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865)
865화. 형성되는 분위기
부산 여행 전날이었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준태는 하루를 돌아보고 있었다.
“좋아.. 아주 알찼어.”
오늘도 알찬 하루였다.
하루하루 편집에 대해 새로운 걸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무척 즐거웠다.
그럴 수 있는 데에는 아랑의 지분이 컸다.
같은 장소에서 일하는 동료인 동시에 훌륭한 멘토였으니까.
“슬슬 잘까.”
오랜 시간 자책 속에서 잠이 들었다.
때로는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괴로운 마음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과거의 부산물 때문이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지만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요즘은 달랐다.
‘과거가 사라진 건 아니야.’
그러나 준태는 분명히 체감하고 있었다.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의 위력을.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다. 사라지지도 않는다.
과거를 극복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하루를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기분으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내일은 부산 여행인가.”
물론 동행하는 건 아랑 혼자였다.
혼자 출근하게 되겠네.
그렇다고 해도 규칙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지각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기지 않으려면 슬슬 잠을 청할 필요가 있었다.
“.. 재밌겠다, 부산 여행.”
놀러 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래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즐거울 거 같았다.
미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랑이 제 할 일을 하듯, 준태에게도 할 일이 있는 거니까.
틱.
조명을 껐다.
캄캄해진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려는데 진동음이 들려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다시 조명을 켜고서 발신인을 확인했다.
“.. 주아랑?”
깜짝 놀란 준태는 자세를 고쳐 앉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주아랑.”
“응.”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갈게. 준비하고 있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 무슨 말이야?”
“부산 여행에 네가 필요할 거 같아.”
“자, 잠깐만.”
“편집에 관련된 거야.”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도 결국 아랑이 하는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나도 가라는 거잖아.’
갑자기 어떤 변수가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그랬다.
“알겠지?”
“응.”
“그럼 끊을게.”
틱.
전화가 끊겼다.
어안이 벙벙했다.
조명을 환하게 켜고 난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다.
“아니, 무슨……”
황당했다.
이런 얘기를 누가 전날 밤에 한단 말인가.
이건 마치 퇴근한 뒤에 직원을 깨우는 상사의 연락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준태라도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그러나 황당함을 앞세우기에는 다른 감정이 훨씬 더 컸다.
부산 여행을 함께 간다.
같이 가는 멤버가 어떻냐고?
연두와 초록님, 시은이, 레나, 유리, 지우……
“오우 쉣!”
준태는 울부짖었다.
연두부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라인업이었다.
구석에 박아둔 커다란 가방을 꺼낸 준태는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서둘러! 하나도 빠트리지 마!”
아랑은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준태는 부정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 면은 지금처럼 뜻밖의 선물이 되어 찾아오기도 하니까.
초스피드로 짐을 싸고서 침대에 누웠다.
“하아..”
요즘 계속 뿌듯함 속에 잠이 들었다.
오늘은 달랐다.
설렘 속에 잠들 거 같았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준태네 집 앞에 웬 봉고차가 하나 도착했다.
10인승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봉고차였다.
연락을 받고 미리 나와 있던 준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서 봉고차를 응시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동네에서 이런 차를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빵-
그때 경적이 울렸다.
깜짝 놀란 준태의 시선에 들어온 건 열리는 운전석 창문이었다.
그 속에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준태는 경악했다.
“뭐 해? 빨리 타.”
아랑이었다.
아랑이 봉고차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뒤에 짐 싣고.”
얼떨결에 짐을 싣고서 준태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했다.
옆을 바라보니 세상 태연한 얼굴로 한 손 운전을 하고 있는 아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번에는 빨간색 포르쉐에서 내리더니 이번엔 봉고차 운전이라니.
갭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 이거 아무나 못 모는 거 아니야?”
결국 준태가 뱉은 말은 그 정도였다.
“1종 있어야 하지 않아?”
무슨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아랑은 대답했다.
“1종이니까.”
“.. 아.”
