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762
◈ 762. [Side Story] Brand new day (4)
하늘에서는 조용히 소복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입김을 토해낸 에반젤린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렇게 됐구나…….”
루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다.”
루카스와 에반젤린은 오늘 서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공유했다.
0고백 1차임이라는 그야말로 공전절후(空前絶後)한 기록을 같은 날 달성했기에, 두 사람은 같은 감정 또한 공유하고 있었다.
억울하다…….
“뭐, 그래도 어느 정도 다행이긴 하지.”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헤카테의 상태가 계속 안 좋았으면 어느 정도 돌봐줄 생각은 있었거든…… 어쨌든, 친구니까.”
“친구로서?”
“친구로서. 헤카테에게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 이상 생각 없다.”
“진짜 철벽 오지셔…….”
“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붙잡고 일어서기로 한 듯하니…… 응원해줘야지.”
옅은 한숨을 토해낸 에반젤린은 깍지 낀 두 손을 뒤로 들어, 자신의 뒷머리를 그 손에 기댔다.
“저도 다행이에요. 그분이 마음을 접어줘서.”
“너도 칼같이 거절하기는 힘들었나보군?”
“뭐, 앞으로 다스릴 도시의 주민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받은 고백이기도 했고?”
“하하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루카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에반젤린이 다시 도끼눈을 뜨고 루카스를 노려보았다.
“왜 또 웃어요.”
“아니, 그냥…….”
파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루카스가 읊조렸다.
“이렇게 서로 보고하는 게 뭔가 웃겨서.”
“…….”
살짝 볼을 부풀리고 그런 루카스의 옆얼굴을 보던 에반젤린이 에잇! 소리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우리, 이렇게 억울하게 차이고만 끝낼 순 없잖아요?”
에반젤린은 작은 주먹을 들어 파르르 떨어 보였다.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0고백 1차임은 확실히 억울하긴 한데…… 그래서? 이 스코어를 어떻게 뒤집을 방법 있어?”
그러자 에반젤린이 위험하게 씩 웃었다.
“우리도 누군가를 차러 갑시다! 0고백 1차임 스코어를 마구 퍼뜨려서 무고한 희생자를 늘려주자고요!”
“호오…….”
상당히 미친 소리였지만, 에반젤린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안 했는데 뻥 걷어차인 루카스로서는 어째서인지 그 제안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누구를?”
다만, 그 불우한 희생자는 누가 될 것인가?
그러자 에반젤린의 악동스러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에반젤린은 처음부터 생각한 상대가 있다는 듯, 소리 죽여 속삭였다.
“이 전선에서 제일 안 차여봤을 것 같은 사람은 어때요?”
***
새해 첫날이지만 나는 늘 업무가 많다.
영주 집무실에서 이런저런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나의 기사 듀오가 나란히 쫑쫑 걸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 다 잘 놀고 왔냐? 거리 분위기는 좀 어때? 나도 아까 잠깐 돌아보긴 했는데 바빠서 신전만 들렸다가 바로 여기 왔네.”
“…….”
하지만 루카스와 에반젤린은 대답이 없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너 먼저 해’ ‘아저씨가 먼저 하세요’ 뭐 이러면서 투닥거리더니, 이윽고 에반젤린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응?”
영문을 몰라 나는 눈만 깜빡였다. 얘네 왜 이러지?
“무슨 일 있어?”
“크흠, 선배님. 그게.”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에반젤린은 내 책상 앞에 서더니, 좌우로 눈치를 힐끔이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사실 처음에 저, 선배님을 좀 좋아했던 거 같아요.”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에반젤린은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골렘 군단 앞에 고립된 저를 구해주러 오시기도 하고, 아빠를 대신해서 저를 가르치고 또 이끌어주셨고, 어떤 적이 오든 굴하지 않고 물리치시고, 뭐든지 다 알고 계시고…… 솔직히, 어린 제 입장에서 선배님은 마치 백마 탄 왕자님 같았어요.”
