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05
제507화
내 발은 성큼성큼 차원막을 통과했다.
부드러웠고 거리낌은 없었다.
“오….”
그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입에서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탄성과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창들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메시지를 읽었다.
[세계수 관리인이 위그드라실에 진입했습니다.]짧은 한 줄의 메시지엔 별다른 미사여구가 없었다.
‘진입했습니다’라고, 그저 사실을 담담하게 설명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 담백한 설명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줬다.
그러니 내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관리인님….”
레지나도 그랬나 보다.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감격이 묻어났다.
또 감동한 마음이 날 바라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저러다가 넘쳐서 흘러내리겠는데?
그리 생각했을 때,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눈물을 빠르게 훔쳤다.
“아이, 갑자기 왜 눈물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녀가 그러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세계수 관리인이 이 세상에 다시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습….
그 모습을 그녀와 다른 엘프들이 얼마나 고대해왔을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을 엘프들의 새로운 기념일로 지정한다고 해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톡톡.
붙잡고 있는 레지나의 손을 토닥였다.
괜찮으니 더 울어도 된다는 뜻에서 한 행동이었는데….
“으음…!”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듯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결국 우는 것을 참아냈다.
뭘 또 저렇게까지 참는 건지, 손을 토닥이던 손이 머쓱해졌다.
아, 맞다.
레지나는 평범한 엘프가 아니라 공주님이었지.
다른 엘프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러고 보면….
“오오!”
“관리인님이 위그드라실에…!”
“드디어!”
“기쁜 일이 함께 찾아오다니!”
저렇게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엘프들 사이에서 파트리아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공주님이라는 이유로 눈물을 참는 레지나처럼 장로로서 점잖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인간이나 엘프나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은 다 똑같군.
기쁘면 그냥 기뻐하면 될 일인 것을….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위그드라실에 진입했다는 메시지에 이어 떠오른 것은 현재 상태에 관련한 것이었다.
[현재 위그드라실은 마족 ‘아바돈’에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아바돈의 권세(權勢)’로 인해 위그드라실 내에 존재하는 온 생명체는 모든 능력치가 하락하게 됩니다.]아….
어쩐지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블랙 드래곤과 싸웠던 여파가 쌓여 컨디션이 안 좋아진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아바돈의 ‘권세’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블랙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을 때와 감각이 같은 것도 같고….
그렇다면 모든 능력치가 열 배 정도 낮아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이런 곳을 돌아다녔다니….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네요.”
“네?”
“여기, 마족 놈 때문에 모든 능력이 하락하잖아요.”
“앗…. 설마 관리인님의 능력까지 하락했어요?”
레지나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내 능력이 하락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전대 세계수 관리인인 디싱 나 토르는 아바돈의 권세에서 자유로웠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만큼….
“제가 부족한 탓이죠.”
“네? 아, 아뇨! 그런 뜻으로 질문드린 건 아니었는데요…!”
“하하. 사실인걸요, 뭐.”
“으으….”
레지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해 자신을 탓하는 것 같다.
그럴 필요 없는 일인데….
방금 말했듯이, 아바돈의 권세에 영향을 받은 건 내가 부족한 탓에 불과했다.
앞으로 더 성장해 디싱처럼 아무 영향도 받지 않게 되면 될 일이다.
“…관리인님 말씀이 맞아요. 다들 엄청 많이 힘들어했었어요.”
레지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했던 말에 대답했다.
그러면서 위그드라실을 찬찬히 돌아봤다.
황폐한 황무지 같은 이곳에서 엘프들은 한 걸음 발을 내딛는 것조차 고된 일이었으리라.
심지어 소중한 이들과 삶의 터전을 잃은 후 계속 돌아다녔으니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어려웠겠지….
“성역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다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그랬군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타이밍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타이밍이요?”
“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장로님을 제외하면 다들 눈에서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거든요. 마치 어둠에 물드는 것처럼요.”
“아아….”
그야 그렇겠지.
크라우드가 아바돈의 마나로 만들어낸 ‘들끓는 어둠’….
그것은 보고만 있어도 사람의 아픈 점을 파고들어 절망에 빠뜨렸었다.
위그드라실에 펼쳐진 놈의 권세가 비슷한 짓을 하면 했지 다른 성질을 띄진 않을 거다.
그런데… 내 착각인가?
레지나가 아까부터 “다들”이라면서 삼인칭으로 표현한 것 같은데.
자신은 권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다 이것 덕분이에요.”
내가 의문을 품은 것을 눈치챈 걸까?
그녀는 제 목에 걸린 성역의 열쇠를 감싸 쥐듯 들어 내밀었다.
“그 열쇠 덕분이라고요?”
“네. 이걸 목에 걸고 있으면 능력이 하락하지 않아요. 정신도 맑게 유지되고요.”
“아아, 과연….”
성역의 열쇠는 디싱의 송곳니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드래곤 로드의 송곳니로 만든 목걸이라는 뜻이다.
아바돈의 권세라고 해도 열쇠의 소유주 하나쯤은 영향을 받지 않게끔 충분히 지켜낼 수 있었으리라.
레지나의 타이밍이 좋았다는 말도 그렇고….
아마 디싱은 이렇게 되는 미래를 알고서 나름의 배려를 한 것 같다.
그런데 만들 거면 좀 여러 개 만들어서 주면 안 되나?
아니면 주변인들도 권세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준다거나.
“우후후.”
“…….”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쳤다.
레지나가 흐뭇한 얼굴로 열쇠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어서다.
저런 얼굴을 한 엘프 앞에서 굳이 불편한 진실을 말해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겠지.
그리 생각했는데….
“여러 개 만들어서 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요.”
