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192
제193화
초등학생 때였던가…?
미술 시간에 ‘밀레’라는 화가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이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인들이 이삭을 줍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아마 붉은 보리들을 줍는 지금 내 모습이 딱 그렇지 않을까 싶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인들은 손으로 일일이 직접 주웠지만 나는 세계수의 뿌리로 잔뜩 모아서 한 단씩 묶고 있다는 점이다.
많이 모아달라고 해서 모으고 있기는 한데….
이걸로 대체 뭘 할 생각이려나?
[세계수 어린나무가 남쪽에서부터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습니다.] [가까이 오는 인간들은 아는 인물들이라고 전합니다.]아는 인물들?
그렇다면 최희석과 배수현이겠군.
「관리인.」
무기가 한데 모은 적맥을 묶는 나를 부른다.
부른 이유는 아마도 새싹이와 같은 것이리라.
“누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나?」
“아니. 방금 새싹이가 가르쳐 줬어.”
「그렇군.」
“흠….”
적맥을 마저 묶은 다음 남쪽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대로, 최희석과 배수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이 닿자 최희석이 바로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군, 도운.”
“그러게요.”
“A+급 헌터가 된 걸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축하 인사를 전하는 그의 얼굴은 밝았다.
정말로 순수하게 축하하는 감정만이 담겨 있었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십여 년을 넘게 알고 지내던 백운천 놈들도 날 시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었는데….
한진환이 그와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하긴, 멀리 갈 것도 없지.
바로 옆에 있는 배수현의 표정도 곱지 않았으니까.
평소와 같다면 같은 표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린나무는 관리인을 향한 불만을 느꼈습니다.]새싹이도 그녀에게서 불만을 느낀 모양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한걸?
왜 내가 아니라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거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옮긴다.
그쪽엔… 아르카가 박혀 있었다.
뭐야, 아르카가 탐나나?
“…여기까진 그것 때문에 온 건가?”
최희석도 그녀의 시선을 느낀 걸까.
주제를 돌리고 싶은지 화두를 던졌다.
그제야 배수현은 시선을 돌려서 날 바라봤다.
그녀도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다.
이를 어쩌나.
여기까지 온 이유는 그런 게 아닌데.
“아뇨. 그냥 산책 온 건데요.”
“산책?”
“네. 열흘 넘게 집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심심해서요.”
신논현에 있는 21층 빌딩의 펜트하우스는 풍경이 좋았다.
밤만 되면 어찌나 레드 와인이 먹고 싶어지는지.
드라마에서 부자들이 온갖 무게를 잡으며 와인을 마셔대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뭐, 내 오른손엔 와인 대신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지만.
“몸이 찌뿌드드하기도 했고요.”
“…….”
“…….”
“왜요?”
“아니, 산책을 참 멀리도 왔다 싶어서.”
“드라이브도 할 겸요.”
밤 드라이브의 좋은 점은 차가 막히지 않아 내키는 대로 달릴 수 있다는 거다.
그리 달리는 차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게 무기라는 건 슬펐지만.
똬리를 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귀여웠으니 된 거지.
돌아갈 땐 그 모습 꼭 스마트폰으로 촬영해야지.
“그럼 적맥은 왜 챙기고 있는 거죠?”
“겸사겸사?”
“…….”
“홉고블린 4만 마리를 몰살한 건…?”
“기왕 온 김에?”
“…….”
배수현과 최희석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아무래도 내가 이곳까지 뭐 대단한 이유로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배수현이야 그렇다 치고.
최희석은 한진환과 친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한 건가.
“왜요?”
“아쉽게 됐네요.”
“뭐가요?”
“적맥 때문에 온 거였으면, 전문가를 소개해드릴 수 있었거든요.”
“응? 적맥 전문가가 있어요?”
“네. ‘김홍두’ 박사님이라고 계세요. 소개해드려요?”
“아뇨? 필요 없는데요.”
전문가가 있건 없건 알 바 아니다.
이걸 써먹으려는 건 홍수정이었으니까.
그녀는 적맥은 인간이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구해와달라고 한 걸 보면, 무슨 좋은 생각이 번뜩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난 그저 적맥을 건네주며 “전문가가 있다더라.”라는 말을 넌지시 해주면 된다.