“…….”
“그래서…… 그래요. 솔직히, 좋아했어요.”
나는 눈앞에 선, 어느새 훤칠해진 나의 방패기사를 보았다.
처음 보았던 열여섯 살 꼬맹이는 이미 흔적도 없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다 된 에반젤린 크로스는 쑥스러워하며, 하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알겠더라고요. 그 감정은 연정이 아니라 동경이었어요.”
“…….”
“제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을 선배님께서는 가지고 계셨으니까. 어른스럽고, 현명하고, 강한 마음을 가진…… 그런 선배님처럼 되고 싶었어요. 선배님 같은 지휘관이, 선배님 같은 영주가, 선배님 같은 리더가.”
에반젤린은 이제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에메랄드색 눈을 빛내며 나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또, 이제는 알아요. 선배님과 저는 다른 사람이라는 거. 선배님께 배울 수는 있겠지만, 선배님과 같은 리더는 될 수 없다는 거.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저만의 길을 만들면서…… 앞으로 이곳 크로스로드를 다스려 가려 해요.”
“…….”
“크흠, 아 물론! 아직 몇 달 뒤의 일이긴 하지만요.”
나는 무엇도 가르치거나 전수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이렇게 훌쩍 커버린 이 땅의 정당한 계승권자는 전에 없이 환하게 미소해 보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선배님은 제 동경의 대상이겠지만. 에반젤린 크로스는 에반젤린 크로스의 방식으로 살아가 보려 합니다.”
“…….”
“감사해요, 선배님. 정말로. 그동안 가르쳐주신 모든 것, 베풀어주신 모든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이 도시를 다시 사랑하게 해주신 것.”
에반젤린의 이 느닷없지만 확고한 독립선언을 듣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내가 이곳 크로스로드의 영주로 부임하고 어느새 만 3년이 거의 다 지났음을.
그리고 반드시 엔딩에 도달하고, 이 땅을 이 아이에게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반젤린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도시를 다스리는, 훌륭한 영주가 되어가는 과정을…….
나 또한 보고 싶으니까.
“으음…… 이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
잘 말하다가 마지막에 횡설수설하던 에반젤린은 이윽고 에잇! 소리를 내더니 뒤로 껑충 물러서며 루카스의 어깨를 퍽 쳤다.
“에이 몰라, 나는 여기까지! 바톤 터치! 아저씨 차례!”
루카스는 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파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앞으로 성큼 나서서 내 앞에 섰다.
나는 이제 상황이 재밌어져서 웃으며 그런 두 기사를 번갈아 보다가 루카스에게 집중했다. 얘는 무슨 말을 하려나.
“……제 인생에 주군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루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군을 지키는 것만이 제 삶의 목적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년의 죄의식 때문일 수도 있고, 기사로서의 본분일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어쨌든, 제 삶의 목적은 오직 주군의 명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눈을 내리깔고 바닥을 보던 루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주군과 함께 이 도시에 와서 지내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소중한 것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문득 기억이 스쳤다.
어느 때였던가.
함께 정원 선베드를 하나씩 차지하고 드러누워서, 햇볕을 쬐면서 크로스로드 전체를 내려보았던 때가 있었다.
– 어느새 소중해졌습니다. ……그래서, 지키고 싶은 것 같습니다.
루카스는 다른 동료들도 소중하다고 그때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의 루카스는 그때보다도 더 성장해 있었다.
“함께 싸우는 이들이 소중해졌고, 이 도시 전부가 소중해졌고, 나아가서…… 이 세상 전체가, 지킬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
“처음에는 당신께서 휘두르시는 검이 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무런 자각이나 사고 없이 주군께서 명하시는 대로 싸우는 칼끝이면 족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건방지게도, 저 자신의 마음으로…… 주군의 기치를 좇아 싸우고 싶습니다.”
지난 3년간 많은 변화를 겪은 루카스의 두 눈을 들여다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기도 했고, 야수처럼 불타오르기도 했고, 감정이 죽은 금속처럼 메말라 있기도 했던 기사의 푸른 눈은 이제 우물처럼 깊다.
