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15)
515화. 딥 슬립
뜻하지 않게 너무 수준 높은 연주를 들어버렸다.
그 이유가 있었다.
연주한 건 소피아인데 유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으니까.
“소피아님은 쇼팽 콩쿠르 우승자라구.”
쇼팽 콩쿠르.
이은경이 우승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더불어 3대 콩쿠르 중 하나였다.
이쯤 되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 이게 맞나?’
사실상 국제 대회 우승만 해도 엄청난 경력 아닌가.
스케일이 다르다.
아무리 덤덤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야가 달라서 다행이지.’
만약에 피아니스트 지망생으로 이 자리에 섞여 있었다면 숨도 못 쉬었을 거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표정을 보니 연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기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까.
이제는 연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콩쿠르 우승의 영예에 대해.
특히나 연두는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쇼팽을 유독 좋아했다.
“우아..”
그래서인지 소피아를 바라보는 연두의 눈이 한없이 반짝인다.
그럴 만도 하지.
사실상 할머니가 밟아온 길은 앞으로 연두가 걸어가야 할 길이니까.
“.. 꿈이에요.”
“응?”
“연두도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게 꿈이에요..!”
그 말에 소피아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꿈, 꼭 이룰 수 있을 거란다.”
“헤헤..”
질 수 없다는 듯 유리도 선언했다.
“저도 꿈이에요! 언젠가는 소피아님처럼 3대 콩쿠르에서 우승할 거예요! 지켜봐 주세요!”
“…”
꽤나 용기가 필요했을 법한 선전포고에 가까운 유리의 말.
허나 침묵이 맴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리는 레나를 향해 소리쳤다.
“내 말은 왜 통역 안 해 줘!”
“.. 프흣.”
웃음이 나왔다.
날 선 유리의 시선을 느끼고 바로 무표정을 짓긴 했지만.
보는 그대로였다.
줄곧 나와 연두, 그리고 은주아의 말을 통역해주던 레나는 한 번씩 직무유기를 하곤 했다.
공교롭게도 항상 유리가 말을 할 때였다.
“내 맘이다, 메롱.”
“빨리해 줘! 빨리 소피아님한테 내 말 전달해 달라고!”
“싫은데?”
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전달해 주세요, 레나님. 해 바.”
“.. 무, 뭐?”
“전달해 주세요, 레나님. 하면 전달해 줄께!”
“너 진짜 죽을래!”
유리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됐어! 하지 마! 하파엘 아저씨 오면 전달해달라 할 거니까.”
“흥, 마음대로.”
둘 다 독하다.
자존심 싸움에 있어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유리와 레나였다.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얘야. 시은이라고 했지?”
“네.”
아무래도 악기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은이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챙겨주시는 걸까.
대화를 나눠본 결과, 소피아는 무척 상냥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배려한다는 게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껴졌다.
“노래를 잘하던데?”
“.. 제 노래를 들으셨어요?”
“그럼.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것도 들었고, 학교 무대에서 한국 가요를 부르는 것도 들었단다. 목소리가 아주 예쁘더구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칭찬을 받아서일까.
수줍은 듯 시은이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때 소피아는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례차례 눈에 담았다.
시은이부터 시작해서 레나, 유리, 그리고 연두까지.
“혹시……”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도중에 말을 멈췄다면 생각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레나가 대신 물어봐 주기도 했고.
“뭐야? 뭔데 할머니.”
“나중에 얘기해 줄게, 우리 애기.”
“우응.. 지금 듣고 싶은데……”
확실히 할머니 앞에서는 애교가 많아지는 레나였다.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등장한 하파엘이 말했다.
“연두 아붜님~”
왜인지 신이 잔뜩 난 목소리다.
나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네, 레나 아버님.”
“짐은 전부 내렸나요?”
“네. 당장 필요한 거 말고는 2층에 올려뒀습니다.”
“오, 굿!”
이어서 그는 말했다.
“그럼 갑쉬다!”
“네?”
“밥 먹으러요! 맛있는 식당 있어요!”
다과 덕분에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입이 심심하던 차였으니까.
독일 음식을 맛보러 갈 시간이었다.
***
설렘에 가득 찬 연두.
비록 소시지는 아니긴 했지만 독일 식당에 간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하파엘이 한 얘기도 있었다.
‘연두가 좋아하는 소시지는 나중에 진짜 맛있게 먹자.’
‘진짜 맛있게요..?’
‘응, 진짜 맛있게.’
잘 모르겠다.
맛있는 식당에 간다는 건지, 아니면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는 건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핵심은 진짜 맛있다는 거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적어도 연두는 기다림을 즐길 활력을 얻은 거 같았다.
진짜 맛있는 소시지를.
그런 연두를 보며 유리는 괜히 트집을 잡았다.
“으휴, 유치해. 소시지 가지고 그렇게 좋아하긴.”
별로 타격은 없어 보였다.
연두는 되려 물었다.
“유리는 소시지 안 좋아해?”
“별로.”
“.. 지, 진짜?”
또 나왔다.
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어떻게 소시지를 안 좋아할 수가 있냐는 표정.
이어서 연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나랑 똑같다..”
소시지를 안 좋아한다는 점에서 똑같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유리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뭐? 누구랑 똑같다고?”
“레나랑.”
“내가 왜 걔랑 똑같아!”
“레나도 안 좋아해서… 소시지.”
그제야 유리는 말뜻을 이해한 듯싶더니 말했다.
“좋아해.”