필요하게 되면 그때 가서 그녀가 연락해올 거다.
“그래서요?”
“네?”
“본론이요. 여기까지 내 뒤꽁무니를 쫓아온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
“수다나 떨러 온 건 아닐 테고요.”
“그렇죠, 하하….”
얼씨구, 놀라운걸.
배수현이 미소를 지어 보일지 몰랐다.
투덜거릴 때마다 한숨을 쉬어대곤 했었으니까.
A+급 헌터가 좋긴 좋네.
가식적인 웃음을 다 흘리게 하고.
이래서 사람이 힘을 얻게 되면 자만하게 되는 거지.
“당최 만나주질 않으니 이렇게 뒤꽁무니를 쫓아올 수밖에요.”
“아시겠지만, 그동안 내가 워낙 바빴잖아요?”
이사를 네 차례나 연달아서 했다.
새싹이를 제대로 어루만져 주지 못했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배수현을 왜 만나줘야 하나.
그녀가 삼고초려 하는 유비도 아닌데.
“그래도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거래도 한 사인데.”
“거래?”
“네.”
“……?”
내가 배수현과 거리를 한 적이 있던가?
그런 거 한 적 없지 않나.
내 기억력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원.
새싹아.
우리 배수현이랑 거래한 적 있어?
[어린나무는 없다고 전합니다.]뭐야.
새싹이가 없다면 없는 건데?
“내가 당신과 거래를 했어요?”
“아니요. 정확히는 성녀님과 했죠.”
“도희랑…?”
“네. 백도운 헌터가 어떻게 A+급 헌터가 됐다고 생각해요?”
“무기와 친구가 돼서잖아요. 아, 맞다. 깜빡했네. 인사해야죠? 무기야.”
「…….」
무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사하고 싶지 않은 건가?
싶을 때쯤, 무기는 투구의 구멍 난 부분으로 빠져나갔다.
완전히 빠져나가진 않았다.
머리만 빼꼼 내밀곤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들 하신가.」
“반갑…다. 난 최희석이라고 하네. 아. 악수는 못 하겠군.”
최희석은 손을 뻗었다가 바로 거뒀다.
이무기에게 악수를 청하다니, 미친 건가.
무기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한테서는 문지기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군.」
“문지기?”
“아, 태천이를 말하는 겁니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그렇군. 흠. 비슷한 냄새?”
킁킁.
최희석은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자신에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고 싶은 듯했다.
무기가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닌데 말이다.
기질(器質)…이라고 해야 할까?
태천이와 최희석은 그게 닮았다.
무기가 바라보자 배수현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곤 고개를 숙였다.
“흠, 흠. 안녕하세요. 백무기 님. 전 A급헌터관리부 국장 배수현이라고 합니다.”
「고생이 많아 보이는군.」
“네?”
「걱정하지 마라. 더 방해할 생각 없으니.」
“……!”
배수현의 눈이 커졌다.
왜일까?
그녀는 감동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노고를 알아봐 준 이를 만나 기쁜 것 같달까.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무기 님은 말씀이 통하시는 분이시군요.”
「혹시, 조언을 하나 해줘도 되겠나?」
“그럼요, 듣겠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쪽 손해일 테니까.」
“아아….”
배수현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뭐야, 우나?
싶어 바라보자, 그녀는 바로 손을 내렸다.
울진 않았지만, 여전히 감동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음, 음.」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배수현.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이는 무기.
“…….”
뭘까.
이 대화는.
주체가 되는 게 분명 나인 것 같은데.
그래서 기분이 몹시 나쁜데.
왜 화를 내면 안 될 것 같지?
배수현이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도운 헌터가 무기 님과 친구가 돼서 A+급 헌터가 된 건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원래라면 테스트를 치른 후에 책정됐을 거예요.”
“아.”
확실히….
난 테스트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자격증을 발급받았었다.
막연하게 무기와 친구가 돼서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정부와 협회가 그렇게 해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새로운 A+급 헌터의 탄생을 널리 공표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테스트를 치르길 바랐을 거다.
그러지 않고 바로 발급해줬다는 건, 도희와 모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이겠지.