여러 감정을 품은 채 온화하게 가라앉은, 그런 우물.
“이제 더 이상 주군의 번견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저 자신의 의지로…… 주군의 깃발을 위해 싸우고 싶습니다.”
“…….”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주군?”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물론.”
그리고 내 앞에 선 두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새 몸의 키도, 마음의 키도, 한 뼘씩 자란 나의 기사들을…….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언제나 어릴 것만 같던 동생들의, 새해 첫날 독립선언을.
나는 무어라 더 말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두 기사를 동시에 가볍게 품에 안고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잘 컸구나, 너희 모두…….”
커버리는구나, 다들.
이렇게 순식간에, 이렇게 훌쩍, 순식간에 자라버린다.
포옹을 풀자 멋쩍은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살피던 에반젤린과 루카스가 동시에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그럼 이거, 우리가 찬 걸로 해주는 거예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주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이 독립선언이 나온 맥락을 잘 모르겠어서 물으려는 참이었는데, 둘은 대답하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쳐버렸다.
“0고백 2차임 수고!”
“신기록 경신 축하드립니다, 주군!”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순식간에 계단을 타고 영주 저택을 빠져나가, 저 멀리 후다닥 달려가는 두 기사를 창밖으로 살피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란히 도망치는 사이좋은 두 기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가 몇 달 만에 끊어질지, 아니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해마다 성장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니까.
***
“헤엑, 헤엑…….”
“헉, 헉, 헉.”
정신없이 도망친 두 기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서 숨을 골랐다.
턱을 훔치며 에반젤린이 투덜거렸다.
“아니, 우리가 차러 간 자리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우리의 과거 심정 고백 시간이 된 거지?”
“분위기 그렇게 만든 건 너였잖냐…….”
등을 쭉 편 루카스가 후련하게 웃었다.
“뭐, 그래도…… 덕분에 좀 덜 억울해지긴 했네.”
“…….”
그런 루카스를 흘겨보던 에반젤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어차피 부끄러운 고백을 한 김에…….
이쪽에도 부끄러운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아저씨. 아까 선배님한테 그랬잖아요. 함께 싸우는 이들이 소중해졌다고.”
“그래.”
“그럼 나도 아저씨한테 소중해요?”
루카스는 즉답했다.
“아니.”
“…….”
에반젤린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오르려는 순간, 루카스가 덧붙였다.
“무척 소중하지.”
“…….”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달아올랐다.
아니, 잠깐. 무슨 뜻이지? 무척 소중? 왜 저렇게 대답한 거지? 저렇게 말하는 화자의 의도가 무엇이지?
그건가? 동료로서 소중? 유능한 백병부대 방패기사로서 소중? 지금 그딴 소리로 이으려는 빌드업인 것은 아닌가?
그러자 루카스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뻔뻔한 얼굴로 에반젤린을 슥 보았다.
“에반젤린 너, 생일이 1월이었던가.”
“오 뭐야. 기억하네요?”
“이번 생일 지나면 성인이고.”
“그렇죠. 드디어 변경백 자리를 물려받을 조건을 갖춘다고요.”
“그래…….”
루카스가 후- 소리를 내며 숨을 뱉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네가 성인이 되고 나면…….”
“……나면?”
에반젤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성인이 되고 나면, 뭐?
그러자 루카스는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가 버렸다.
“……그때 말하마.”
“뭐, 뭘요.”
“글쎄. 그때 들어.”
“아니, 그냥 지금 말해주면 안 돼요?! 뭘 미뤄요, 궁금하게! 지금 당장 말해!”
“안 돼.”
루카스가 퉁명스레 덧붙였다.
“……나도 오래 기다렸어. 너도 조금만 더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 멀어지는 루카스의 귓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
뒤늦게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에반젤린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이상한 소리를 토해냈다.
“어라? 어라아아아……?!”
하얀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