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03
제505화
“백도운. 그놈은… ‘아무것도 아닌 놈’이다.”
분노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같은 방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는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감상을 듣고자 했던 서지혁도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있었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최기정이 분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질문은 들은 빌리스가 바로 최기정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감히 자신의 보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태도까지 불손하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전명환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기정을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빌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부릅뜬 눈으로 꼬나봤다.
‘죄악의 천칭 길드’라는 이름으로 세 세력이 합쳐진 지 2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도 서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세계수….”
서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연히 최기정과 전명환이 그를 바라봤다.
“관리인이 되지 못했다면, 별것 아닌 놈에 불과했을 거라는 뜻인가?”
“아니. 그런 뜻으로 한 소리가 아니다.”
“그럼?”
“오히려 반대지.”
분노는 제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스윽….
도운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므렸던 손가락을 천천히 펼쳤다.
꽉 쥐었던 힘이 풀렸기 때문일까?
덜덜 떨렸던 오른손이 멈췄다.
아주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분노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무엇이든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금 ‘무엇이든’이라고 했나?”
“그래. 그렇게 말했다.”
“흠….”
서지혁이 흥미로운 듯한 숨을 내쉬었다.
고민에 빠진 것처럼 눈빛이 조금 흐릿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생각이 정리된 그가 바로 질문을 이었다.
“즉, 백도운은 운(運)이 좋았다는 소린가…?”
“나는 우연한 일 따위 믿지 않는다.”
“운명(運命)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운명? 흐…!”
분노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서지혁을 비웃는 것으로 여긴 최기정과 전명환이 눈망울을 사납게 굴렸지만, 정작 서지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분노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
“……”
그 때문에 분노를 노려보던 두 사람만 뻘쭘해졌다.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던 전명환이 최기정에게 속삭였다.
“형님…. 운이니 운명이니. 뭔 소리인지 아시겠나?”
“모르겠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아. 형님도 못 알아들으신 거구만?”
“…입 다물고 있으라는 말이 어려웠냐?”
그리 말하면서 최기정은 빙긋 웃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입가에 미소만 지은 얼굴은 전명환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이 쓸모없는 속삭임을 나누고 있을 때,
“…운명보다는 누군가가 개입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서지혁이 기다리던 다음 말이 이어졌다.
분노는 여전히 제 오른손만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세계수 관리인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개입이라니….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명 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알량한 재주로 ‘운명의 여신’이라도 되는 양 굴어대는 마녀가.”
“그런 마녀가 있었다고….”
서지혁은 중얼거리면서 나태를 바라봤다.
그녀가 그가 알고 있는 마녀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펄럭….
그의 시선을 가로막듯이 리넨이 앞치마를 들어 올렸다.
“오해다, 리넨. 그녀가 그랬다고 생각할 리 없지 않나.”
“…….”
오해라는 말에도 리넨은 앞치마를 내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리넨은 서지혁이 나태를 오해할까 걱정되어 앞치마를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주인에게 닿는 것이 싫고 꺼림칙해서 차단한 것뿐이었다.
그런 리넨이 재미있어 웃고 있던 서지혁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어떠한 사실을 깨닫고선 아연한 얼굴을 지은 것이다.
“미래를 보는 마녀가 백도운의 삶을 바꿨다면….”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군.”
“설마, 천공의 삶도?”
“겨우 그 둘뿐이겠나?”
“아아….”
서지혁은 분노의 말에 수긍했다.
백도운과 이태천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랐고, 그들이 창립한 백운천 길드엔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A급 헌터들이 열 명이 넘게 있었다.
그들 모두의 삶에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대체 그 마녀가 누구기에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음욕의 마녀.”
“칠죄종? 하지만 그녀는 10년이 넘도록 활동을… 아.”
“그야 활동할 수 없었겠지. 그런 놈들을 키워내고 있었으니 말이야.”
“좋지 않군….”
서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도운이 누구인가?
블랙 드래곤을 토벌하는데 핵심 전력이 된 인간이다.
같은 S급 헌터 셋을 압도하면서 명실상부한 최강의 자리에 올랐었던 에디탓 그위친보다도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헌터다.
그런 백도운을 음욕의 마녀가 키웠다니, 서지혁으로서는 강렬한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것이다만, 그 마녀의 성격은 어떻지?”
“어리석은 질문이로군. 정상적인 사고를 할 거라고 기대하나? 그랬다면, 칠죄종의 한 자리를 차지했을 리도 없지.”
“…….”
“음욕은… 남을 이용하는데 서슴없는 여자다. 자기가 키운 녀석들이라고 다르길 바라는 건 너무 희망찬 생각일 테지.”
“이런….”
서지혁이 낭패감을 드러냈다.
백운천을 등에 업은 음욕의 마녀.
그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피어났다.
선을 넘은 지 오래된 그였는데도 선 안쪽의 세상이 염려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은 크나큰 오해였으나…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대화 중에 실례합니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리넨이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가 곧바로 아래로 향했다.
리넨이 입을 열 때는 그녀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인 나태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리넨의 앞치마로 가려져 있었기에 나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주인님께서 천칭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하십니다.”
“나한테? 그게 뭔가?”
“주인님께서는 왜 하필 이곳 오키나와섬에 자리를 잡은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뭐?”
“그 쓸모없는 귀는 이제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겁니까? 주인님께서는-”
“아니. 들었다. 들었는데….”