“앗….”
“혹은 주변에 있는 이들도 보호해준다거나?”
레지나가 생각으로만 그쳤던 것을 스스로 말했다.
미소를 지은 채로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도 그동안 나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원래 토르 님께서는 이런 걸 만들어서 주시는 분이 아니세요….”
그럴 것 같았다.
디싱이 누구인가.
드래곤 로드인 주제에 세계수 나뭇잎을 미용품으로 만들어 판매했을 만큼 수전노다.
그런 양반이 남에게 무언가를 건넨다는 건 절대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닌 법이다.
“이 열쇠를 직접 만들어서 건네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죠.”
“아아….”
이건, 그러니까 그거다.
평소 인색하게 굴던 사람이 뭐 하나 잘해주면 ‘사실 마음이 따듯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한재임이 보육원에서 생활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곧잘 하던 짓이라서 잘 안다.
특히 성실하고 어른스러운 척해서 아이들의 용돈을 관리하게 됐을 때였을 것이다.
놈은 지나치게 박하게 굴며 용돈을 허락하지 않다가, 꼭 한 번 필요할 때 융통성 있는 척 인심 쓰는 척 건네주어 이미지를 관리했었다.
실상은 지도 용돈 받고 생활하던 주제에 말이다.
“저, 관리인님….”
“네?”
“저희 이만 돌아가요.”
“돌아가자고요? 벌써?”
의아한 마음이 들어 바로 되물었다.
조금 더 위그드라실을 돌아보길 원할 줄 알았는데….
레지나는 내가 건너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흡족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에 뿌리 내리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이 메시지 때문이었다.
뿌리 내리기를 사용할 수 있는데, 왜 만족스럽지 않으냐고?
왜냐하면, 저 메시지창 아래에 이런 내용의 주의가 적혀 있는 탓이었다.
[주의! 뿌리 내리기를 통해 세계수를 위그드라실에 이식(移植)하면 성역이 통합됩니다.] [또한, 한 번 위그드라실에 이식하면 다른 차원으로는 이식할 수 없습니다.]페널티가 커도 너무 컸다.
성역이 어떤 곳인가?
전대 세계수가 새싹이를 성장시키기 위해 만든 차원이었다.
성역의 열쇠와 레지나가 없다면 절대로 진입할 수 없는 안전 구역이기도 했다.
그런 성역을 없애는 것은 큰 이점을 스스로 버린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 아바돈을 찾아가 죽이기라도 한다면 또 모를까….
성역을 위그드라실에 통합하면서까지 새싹이를 이식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대 세계수도 그걸 바라고 있지 않을 거다.
전대 세계수는 아마도….
“관리인님…?”
물에 잠긴 듯 레지나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눈동자를 굴려 바라보니,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날 보고 있었다.
이런….
가만히 서서 상념에 빠졌던 시간이 좀 길었나 보다.
괜한 걱정을 하게 한 것 같다.
그저 전대 세계수가 뭘 계획하고 있는지를 추측해냈을 뿐인데 말이다.
“괜찮으세요?”
“아. 난 괜찮아요. 그냥….”
“그냥…?”
“그냥, 돌아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인사요?”
“네.”
그리 대꾸하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내 검지를 본 레지나가 재빠르게 덥석 붙잡는다.
그러고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붕붕!
“하지 마세요!”
“하지 말라고요?”
“네!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좋아요. 안 할게요.”
이유도 듣지도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자 레지나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귀여워라.
“어? 그러시겠다고요?”
“네.”
“……?”
레지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보는 시선에서 못 미더운 마음이 느껴져 조금 서운했다.
성역에서 만나 어울린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본다는 건….
아마 새싹이를 통해서 전해 들은 모양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순순히 물러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았는데도요?”
“네.”
“정말요?”
“정말로요.”
“…….”
레지나는 의심스러운 듯이 나를 바라봤다.
사실은… 정말로 아바돈에게 인사 따위를 하고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 건너올 수 있다는 사실을 놈에게 굳이 가르쳐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정보는 적에게 알리지 않을수록 좋은 법이었고, 내가 인사하고 가면 좋겠다고 했던 것은 그냥 말을 돌리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레지나에게 내가 추측한 전대 세계수의 목적을 말하기 싫어서.
딱해 말해주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말했다가 틀리면 창피하잖아?
“…….”
“…….”
레지나가 불안한 얼굴로 날 보는 이유도 안다.
새싹이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면….
내가 적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답잖은 짓을 하고도 남을 놈이라는 것을 들었을 테니까.
“…그거 알아요? 레지나.”
“뭐를요…?”
“그렇게 쳐다보면 정말 인사하고 돌아가고 싶어진다는 거?”
“아하하! 우리 이만 돌아가요!”
레지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바로 성역으로 통하는 차원막을 건너갔다.
휙, 휙.
이어 차원막을 사이에 둔 레지나가 붙잡은 내 손을 살살 흔들었다.
“자, 어서요!”
왜일까.
힘차게 말하는 레지나에게서 걱정이 엿보이는 것은.
내가 이대로 남아 인사를 남기고 갈까 걱정되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그 걱정에 부응해줘야 하는 것이 세계수 관리인의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관리인님 동생분한테 이를 거예요…!”
“…뭐라고요?”
“진짜 진짜 이를 거예요!”
“아니, 갑자기 도희가 왜 나와요? 이 상황에?”
어이가 없네.
나한테 그런 식으로 협박하는 게 통할 줄 아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인데 말이야.
“전 진심이에요! 관리인님!”
진심이라며 하는 소리가 도희한테 이른다는 협박이라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차원막 안쪽으로 발을 내디뎌버렸다.
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