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193
제194화
“제안이요?”
“네.”
나한테 제안할 게 뭐지?
가만히 쳐다보자, 배수현은 말을 이었다.
“아까 백도운 헌터가 홉고블린을 사냥한 모습을 세상에 공개하고 싶습니다.”
“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고개를 돌려 홉고블린의 성을 바라봤다.
아니, 이젠 성이라고 부를 수 없겠다.
폭삭 무너져서 성터만 남아 있으니까.
솔라빔을 쏜 모습을 공개하고 싶다, 라….
“별로 공개하고 싶지 않은데요?”
“이해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대답할지 예상한 거다.
아마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을 테지.
비단 나만 이러는 것도 아니니.
대부분의 헌터들은 자신의 힘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꺼린다.
자신의 패(牌)를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왜요?”
“이미지 때문입니다.”
“이미지요?”
“네.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백도운 헌터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안 좋다고요? 왜요?”
나 또 뭐 했나?
아니, 이번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한 거 없노라고.
울릉도에서 다녀온 후로 이삿짐만 열심히 날랐으니까.
살면서 도희의 말을 가장 잘 따른 열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얌전히 지냈다.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 동생을 동정합니다.] [관리인에게 동생의 말 좀 듣길 조언합니다.]어허.
지금 동정해야 하는 건 나 아니니?
세상 어떤 오빠가 동생 말을 이렇게 잘 들어.
[어린나무는 관리인은 관리인 동생의 말을 좀 들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응, 아니야.
“테스트도 없이 바로 A+급 헌터 자격증을 발급받았기 때문입니다.”
“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자격증을 발급했다는 말이 돌고 있죠. 특히, 일본이 그런 스탠스로 언론 플레이를 열심히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이 ‘세계 헌터 협회’에 로비했다는 둥 지껄여대면서.”
“하여간 일본 놈들. 매번 로비하는 건 자기들이면서….”
“물론 우리 정부는 그 주장에 대해 열심히 반박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영상도 그 일환으로 공개하고 싶다는 거고요.”
“도운. 협회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영상을 공개하는 쪽으로 생각해줬으면 하네. 이 영상이 공개되면 단번에 여론을 뒤집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일본놈들 입을 한 방에 다물게 할 수 있겠죠.”
「나도 찬성이다, 관리인.」
조용히 보고 있던 무기가 끼어들었다.
찬성이라….
“넌 왜?”
「관리인의 실력을 의심하는 놈들이 있다는 거잖나? 감히.」
“뭘 또 ‘감히’라고….”
「난 그 꼴을 두고 보고 싶지가 않다.」
“무기 님 말씀이 맞습니다. 일본의 언론 플레이에 동조하는 국가들이 제법 많아요. 백도운 헌터를 의심하고 얕보고 있죠. A+등급 자격을 철회해야 한다면서.”
배수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도와줄 사람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의심하고 얕보고 있다, 라….
“어차피 오래 못 갈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어요?”
“오래 못 갈 거라고요?”
“네.”
“어째서죠?”
“잊었어요? 이거요.”
설명해주는 대신 손에 쥔 서류뭉치를 흔들었다.
A+등급 퀘스트가 정리된 종이들이 팔랑거렸다.
배수현은 그걸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아!’ 소릴 냈다.
“이해했습니다. A+등급 퀘스트를 해결하다 보면, 그런 의심 따위 자연스럽게 불식되겠죠.”
“바로 그거예요. 이쪽이 더 세련되기도 하고요. 일본 놈들이 여론몰이한다고 발끈해서 힘쓰는 영상 같은 거 공개하면 좀 촌스럽잖아요?”
“네, 그건 백도운 헌터 말씀이 맞네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을 인정한 것이다.
허,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한두 번 정도는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할 줄 알았더니….
최희석도 그렇게 생각한 듯 눈썹을 살짝 치켜뜬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돌아보며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확실히…. 그럼, 세련된…. 그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려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들린 단어들로 추측해보자면, 영상을 공개하는 게 촌스러운 방식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같다.
아마 세련된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겠지.
“…아, 맞다. 선배.”
“음?”
“줄 거 있습니다.”
“줄 것?”
“이거요.”
