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519
제521화
“음….”
태천이 팔짱을 꼈다.
벽에 등을 기댄 조각상이 팔짱을 낀 조각상이 되었다.
그러고는 그 잘생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쳐다보기만 했다.
내 완벽한 논리에 깊은 공감과 감명을 느껴서 저러는 건 아닐 테고….
왜 저래?
“…도운아.”
그렇게 1분쯤 흘렀을까?
태천은 이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불렀다.
고개를 갸웃거려 왜 부르냐고 묻자, 녀석이 말을 이었다.
그 표정처럼 목소리 또한 자신이 넘쳐났다.
“혼자 할 필요 없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너 크라우드랑 혼자서 싸울 생각이잖아.”
“…어라?”
내가 그럴 생각이란 걸 저 녀석한테 말했었던가?
아니….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고 해도,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난 분명 그럴 계획이라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도희에게조차도.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아줌마냐?”
“아니.”
“아니라고?”
“응.”
태천이의 지체 없는 부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래를 보는 원장 아줌마가 태천이에게만 넌지시 말해준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그러면 이 녀석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계획을 어떻게 안 거지?
“네 생각이야 뻔하지.”
내 머릿속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태천이는 어깨를 들먹이며 우쭐해댔다.
뻔하다고?
“옛날부터 그랬어, 넌.”
“……?”
“도희와 나를 지키려고 혼자 무리하는 거.”
“…….”
그리 말한 후 태천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옛날부터 그랬다.
그 말을 한 저 녀석의 머릿속엔 아마 그 옛날 일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있을 터였다.
내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혼자 남았던 때의 일이.
“가라.”
“뭐?”
“가라고. 저 망할 소 새끼는 내가 막을 테니까.”
“야, 그걸 왜 네가-”
“내가 탱커니까.”
“그럼 도희는 어떡하고! 차라리 혼자인 내가 남을 테니까, 네가 도희랑 같이 나가!”
“이미 늦었어.”
“뭐? 늦었다는 게 무슨…! 너, 그건… 하트 브레이크…!”
내 머릿속도 태천이와 같았다.
녹음기를 튼 것처럼 그날의 일이 빠르게 재생됐다.
이것 참….
“…….”
“…….”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는데?”
태천이의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휴, 부담스러워서 마주 볼 수가 없구만….
저런 눈길은 좋아하는 여자에게나 향할 것이지.
아. 한재임이면 좋아서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허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천이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들게 웃기는….
이미 더 들 수도 없는데 말이야.
“…그날부터였어, 도운아.”
태천이 천천히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뭐가 그날부터라는 건데.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금세 녀석이 그리 말한 이유를 깨달았던 탓이다.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내가 방패를 들었던 거.”
“…….”
그랬지.
원래는 내가 탱커였고, 태천이가 딜러였었다.
그날 이후로, 각자 손에 쥔 것이 바뀌었었다.
태천이가 그저 예사롭게 말을 이어 나간다.
“다음엔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나갈 생각이거든.”
“미친놈….”
정말이지 예전부터 이해가 가지 않는 놈이다.
그렇게 목숨을 구했으면 잘 됐다고 여기고 넘어가면 될 일인데….
뭐하러 다음번을 가정하고 그때엔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겠다고 다짐한단 말인가?
하긴….
그런 미친놈이니까 제가 최고인 줄 아는 한재임이나 서인철 같은 놈들이 잔뜩 모인 백운천이 한 수 접고 저 녀석을 따르는 거겠지.
“그런 이유로, 도운이 넌 막을 수 없어.”
“뭐…?”
“크라우드와 싸울 때 네 옆에 함께 서 있을 나를 말이야.”
“…….”
웃기게도….
저 말을 듣고 나니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난 태천이의 의지가 진정으로 꺾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 녀석은 또 한 번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했다.
“아니면, 나로서는 무리라고 생각해? 네 옆에 서는 게.”
