 만하다. 그 장비 재료가 커다란 산만큼 도시 바로 앞에 쌓여 있으니. 갖은 비늘이며 뼈, 뿔과 발톱…… 온갖 부위가 대장간으로 쓸려 들어갔다.
과장 없이 전선에 소속된 모든 병사들의 무기와 갑옷을 맞춰줄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전선 전체의 장비 티어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중 또 눈여겨볼 재료는 역시 마력핵과 드래곤 하트겠지.’
나이트 브링어는 심장부에 최중요 마력핵인 드래곤 하트가 있고, 일곱 머리에 각각 할당된 마력핵이 또 하나씩 있는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니까 드래곤 하트 하나, 마력핵 일곱 개가 나와야 정상인데.
‘드래곤 하트 하나에 마력핵 여덟 개가 나왔네.’
처음에는 왜 이런가 했는데, 회수된 마력핵을 살피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력핵 하나는 마지막 순간 나이트 브링어에게 흡수된 스케이리안의 것이었다. 육체는 소실되었으나, 마력핵은 채 흡수되지 못했고 이렇게 남은 것이다.
스케이리안의 심장을 내 깃발로 뚫었기에, 그 꿰뚫린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
이것을 어쩐다.
장비로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고심하며 나머지 리스트를 살폈다.
그 외의 온전한 마력핵 일곱 개(사실 보조 머리 여섯은 요르문간드에게 잡아먹혔었기 때문에, 요르문간드의 뜯겨나간 몸에서 회수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내 깃발에 꿰뚫린 흔적이 남은 나이트 브링어의 드래곤 하트.
‘우리 장비를 부셔 먹은 죄, 우리 장비가 되어서 갚아라, 나이트 브링어…….’
당장은 대장간이 워낙 바쁘기에 흑룡 장비 제작 의뢰는 추후에 좀 여유로워지면 해야겠다. 뭘 만들지 구상이나 하면서 기다리자.
‘그리고, 저것.’
나는 고개를 들어 집무실 한켠에 쌓인 금빛 상자와 흰색 상자를 살폈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
EX등급 상자 1개 외에도, 자그마치 SSR등급 상자를 8개나 얻었다.
‘SSR등급 상자 이거, 게임에서는 끽해야 한 회차에 10개 먹을까 말까 했는데…….’
이번 공략 3년 동안 먹은 쓰알 상자만 근 20개는 되는 것 같다. 왜 이렇게 인심이 후하지? 에이더 이 새끼가 그래도 수를 좀 쓴 건가? 아니면……?
‘돌이켜보면 세트템도 기묘하게 다 맞춰줬고. 은근 아이템은 잘 퍼준단 말이야.’
거지같이 끔찍한 난이도의 게임이지만, 이런 점에서 최소한의 양심은 있다고 해야 하려나. 으으음.
생각하며 상자로 손을 뻗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다 열어버릴 생각이었다.
‘내 친구 쓰알신! 알지?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전부 완제로!’
그런데,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누군가가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거세게 집무실 문이 열렸다.
나는 놀라서 그쪽을 보았다. 다급하게 들어온 것은 루카스였다.
“허억, 허억!”
거세게 호흡을 가다듬던 루카스가 소리쳤다.
“큰일입니다, 주군!”
“뭐야, 무슨 일인데?!”
루카스가 이리 당황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적습인가? 그도 아니면 내분? 공사 현장 붕괴? 가맹국 이탈? 어느 쪽이지?’
일순 온갖 생각이 다 뇌리를 스치는데,
“에, 에반젤린이! 에반젤린이……!”
“에반젤린이?!”
우리 백병대장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더더욱 당황했다.
에반젤린이 왜? 다쳤나? 사고라도 당했나? 가출했나? 너무 많이 먹고 배탈 났나? PTSD에 시달린 나머지 복구공사 중인 건물에 핑크색 페인트를 퍼붓기라도 했나? 젠장, 어느 쪽이지?! 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고 루카스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정답을 말해주었다.
“고백을 받았답니다-!”
“……?”
순간 이해가 안 가서 멍하니 가만히 있다가.
나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