인벤토리에서 포션 4병을 꺼냈다.
그는 포션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가?”
“포션이에요. 중급 포션.”
“중급 포션? 아, 혹시 그건가? 이번에 수정 공방에서 만들었다는.”
아뇨.
엘프들이 만든 겁니다.
“네, 그거 맞습니다.”
“이걸 왜 나한테?”
“좀 받아서요. 지인들한테 나눠주고 있습니다. 2병은 한 선배 전해주세요.”
“그렇군…. 고맙네. 아껴 쓰도록 하지.”
“중급 포션인데 아껴 쓰긴 뭘 아껴 써요. 팍팍 써요. 또 싸게 팔아드릴게.”
“음? 마치 도운 군이 포션 주인인 양 말하는군.”
“네?”
이구.
최희석은 모르지, 참.
“그러니까, 그, 지인의 지인 찬스…란 거죠! 하하!”
“지인의 지인이라….”
그는 씨익 웃었다.
저 징그러운 웃음은 뭐람.
진짜 중년 아재 같네.
지인의 지인이라 지인의 지인이라고 한 건데.
“A+급 헌터라고 해도, 아직 젊군그래.”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네.”
“…….”
들을 생각도 없구만.
말해 봐야 소귀에 경 읽기지.
알아서 생각하라고 하고 넘겨야겠다.
최희석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적맥을 바라봤다.
바람에 휘날리는 적맥은 마치 붉은 파도처럼 보였다.
무턱대고 너무 많이 벴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했으니 챙겨가면 좋긴 할 텐데….
“…….”
“싫네.”
“아직 입도 안 뗐습니다.”
“필요한 이유를 말해주면 돕지.”
“…혼자 하겠습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해주지.
듣지도 않고 그냥 와서 아는 게 없는걸.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게.”
“네? 안 가세요?”
“가고 싶기는 한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옆을 가리켰다.
배수현이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걸까?
표정이 제법 밝았다.
그에 반해,
“이 많은 걸 언제 다 챙긴담.”
파도처럼 휘날리는 적맥을 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움직이자, 움직여.
안 움직일수록 시간만 가니까.
***
까앙, 까앙….
대장간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내 목에 둘린 무기가 말했다.
「일하고 있나 보군. 부지런할걸.」
“일할 시간인데, 뭐. 벌써 아침 10시라구.”
「그런 말은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하는 거다, 관리인.」
“이거 왜 이래. 나도 성실히 일해.”
그리 말하자, 무기가 날 빤히 바라봤다.
날 보는 무기 옆으로 새싹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줄임표 메시지를.
그 모습이 꼭 무기의 말풍선인 것처럼 보였다.
너희 둘 나 모르게 짰니?
“…갑옷이나 놓고 가야겠네.”
「그게 좋을 것 같군.」
조심스레 대장간 문을 열었다.
문은 원한 대로 조용히 열렸다.
하지만….
“…왔어?”
망치 소리가 멈췄다.
대신 더운 열기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오른손엔 귀수산 망치를 왼손엔 집게를 쥐고 있었다.
집게엔 둥글고 조그마한 것이 들려 있다.
반지인가?
“어떻게 알았어?”
“시원해져서.”
“시원…? 아.”
뭔지 알겠다.
여름철에 느껴본 적 있다.
문을 열 때 바람이 들어와 순간적으로 시원해지는 걸 말한 거다.
그녀의 앞으로 걸어가 양파 갑옷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잘 썼어.”
“투구 깨졌네?”
“미안. 홉고블린 로드가 갑자기 튀어 나와서….”
“안 다쳤어?”
“멀쩡해.”
“그럼 됐어.”
깡, 깡.
그녀는 투구를 두들겼다.
뭔가 목적이 있어서 두들기는 건 아니었다.
심심할 때 손가락으로 아무거나 두들기는 것과 비슷했다.
내 오른손 검지와 같은 일을 하는 거다.
“적맥은?”
“구해왔지. 수정 씨는? 돌아갔어?”
“아니. 저기 있어.”
그녀가 가리킨 곳을 돌아봤다.
모퉁이에서 자는 홍수정이 보였다.
망치질 소리가 시끄러웠을 텐데 잘도 자네.