말문이 바로 막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이태천인데 무리라고 생각할 리가 없지 않나.
어떤 일을 할 때 내 옆에 서 있을 사람을 한 명 고른다면, 그건 당연히 저 녀석이어야만 했다.
그것을, 다름 아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고 있었다.
단지 그렇게 소중하기에 다칠까 봐 걱정되어 혼자서 크라우드와 싸우려고 했을 뿐.
“…….”
태천이 슬며시 웃었다.
조금 전 지었던 그 자신감 넘치는 미소다.
그 미소에, 눈앞에 있는 녀석이 천공의 기사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왜 그리 불리겠는가.
이태천은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지킬 때 가장 빛이 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우리 둘이서 하자.”
“좋았어.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리 대답하며 태천은 해맑게 웃었다.
어쩜 저렇게 티 없이 맑을 수 있는 건지, 원….
“아. 그리고 딱 좋지 않아?”
“뭐가?”
“크라우드도 마침 두 명 남았잖아.”
척, 척.
태천이는 손가락을 펼쳤다.
왼손 검지와 중지, 이어 오른손 검지와 중지까지.
둘과 둘을 표현한 거다.
“해골과 원. 너랑 나. 2대2 매치네.”
“…굳이 따지면 3대3이지.”
“3대3? 왜?”
“우리에겐 새싹이가 있고….”
새싹이의 과한 설명을 읽으며 덧붙였다.
우리 얘기를 했으니, 당연히 크라우드에 관한 얘기를 해야겠지.
“그놈들한텐 아바돈이라는 마족이 있으니까.”
“아, 맞네. 3대3이네.”
태천이는 긍정하며 약지도 펼쳤다.
뭐….
사실 세세하게 따져보면 더 달라질 거다.
우리한텐 되다만 무기와 임페일이 있었고, 크라우드도 아직 권속의 권속이라면서 부리는 부하들이 남아 있을 테니까.
아마 새로운 간부들을 뽑았다면서 다시 새로운 여덟 마리를 채워 놓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던 놈들이었으니….
“그런데 언제 칠 거야? 너 아직 칠 생각 없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맞아. 나 아직 놈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도 몰라.”
“아, 역시.”
“참고로 지금 앨릭스가 사람 시켜서 찾는 중이고.”
그 이후로 일주일이 지났으나 아직 연락은 없었다.
솔직히 언젠가 찾아낸다고 한들, 내가 더 빨리 찾아내지 싶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알았냐니까?”
“야. 네가 정말 칠 생각이면 친절하게 경고 같은 걸 해줄 놈이야? 대뜸 찾아가서는 사정없이 패버릴 놈이지.”
“정확한데그래….”
딱 태천이 말대로였다.
난 그런 걸 미리 경고해줄 정도로 자상하지 않았다.
굳이 경고한다고 가정하면, 바로 당일 놈들이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할 때 일을 벌이기 때문일 거다.
그런 내가 오늘 방송으로 한진환의 복수를 부르짖으면서 경고한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지?”
내 의중을 파악한 태천이가 묻는다.
그 말마따나 꿍꿍이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별건 아니었지만.
“맞아. 있어.”
“뭐였는데?”
“그냥, 헛수고 좀 하라고.”
“헛수고?”
“내가 그렇게 떠들어댔으니, 나를… 정확히는 세계수 관리인을 두려워하는 놈들은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서 전전긍긍할 거 아냐.”
“그렇겠지?”
태천이가 내 생각에 동의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예상대로 크라우드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해골과 원이 리롄제나 스미르노프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내 꿍꿍이는 헛발질을 찬 격이었을 거다.
언제라도 좋으니 찾아오라면서 자신감을 내비쳤을 테니까.
특히 리롄제의 경우 오히려 자신이 먼저 찾아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크라우드가 어떤 놈들이던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동료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놈들이지 않나.