“.. 응?”
“소시지 좋아한다고.”
식성을 바꿔가면서까지 레나랑 겹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자 연두는 유리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치!”
“뭐, 뭐야!”
“소시지 진짜 맛있어! 레나가 독일에 진짜 맛있는 소시지가 있대! 유리도 좋아할 거야!”
“아니, 나는…”
소시지에 진심인 연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목적지.
하파엘이 말한 식당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Willkommen!”
종업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하파엘과 인사를 나누는 걸 보니 초면이 아닌 듯했다.
단골집인 걸까.
‘역시 독일이네.’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 맥주를 마시는 손님들이 많았다.
상상하던 풍경이었다.
독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소시지와 맥주니까.
‘맥주를 마시긴 어려울 거 같지만.’
딱히 연두의 트라우마 때문은 아니었다.
전에 한강에서 마신 것도 있고 술에 대한 연두의 트라우마는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 잔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을뿐더러 과음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다르니까.’
사실상 그랬다.
연두가 두려워하는 건 술 그 자체가 아닌 만취한 외삼촌의 모습일 터였다.
아직 그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겠지.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고.’
그래서였다.
어쩌다 술을 입에 대게 되더라도 한 잔 이상은 절대 마시지 않는 건.
실수로라도 연두의 안 좋은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 들어와요!”
하파엘을 따라 착석한 테이블.
앉자마자 종업원이 바로 주문을 받았다.
“골고루 시킬까요?”
“그러죠.”
왜인지 레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랬지.
여기 온다는 말에 질색하던 레나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생생했다.
“에피타이저로 감자 수프 나왔서요…”
그 와중에도 종업원의 말을 통역해주는 걸 보고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식사가 시작됐다.
거침없이 수프를 한 숟갈 가득 떠먹는 하파엘을 보고 나도 수저를 들어 올렸다.
아암.
입에 넣는 동시에 레나의 표정이 안 좋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독일에 와서 처음 먹는 음식.
감자 수프는 생각 이상으로 맛이 없었다.
***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하파엘이 극찬하는 걸 보고 정말 맛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 이건 아니야.’
감자 수프보다는 감자 물이 더 잘 어울리는 질감이었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기껏 추천해 준 하파엘을 봐서라도 맛없는 티를 내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내가 아닌 아이들이었다.
“…”
연두는 말을 잃었다.
유리는 표정을 찡그리고 있고, 시은이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놨다.
레나는 애초에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일 났네.’
이건 숨길 수 없을 거 같은데.
“.. 얘들아. 혹시 입에 안 맞니?”
역시나.
하파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보일 테니.
“네.”
진심으로 충격받은 표정이다.
그럴 만도 하다.
벌써 하파엘은 수프를 다 비운 상태였으니까.
‘맛있는 음식인 건가.’
놀랍긴 하지만 그럴 확률이 높았다.
꽉 차 있는 손님들이 증거였다.
모두 우리와 같은 미각을 지녔다면 이렇게 손님이 많을 리가 없다.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메인 메뉴.
“.. 어?”
불안함 속에 조심스레 한 조각을 입에 넣었는데 생각 이상의 맛이었다.
슈니첼.
독일식 돈가스였다.
토마토소스와도 잘 어우러지고 한국에서 먹던 돈가스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감자튀김도 맛있다.
‘하긴, 감자튀김이 맛없는 게 이상하긴 하지.’
수프에 넣을 걸 다 튀김으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말했다.
“연두야.”
“.. 네.”
“이거 한 입 먹어봐. 되게 맛있는데?”
“진짜요?”
“응.”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연두의 입에 한 조각을 쏙 넣어줬다.
오물. 오물.
커지는 눈동자.
곧이어 얼굴은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그런 연두를 본 아이들도 한 입씩 먹고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내비쳤다.
딱 한 명만 빼고.
“맛업서..”
다름 아닌 레나였다.
“한식 먹고 시퍼.. 밥 먹고 시퍼.. 꿀떡…”
애처로울 지경이다.
벌써 한식을 찾는 걸 보면 험난한 여정이 될 거 같네.
레나만 빼면 만족스러운 식사가 이어졌다.
“참.”
어느 정도 식사를 마친 나는 입을 열었다.
“하파엘.”
“네!”
다행히 하파엘도 활기를 되찾은 거 같았다.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고.
레나도 접시를 꽤나 비운 상태다. 살기 위해 먹는 느낌이긴 했지만.
하파엘을 향해 나는 물었다.
“오늘 일정이 있나요?”
“일정 있어요!”
“오, 뭔가요?”
“자요!”
“.. 네?”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집 가서 자요! 딥 슬립!”
“…”
아직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개인 일정이 있는 걸까.
그런 나를 향해 하파엘은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고백할게요..”
“네?”
“사실 독일. 좀 재미없는 나라에요…”
아니, 잠깐만.
갑자기 이렇게 풀이 죽어서 자국 디스를 한다고?
당황한 나를 향해 덧붙였다.
“특히 우리 집 주변에 뭐 없어요.”
“아..”
“그래서 조금 멀리 나가야 해요. 그러려면 오늘 푹 자야 해요.”
그런 거라면 납득이 됐다.
확실히 멀리 나가기에는 늦은 시간이긴 하지.
슬슬 해가 질 때가 됐으니.
“그렇군요.”
납득한 나는 다시 포크를 들고 접시 위 남은 음식을 비웠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직 남은 일자는 많았고 시간도 충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