침묵이 일었다.
봉고차 특유의 덜컹거림이 있을 뿐이었다.
“노트북은 챙겼지?”
“응.”
계속 침묵을 지키기에는 준태의 호기심이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근데 왜 봉고차를 몰고 왔어?”
“짐 실어야 해서.”
“짐?”
그러고 보니 짐칸에 뭐가 잔뜩 있긴 했다.
부산 여행을 위해 준비한 걸까.
“어디로 가는 거야?”
“버스.”
단답이긴 했지만 돌려서 대답하는 법은 없었다.
목적지는 버스였다.
더 이상 물을 게 떠오르지 않아서 준태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끝말잇기라도 할래?”
“아니.”
“응.”
그 뒤로는 조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고차가 멈추고 아랑이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옆에는 버스가 서 있었다.
수십 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관광용 버스였다.
“.. 허.”
새삼 감탄하는 준태를 향해 아랑이 무언가를 건넸다.
툭.
흰 봉투였다.
보통 흰 봉투가 의미하는 건 정해져 있다.
사직서 또는 돈 봉투.
이 타이밍에 사직서를 건넬 리는 없었다.
준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뭐야?”
아랑은 태연하게 답했다.
“돈.”
“돈은 왜?”
“추가수당이라고 생각해. 원래 일하는 시간 외에도 일하는 셈이니까.”
슥.
아랑이 눈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친 채로 아랑은 말했다.
“그 시간 동안은 내가 널 고용한 거니까 농땡이 피울 생각 하지 말고.”
그 말을 남기고서 뭐라 할 틈도 없이 내려버렸다.
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맹세컨대 돈 생각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부스럭.
열어보지는 않았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있었다.
두둑하다.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럴듯하게 말하긴 했지만 준태의 고용주는 아랑이 아닌 주원이었으니까.
평소 아랑이 제공하는 복지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이런 돈을 어떻게 받는단 말인가.
‘절대 안 받아.’
그런데 호기심은 그와 별개의 문제였다.
궁금하다.
솔직히 얼마가 들었을지 궁금하긴 했다.
슬쩍 열어서 얼마인지 확인하고 감쪽같이 닫은 다음에 그대로 돌려주는 거다.
그런 생각으로 준태가 살며시 봉투를 열었다.
“……”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봉투 속에 들어있는 건 배춧잎이 아니라 신사임당이었으니까.
***
추가수당이라기에는 말이 안 되는 액수였다.
경악한 준태가 차에서 내렸다.
중년남성과 아랑이 마주 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네, 아가씨.”
“그냥 아랑씨라고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체 뭘까.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아랑이 준태를 향해 지시했다.
“짐 옮기는 거 도와줘.”
그와 동시에 아랑은 봉고차에서 커다란 상자를 번쩍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기사가 말했다.
“제가 옮길 테니까 그냥 있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걸 보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막무가내인 건 변하지 않는다고.
잠시 봉투를 넣어두고 뒤늦게 손을 보탰다.
괜히 지금 돌려주려고 하다가 흘리기라도 하면 대참사였으니까.
준다고 바로 받을 거 같지도 않고.
‘나중에 주는 게 나아.’
확실히 돌려줄 수 있을 때 건네는 편이 나았다.
준태가 짐칸으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상자를 냅다 들어 올렸다.
“.. 뜨억.”
장난 아니게 무거웠다.
잠깐만. 그럼 이런 걸 혼자서 든 건가?
걸어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매번 키보드만 두드리는 탓에 힘쓰는 일을 안 한 지 오래였다.
척.
그런 준태를 본 건지 중년의 기사님이 상자를 인터셉트했다.
“저한테 주십쇼.”
솜털처럼 가볍게 상자를 들고서 걸어가는 기사님의 뒷모습.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준태는 열심히 일했다.
세 명이 몇 번을 오간 끝에 짐을 다 옮길 수 있었다.
“.. 후.”
짧게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귀 옆으로 쓸어내리는 아랑이 보였다.