그렇기에 놈들이 뭘 하려고 할지 훤히 들여다보듯이 읽을 수 있었다.
“벌벌 떨 놈들이 뭘 하겠어?”
“어, 글쎄…?”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막으려고 최선을 다하겠지.”
“아.”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쳐들어가지 않는 거구나? 그냥 헛수고로 끝나버리게!”
“바로 그거야. 그리고 쳐들어가는 건, 그 헛수고가 끝날 때쯤이 될 테고.”
정확히는 전신에 각성을 쓸 수 있게 됐을 때인데….
아마 예상컨대 놈들의 헛수고가 끝날 때쯤 딱 그렇게 될 듯하다.
“와아…. 하여간 잔머리 하나는 참 잘 굴러간다니까.”
절레절레.
태천이가 고개를 저으며 감탄을 중얼거렸다.
잔머리라니.
계략, 계교, 계책, 책략 등등.
이럴 때 쓰기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으쓱입니다.] [그런 단어를 쓸 정도로 수준이 높은 수는 아니었다고 담백하게 전합니다.]그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말은 좋게 해줄 수 있는 거잖아.
무엇보다, 단언하는데 이 잔꾀는…, 아니.
이 책략은 분명 놈들한테 통할걸!
그것도 아주 잘!
[세계수가 나뭇가지로 기둥을 긁적입니다.] [관리인의 말대로 될 것 같다고 탐탁지 않게 동의합니다.]동의하면 동의하는 거지.
탐탁지 않은 건 또 뭐니….
어차피 동의할 거면 웃으면서 해, 웃으면서.
자. 활짝 웃어 보지 않으련?
[세계수는 나뭇가지를 늘어뜨립니다.] [땅 꺼지라는 듯이 축 늘어뜨립니다.]어, 음….
꺼지라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
아니지…?
“아. 그리고.”
무언가 떠오른 듯, 태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내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도희의 복수이기도 하잖아. 그걸, 내가 빠질 수는 없지.”
“흐흐흐….”
흐뭇하게 웃었다.
***
도운과 이태천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크라우드의 원과 해골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만, 앞선 두 사람처럼 차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 그러니까, 기다리고 있어.
– 머지않아 내가 찾아갈 테니까.
도운이 인터뷰를 한 영상을 본 직후였기 때문이다.
원과 해골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사납게 중얼거려댔다.
“기다리고 있어라?”
“병신 같은 블랙 드래곤 때문에 꼴이 우습게 됐군!”
“저렇게 기고만장한 꼴을 지켜볼 건가? 해골.”
“그럴 수는 없지. 내 지금 헤미스파이리움을 갖고 가서 저놈들의 머리통을 다…!”
“…….”
해골은 악을 질러대던 것을 멈췄다.
맞은편에 앉은 원도 그런 해골을 가만 바라보았다.
둘 다 깨달은 것이다.
헤미스파이리움을 갖고 쳐들어간다고 한들 어떤 짓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백운천 옥상에 꽂힌 아스트라페의 결계 때문에 백도운은커녕 다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서울에만 펼쳐질 줄 알았던 아스트라페의 결계가 오늘 한국 전체를 뒤덮지 않았나.
그들은 공격은커녕 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
“…….”
긴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곧 침묵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그렇기에, 해골은 무능하기 그지없는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대화 주제를 돌렸다.
“복수….”
“……?”
“백도운은 뇌제의 복수를 하지 못할 것이다. 감히 우릴 죽일 수 없을 테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원이 해골의 말에 긍정을 보냈다.
가만히 앉아서 무력감과 무능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게 싫어서 마족의 권속이 된 것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네 말대로 절대로 못 하겠지….”
“얼마든지, 언제든지 와보거라, 백도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릴 테니….”
“꼭, 후회하게 해주리라…!”
원과 해골은 연신 투덜거리기만 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눈을 돌린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도피한 그들은 바로 그것이 도운이 바라던 일임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아니.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