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49
제249화
58. 르네상스 (1)
“잠시만, 아주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사연을 모르는 한차현과 최권영을 가로막는 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고든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일상이 애도와도 같은 이라서일까.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서랍에서 풀쩍 뛰어내린 고든이 내 다리 옆을 쓱 스쳐 지나갔다. 털에 묻어 있던 물감이 검은색 바지에 선을 그었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려 그 부위를 쓸자, 알록달록한 물감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사라졌어?”
아무것도 묻지 않은 깨끗한 손바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축축한 촉감이 아직도 선명한데. 어느새 물감은 휘발되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진짜 물감과는 무언가 다른 듯했다.
‘저쪽은 왜 그대로인지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감춘 내 쪽과 달리, 노릇노릇한 빛깔의 털에 엉긴 물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npc와 플레이어의 차이일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마법의 규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호기심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나는 이내 그것들을 모두 털어 냈다. 학구열을 불태우기엔 적합한 상황이 아니지 않나.
‘정 궁금하면 이따 고든한테 넌지시 물어보자.’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줄리엣의 팔레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까지 얌전히 날 기다리던 한차현도 눈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저 사람은…….
“웬일이래.”
최권영은 우리가 저를 두고 움직이자 잠시 이쪽을 쳐다보기는 했으나, 이내 미련 없이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을 좇으니 고든이 있었다. 수상쩍은 고양이 쪽이 지금은 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뭐, 나한텐 잘된 일이지.’
전투나 탐색이면 모를까, 아이템을 살피는 일에 최권영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쓸데없이 신경을 긁어 일을 방해한다면 모를까. 저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순간 그가 어디서 이런 취급을 받겠냐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나도 많이 변했네.’
재계약에 벌벌 떨며, S급인 최권영을 우러러보던 시절도 있었는데.
고작해야 몇 달 전의 일이건만, 까마득하게 예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일이 있었던 거겠지. 버거운 일도 많았으나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무릇 지나온 시간이라는 게 다 그런 법이지만.’
임무를 수행하다 말고 이런 감상적인 생각이라니. 새벽은 새벽인가 보다.
괜히 속내가 읽혔을까 싶어 곁에 서 있던 한차현을 흘깃 보았다. 금속판을 살피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왜인지 눈이 마주쳤다.
‘딱 좋아할 만한 소재인데. 무슨 일이래?’
놀랐는지 유달리 눈을 크게 깜박이는 걸 보니 우연 같기도 하고.
굳이 이유를 묻는 대신, 그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들기니 한차현이 미소 지었다. 여느 때와 비슷하면서도, 이상하게 조금 달라도 보이는 웃음이었다.
대체 뭐가 다른 것인지 긴가민가하여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린 내게 한차현이 말을 걸어왔다.
“가호 씨, 이 물건은…….”
“줄리엣 루의 유품입니다. 그나저나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까지는 모르셨나 봅니다.”
“다들 생각하시는 것처럼 만능인 특성은 아니라. 겸양이 아니라, 정말로 그래요.”
“아뇨, 충분히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차현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묘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익숙한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고민거리가 사라졌으니 좋아해야 하는데. 나는 왜인지 그것이 아쉬워 탄식을 삼켰다.
“뭔가 더 특별한 게 없는지 좀 더 자세히 보죠.”
한차현에게 등을 돌려 금속판으로 손을 뻗었다. 팔레트의 물감은 증발된다는 것을 아는데. 무의식적으로 물감을 피해, 한쪽에 난 구멍에 엄지를 걸었다.
그리고 팔레트를 들어 올리려던 그 순간.
“당신도 알겠죠. 영원은 없다는 걸. 그럼에도 영원을 꿈꾸는 그대에게 작은 가호를.”
가느다란 속삭임과 함께 누군가가 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과거에서 들은 적 있는 음성, 그리고 촉감이었다.
‘줄리엣!’
그러나 상대는 내가 무어라 응답할 틈도 없이 사라졌다. 물기 어린 손이 닿았던 자리를 문지르자, 새하얀 물감이 손끝에 묻어났다. 그리고는 물거품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뒤이어 아이템을 만지며 떠오른 창 위에 직직 취소 선이 그어졌다. 유화 물감을 잔뜩 묻힌 붓으로 그은 듯, 두텁고 거친 백색 선이었다.
새로운 문구가 떠오른 것은 시스템 창이 도화지처럼 희게 뒤덮인 직후였다.
[특수 아이템, 그대를 담는 빛(?)이 플레이어 윤가호의 특성, ‘영원불멸의 가호(S)’에 반응합니다.] [자격 갱신! 숨겨진 정보가 갱신됩니다.]창이 다시 한번 희게 물들고.
[그대를 담는 빛(S)“영원보다 찬란한 찰나를 아시나요?”
– 사용자의 작품 세계를 반영하는 특별한 화구
– 시간 마법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잔여 횟수 : 1)
※ 시공을 기록하는 화가, 줄리엣 루로부터 양도되는 중입니다. (진행률 : 0.01%)
※ 당신을 둘러싼 세계의 색을 수집해 보세요!] [추신. 우리 탐정님을 잘 부탁해.]
마지막에 흐린 글씨로 남겨진 추신은 온점이 찍힘과 동시에 사라졌다.