도희가 그런 거래를 한 건 나를 위해서였을 테고.
목적은… 뻔하다.
크라우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내가 A+급 헌터란 것이 확실시되면 정부와 협회가 날 주시할 테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제 욕망이 가장 중요한 크라우드는 뭉치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게 될 터.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그럼. 이제 거래에 관해 얘기해 볼까요?”
“그러시죠.”
[?????] [어린나무가 의문을 느낍니다.] [관리인이 왜 거래를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고 전합니다.]응? 왜?
내가 거절할 줄 알았어?
[어린나무는 그럴 줄 알았다고 전합니다.] [이어 울릉도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킵니다.] [관리인은 뇌물 받을 때 “들어 줄 보장이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그거야 내가 받은 거였잖아.
배수현이랑 거래를 한 건 도희고.
곽형원이 요구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내가 욕을 먹겠지만, 이번 거래에 응하지 않으면 도희가 욕을 먹게 돼.
난 그거 싫어.
[…….] [어린나무는 관리인을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습니다.] [이어 백무기가 한 말에 공감한다고 전합니다.]무기가 한 말?
어떤 걸 말하는 건지-
“여기요.”
불쑥.
배수현이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간신히 들린 서류 뭉치는 수백 장은 족히 될 것 같았다.
건네받으면서 이것들이 다 뭔지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세계 각지에 있는 A+등급 퀘스트를 추린 거예요.”
“아. 이것들을 해결해 달라는 거군요?”
“네.”
“근데, 이걸 다요?”
“설마요. 제가 그렇게 양심 없어 보이세요?”
“아하하.”
웃어 보이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손을 들었다.
활짝 펼쳐져 손바닥이 훤히 보이는 손을.
“그중 딱 다섯 건만 해결해주십시오.”
“다섯 건이요?”
“네.”
“흐음….”
“물론, 백도운 헌터가 퀘스트를 진행하시는 동안 정부와 협회가 최대한 지원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최대한이라고 해봐야 활동비 정도잖아요.”
내가 정부와 협회를 모르나.
손해 볼 장사를 할 리가 없는 걸 뻔히 아는데.
조금만 손해 볼 것 같으면 퀘스트고 뭐고 하지 말라고 하겠지.
배수현은 말없이 싱긋 웃었다.
웃기는.
정곡을 찔렸나 보지?
“뭐, 좋아요. 받아들이도록 하죠.”
“네? 정말요?”
흔쾌히 수락한 게 그리 놀랄 일일까.
배수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건수 안 깎고요?”
“네.”
“왜요?”
“왜냐니….”
손에 쥐어진 서류뭉치를 흔들었다.
전 세계의 A+등급 퀘스트들이 팔랑거렸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
「흠, 흠.」
조용히 있던 무기가 헛기침을 해댄다.
그러자 배수현은 “핫…!”하곤 무기를 바라봤다.
그녀는 시선이 닿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저 선생님을 바라보는 학생 같은 얼굴은.
“도운. 정말 괜찮겠나? 잘 생각하고 결정하게.”
최희석이 끼어들었다.
배수현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듯 검지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물론, 아파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찔러댄 배수현이었다.
그녀는 아픔을 날려 보내려는 듯 검지를 흔들었다.
“A+등급 퀘스트는 그만큼 위험한 일들뿐이네. 재미있는 일들 하곤 거리가 멀어.”
“당연히, 몇 가지 조건이 있긴 하죠.”
“앞서 말씀드렸듯 정부와 협회가 지원해드릴 수 있는 건 뭐든 해 드리겠습니다.”
지원해드릴 수 있는 건 뭐든, 이라….
정부와 협회는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
그 뜻은.
손해 보는 장사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한다는 뜻이다.
도희와 한재임에게 이걸 말해주면 좋다고 밀당하며 필요한 걸 뽑아내겠지.
그런 귀찮은 일은 두 사람에게 일임하고, 난 내 즐길 거만 즐기면 되는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수락의 뜻을 내비쳤다.
최희석도 생각을 더 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
거래가 순순히 끝나 만족스럽게 웃던 배수현이 날 바라봤다.
할 얘기 더 있나?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