여러 정황을 놓고 보건대 귀하게 자란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빼는 법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행동하면서도 결국 보면 항상 먼저 나서는 건 그녀였다.
‘.. 멋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아랑이 다가오더니 손에 든 물병을 건넸다.
“마셔.”
역시 직원 복지는 확실한 아랑이었다.
왜일까.
흰 봉투 안을 가득 채운 돈보다도 지금 건네받은 물병 하나가 더 값지게 느껴지는 건.
물병을 건네받은 준태가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고마워.”
***
드디어 여행 당일이었다.
저녁에 미리 싸 둔 짐을 챙겨서 연두와 함께 집을 나섰다.
아, 참.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유리를 섭외한 게 마지막이라 생각했지만 스케일이 더 커졌다.
‘우영이도 같이 가게 됐지.’
생각해 보니 우영이에게 물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녀석도 ‘스튜디오 초록’의 일원이다.
즉, 휴가 중이라는 뜻이었다.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중간고사도 막 끝났고, 주말을 끼고 다녀오는 만큼 학교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래서 물어봤다.
‘같이 갈래?’
답은 오케이였다.
내 입장에서도 우영이가 같이 가는 편이 좋았다.
아이들 보호자 역할도 해줄 수 있고, 아이들끼리 노는 동안에는 내 말동무도 되어줄 수 있으니 말이다.
말동무라 하니까 너무 아재 같은가?
“……”
갑자기 슬퍼지네.
어쨌든 우영이의 합류로 모든 인원이 결정됐다.
나열하기에는 좀 길긴 하지만 그래도 나열해보자면 이러하다.
나랑 연두, 시은이, 레나, 월이, 지우, 유리, 우영이.. 마지막으로 편집자 주아랑이었다.
왜인지 이번만큼은 편집자 말고 물주라 불러야 할 거 같은 기분이지만.
‘좋은 멤버 구성이야.’
아이들이 무려 여섯 명이다.
나 혼자라면 케어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우영이와 아랑씨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었다.
이제 걱정이 없었다.
짐을 한가득 싣고서 목적지로 향했다.
“설렌다. 그치, 연두야.”
“네에.”
배시시 웃으며 연두는 얘기했다.
“지우도 유리도 같이 가서.. 너무 좋아여……”
“하하, 맞아.”
극적인 지우의 합류로 마음의 짐도 덜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차례로 아이들을 픽업했다.
시은이, 레나, 월이, 유리, 지우 순이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지우 어머님의 말에 몇 번이고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안 다치게 잘 챙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지우에게도 인사했다.
“조심히 잘 다녀오렴.”
“으, 응! 다녀올게!”
“그래.”
왜일까.
나를 바라보는 지우의 표정이 묘하게 평소와는 달랐다.
그러다 지우는 자그맣게 얘기했다.
“아, 아저씨..”
“응?”
“.. 고맙습니다.”
꾸벅 고개까지 숙인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을 틈도 없이 아이들이 차에서 쏟아져나왔다.
유리만 빼놓고.
“지우야!”
“우와!”
“흐흣.. 지우랑 부산 같이 간다!”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서 배시시 웃음 짓는 지우.
“헤헤..”
무진장 보기 좋았다.
자기보다 격한 환영이라 그런지 유리는 혼자 차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 있지만.
아마 몰라서겠지.
지우의 극적인 합류를 잘 모르니 그럴 만도 하다.
이번 기회에 둘도 친해졌으면 좋겠네.
“좋아. 출발해 볼까?”
아이들을 전부 태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목적지로 향했다.
부릉-
얼마 후에 도착한 목적지.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려 아이들을 차례로 내려줬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데……
“.. 와.”
내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관광버스였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저게 우리를 부산까지 데려다줄 버스라는 걸.
“우아……”
“버스다!”
“아저씨! 우리가 탈 버스 맞죠!”
세상 신난 아이들.
제대로 형성되는 여행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