“줄리엣 루. 당신은 대체…….”
쉽사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비단 갑자기 갱신된 정보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태껏 고든이 한 말로 추측건대, 그는 줄리엣과의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발트하임을 위해 움직였다. 우리에게 준 퀘스트. ‘지나간 마법의 시간’ 역시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든도 전쟁으로 망가진 시간을 돌이킬 방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마법사와 함께 생활했을 뿐, 그 자신이 마법사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천장화를 복원하면, 줄리의 마법도 돌아오겠지.’
시계탑에서도 이렇게 모호하게 말했다. 뚜렷한 대책이 서지 않으니 플레이어를 끌어들인 거겠지 싶어 넘겼지만, 솔직히 나도 막막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천장화에 새겨진 회로들은 복잡했다. 또한 매우 생소했다. 예술과 마법이 동일시되는 특이한 계층이라고는 하나, 기본적인 원리는 다를 바 없는데. 유독 이 회로는 독특한 구석이 많았다.
나는 쉽게 그 이유를 짚어 냈다. 이 천장화가 줄리엣의 작품 세계를 짙게 담은 고유회로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찰나의 아름다움’은 이제 갓 고유회로가 무엇인지 깨달은 내가 복원할 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리 자신이 있지는 않았으나, 직접 그림을 보고 나는 그것을 더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으니 나섰을 뿐이야.’
그런데 시의적절하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이 나오다니. 거기다 저 추신까지. 마치 고든이 이런 일을 벌일 줄 알고 안배한 것 같지 않나.
“그만큼 서로를 잘 알았다는 걸까.”
“예?”
“아니, 한차현 헌터께 한 말이 아닙니다. 설명보다는 일단 한번 보시겠어요?”
한차현이 팔레트를 관찰하는 동안, 나는 아이템의 설명 문구를 곱씹었다. 위의 것들은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겠는데. 마지막 두 줄이 신경 쓰였다.
[※ 시공을 기록하는 화가, 줄리엣 루로부터 양도되는 중입니다. (진행률 : 0.01%)※ 당신을 둘러싼 세계의 색을 수집해 보세요!]
진행률을 올려, 아이템을 완전히 양도받으려면 저 ‘색’이라는 것을 모아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비유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단 말이야.”
“비유가 아니라면요?”
“예?”
“제가 만난 줄리, 줄리엣 루는 배배 꼬고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이였죠. 저 그림처럼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본 한차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사감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인데. 이전에도 느꼈지만, 줄리엣과 나눈 시간이 퍽 즐거웠나 보다.
“있는 그대로라. 색을 모으다. 색……. 어, 설마?”
무의식적으로 한차현이 사용한 표현과 아이템 설명을 중얼거리던 중, 잊고 있었던 물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색 하면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순백색 염료(?)] [심록색 염료(?)]팔레트에 모을 색이라면 염료 말고 더 있겠어? 나는 고민하지 않고, 한차현이 든 팔레트 위에 백색 염료를 부었다. 꾸덕꾸덕한 액체가 천천히 팔레트를 적셨다.
“이런. 또 저만 따돌리시는 건가요?”
“지금은 할 게 있어서. 어리광은 나중에 하시죠.”
범상찮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느끼고 다가온 최권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리광을 받아 줄 생각이 있긴 하냐는 헛소리를 했지만,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진행률이, 올라갔습니다.”
“얼마나요?”
“20%에 조금 못 미칩니다.”
절반도 되지 않는 비율이었으나, 원래 채 1%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했다.
나는 그 기세를 잇기 위해 이어 신록색 염료가 담긴 단지를 열었다.
“알아보시겠나요?”
냐앙! 내 질문에 긍정하듯 고양이가 반응을 보였다. 최권영에게 들려 꼭대기만 집은 찹쌀떡처럼 죽 늘어진 모습이 우스워 키득거리자, 그가 팔을 뻗어 내 손바닥을 후려쳤다.
“이크, 성질하고는.”
고든과 말장난을 하면서도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단지를 기울이고, 고양이의 홍채를 닮은 물감이 순백색 염료 옆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수치가 올랐다는 한차현의 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퀘스트 아이템을 이상한 데 허비한 게 아닐까 내심 조금 걱정했는데. 올바른 판단이었나 보다.
그러나 나와 달리, 한차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하네.’
그간의 시간이 바꿔 놓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전에 비해 표정에 생각이 많이 드러났다.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기껏 보람을 느끼고 있을 나를 풀 죽게 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다정한 듯하면서 단호하고, 선을 긋는 듯하면서 배려심 깊은 그런 사람이었다. 동료로서 이만큼 기꺼운 이가 없지. 속으로 조용히 한차현을 칭찬하며 먼저 말문을 텄다.
“네, 맞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계신 거요.”
“무슨 뜻이신지?”
“종일 매달려 얻은 염료들로도 겨우 40%. 나머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계셨잖아요.”
“……음, 들켰나요?”
“티가 좀 났어요.”
이제야 조금 웃는 그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했다.
내가 보아 온, 겪어 온 시간이 이번에도 우릴 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 발트하임까지도. 그런 속내를 나는 한 문장에 함축하여 전했다.
“아는 게 힘, 이라고들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