“왜 여기에서?”
“당신 기다리다 잠들었어.”
“날?”
“아, 정정. 무기 씨 기다린 거다.”
“그럼 나중에 깨워도 되겠네.”
「좋은 생각이다, 관리인.」
“후후….”
유재이가 무기를 보며 웃었다.
나도 무기가 귀여워서 턱이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어졌다.
그러려고 손들면 후려쳐서 만지지 못하게 하겠지만.
“그런데.”
“응?”
“지금 만들고 있는 거 뭐야? 반지?”
“아, 이거?”
유재이는 집게를 들었다.
둥글고 조그마한 것…은 확실히 반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당신 친구가 부탁한 거야.”
“태천이가?”
“어.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던데.”
“반지와 목걸이? 뭐야. 얘 여친 생겼나?”
[어린나무가 두근거림을 느낍니다!]“아니, 그런 거 아니야.”
유재이가 집게를 휘저으며 부정했다.
그러자 새싹이가 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린나무는 시무룩함을 느낍니다.] [설렜던 마음을 보상해주길 요구합니다.]하하, 우리 새싹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네.
“길드 전용 장비를 만들고 싶대.”
“유니폼이라도 만들고 싶다는 거야? 촌스럽게시리….”
“촌스럽지 않으려고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어달라는 거겠지?”
“아….”
“귀엽던데. 노력이 가상하고.”
“흐응….”
귀엽다라….
태천이가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엽기는 하지.
그 순간,
“후후후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장간 모퉁이에서.
그렇다.
웃음소리의 주인은 홍수정이었다.
무슨 잠꼬대를….
아니, 잠꼬대가 아니다.
홍수정은 우릴 보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 때문에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고개가 우릴 향해 있어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요. 무기 님 목소리가 들려서요.”
“…….”
“…….”
「…….」
그런 거로 깨지 마라, 좀.
이건 뭐 변태도 아니고….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무기는 나만 들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홍수정 때문에 우리 무기가 고생이 많네.
“생각보다 늦게 오셨네요.”
“적맥 양이 많아서요. 어디다 놓을까요?”
“공방에요.”
“그럼 바로 갈까요?”
“넵.”
홍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잠결인지 몸을 살짝 휘청거렸다.
유재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넘어질까 봐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다행히 그녀가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홍수정은 제대로 일어나 걸었다.
“재이야, 점심때 다시 올게!”
“귀찮아. 오지 말고 일해, 일.”
“싫어. 올 거야.”
“후우….”
유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그렇게 귀찮은 사람이 걱정돼서 몸을 움찔거리나?
“갈까요…!”
“그럴-”
스마트폰의 알람 소리가 내 대답을 끊어냈다.
화면을 보니 새싹이 위로 ‘이성훈’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얜 아침부터 왜 전화질이야?
“잠깐만요.”
“아, 네.”
홍수정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왜?”
–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성훈이 소리를 질러댔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 내가 부탁했잖아요!
“뭐?”
– 일 벌이지 말라고!
“……나 일 안 벌였는데?”
– 웃기지 마요! 그럼 방금 그 텀은 뭔데요! 짚이는 게 있는 거잖아요!
“안 벌였다니까! 아마도.”
– 하아….
“왜 그러는데?”
– 정말 몰라요?
“진짜 몰라. 이럴 시간에 설명을 해, 인마.”
– 설명은 무슨. 그냥 직접 보세요.
“뭐?”
– 왓쳐 캐스트 보시라고요. 실시간 인기 동영상 1위에 팀장님 올라가 있으니까!
뚝.
이성훈은 전화를 끊었다.
왓쳐 캐스트를 보라고?
“왜 그래? 무슨 일 생겼어?”
“몰라. 왓쳐 캐스트를 보라는데?”
“왓쳐 캐스트?”
유재이와 홍수정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각각 검지와 엄지로 화면을 두드렸다.
나도 왓쳐 캐스트를 실행한 후 바로 실시간 동영상 랭킹을 확인했다.
맨 위에 뜬 영상 섬네일에 익숙한 투구가 보였다.
양파 모양을 한 투구다.
나 맞네.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4만의 시체…백도운 학살의 현장 충격 중계!]제목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