서지혁이 리넨의 말을 끊어내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나태의 기분이 나빠질까 걱정된 탓이다.
“헐…. 그걸 이제 묻는다고?”
그런데 바로 그 생각을 전명환이 중얼거렸다.
서지혁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전명환이 말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전명환이 두 팔을 벌려 호텔을 가리켰다.
“우리가 여기 점거한 지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는데?”
“…….”
“황당하네. 최면 마법까지 직접 써가며 점거할 땐 아무것도 안 물어보더니만….”
“…….”
전명환의 중얼거림에도 리넨은 서지혁만을 응시했다.
대답이나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고, 서지혁은 어깨를 으쓱여 대답했다.
리넨의 앞치마에 가려진 나태를 바라보면서.
“한국과 가까워서 골랐다.”
“뭐라고요?”
“대마도는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니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겨우 그딴 이유로 이곳을 점거했었다는 겁니까? 다른 요건 없이?”
“그렇다만. 안 되는 건가?”
“하, 정말이지….”
홱!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리넨이 고개를 돌려 나태를 바라봤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보니,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나태가 한 것이 분명했다.
호기심이 당긴 서지혁이 바로 물어보았다.
“왜 그러지? 나태가 뭐라고 말했기에-”
“닥치십시오.”
“어, 뭐라고?”
“주인님께서는 당신에게 닥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글쎄.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만?”
서지혁은 리넨의 말을 믿지 않았다.
리넨의 행동이 평소와 달랐으니 믿을 리가 없었다.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태가 뭐라고 했기에 그러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거 같은데? 그것도 나한테.”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다만.”
“크윽….”
부르르!
앞치마를 쥔 리넨의 두 손이 떨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지혁에게 달려들고 싶은 듯이 보였다.
그녀의 주인에게로 향하는 서지혁의 시선을 차단해야 한다는 사명이 없었더라면, 죽일 생각으로 달려들 가능성도 농후했다.
“…….”
옆에서 아웅다웅하거나 말거나.
분노는 제 오른손만을 응시했다.
콱!
더는 떨지 않는 오른손을 힘차게 오므린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를 움켜쥔 분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기대하고 있으마, 백도운….”
***
모르겠다.
두 번 세 번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킹사이즈 침대에서 재이가 곤히 잠들어 있는 이 상황을 과연 무슨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
불행?
아니면 불행 중 다행…?
정말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럽다.
“응, 으응….”
그러던 순간이었다.
재이가 꾸물거리더니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얘는 왜 자면서 회오리 감자가 되려고 하는 거람.
[세계수가 관리인을 방긋방긋 바라봅니다.] [지금 당장 재이 곁에 살포시 눕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합니다.]그거 조언 맞아?
새싹이 네가 보고 싶은 거 아니고?
내가 재이 옆에 뻘쭘하게 누워서 밤새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세계수가 그렇지 않다며 나뭇가지를 가로젓습니다.] [순수하게 관리인과 재이가 함께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라고 전합니다.] [관리인을 방긋방긋 바라봅니다.]얼씨구.
누가 내 동생 아니랄까 봐 거짓말이 자동으로 나오는 것 좀 봐.
그렇게 방긋방긋 웃고 있는데 형이 믿겠냐?
“백도운….”
“……!”
뭐야.
나 때문에 잠에서 깼나?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 재이를 바라봤다.
흰 이불과 물아일체의 경지로 회오리 감자가 된 재이는….
“으응…”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렀던 건 아무래도 잠꼬대였던 모양이다.
얘는 왜 자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그래?
꿈에서 내가 나오기라도 했나?
그건 좀 설렐지도….
“오면, 죽여버릴 거야….”
“…….”
설렌다던 말은 취소해야겠네.
아니, 살해당하기 전에 방에서 나가는 게 좋겠어….
서두르자.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절레절레 휘젓습니다.] [관리인의 바보 같고 멍청하고 어리석음을 개탄(慨嘆)합니다.]저런, 저런….
평생 들어왔던 말이라서 아무렇지도 않은걸?
[세계수가 관리인을 못마땅해 흘겨봅니다.]우후후….
형은 그런 시선도 익숙하단다!
새싹이의 투덜거림을 처절하게 반박하며 방을 빠져나온다.
탁.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복도를 걸으면서 심도 있는 고민을 시작했다.
천칭 놈들을 쥐어팰까.
앨릭스 협회장을 쥐어팰까.
어느 쪽을 골라야 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해소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세계수는 선택을 전적으로 관리인에게 맡긴다고 전합니다.] [그보다 관리인에게 당장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관리인을 안 그런 척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고 덧붙입니다.]들러야 할 곳?
기다리는 이들?
“아, 설마….”
새싹이가 말한 장소가 어디인지 곧 깨달았다.
하루에 몇 번이고 보는 곳이건만, 왜 이제야 떠올렸는지 스스로도 황당하다.
슥….
호텔에서 빠져나온 후 스마트폰 들어 화면을 바라본다.
화면 속에 보이는 성역에선 레디투스 숲의 엘프들이 파티를 하고 있었다.
이번 토벌에 대해 새싹이에게 전해 들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세계수는 지금이라도 가면 된다고 조언합니다.]그래, 아예 가지 않는 것보단 늦게라도 가는 게 낫지.
톡.
새싹이의 말에 동의하며 화면의 성역 버튼을 두드렸다.
그러자마자 시야가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