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58
에밀리나가 정색하며 말을 받아쳤다.
하지만 키르젠 역시 뜻을 굽히진 않았다.
“저는 사실을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어떻게 사실이란 거죠? 제가 동의를 한 적이 없는데. 불법 서류라도 작성하셨어요?”
“정말 아무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로군요.”
키르젠이 쓴웃음을 짓고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정식 절차대로 승인받은 혼인 신고서입니다.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요. 저는 그런 사실 전혀……!”
그때, 에밀리나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국법상 본인 동의 외 승인되는 경우는 분명!
에밀리나는 눈을 부릅뜨고서 장내를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시선을 피하고 있는 아버지 맥트런 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진짜로?
이거 완전 날치기 결혼이잖아!
에밀리나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키르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 유연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제가 영애를 데려가겠다고 하니 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시더군요.”
영애를 꼭 행복하게 해 달라며 부탁까지 받았습니다.
그의 달래는 음성이 귓가에 잔잔히 울렸다.
마주한 시선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남편이 생겼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하필이면……!
좋지 않았다.
정말 좋지 않은 일이었다.
어째서 그와 엮여 버린 거란 말인가.
그토록 피하고자 다짐했건만.
‘키르 그 아이가 문제였다니…….’
에밀리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길 바랐다.
* * *
에밀리나는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넋 나간 얼굴을 했다.
무슨 정신으로 무도회장을 빠져나온 건지 모르겠다.
키르젠의 충격적인 고백 이후, 회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으니까.
다행히 얼마 안 가 리오네프 왕족이 등장하면서 소란은 금세 수습되었지만, 에밀리나의 정신만큼은 수습되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혼인 신고를 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하필 그 대상이 키르젠 디트리오 공작이라니.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에밀리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심경은 어느새 원망으로 바뀌어 배신감마저 느끼게 하고 있었다.
“아버지. 우리 할 말이 아주 많을 거 같지 않나요?”
에밀리나가 저택에 들어서며 맥트런한테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맥트런은 에밀리나의 차가운 목소리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무슨 말을 입에 올리든 지금으로선 변명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지만 미리 말을 전하지 못한 건 자신의 책임이 맞았다.
게다가 그 역시 예상하지 못한 변수 탓에 머릿속이 복잡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케이티가 그런 맥트런을 바라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밀리. 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오는 게 어떻겠니? 밤이 길어질 텐데 이대론 불편하잖니.”
드레스를 가리킨 케이티가 그렇게 말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맥트런한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다.
에밀리나는 별수 없이 케이티의 말을 수긍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밤은 무척 길어질 테고, 급하게 듣는다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차라리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는 게 나았다.
그사이 자신도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게 정리가 되겠느냐마는.’
에밀리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환복을 위해 방으로 올라갔다.
* * *
세 사람이 다시 모인 건 그로부터 두 시간 뒤였다.
그들은 한결 편안한 복장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에밀리나가 먼저 대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에밀리나가 사나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제가 되지 않았다.
상황을 곱씹을수록 아버지한테 실망감이 무척 컸으니까.
아무리 이 바닥에서 결혼 장사가 흔하다지만, 적어도 맥트런만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조차 없이 강제로 결혼시킬 만큼 무정한 사람은 아닐 거라 믿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어떻게 절 이런 식으로 결혼시킬 수가 있냐고요.”
“밀리. 오해다. 난 너를…….”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어요?”
“그럴 리가 없잖니!”
맥트런이 호소하듯 극구 부인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란 거 알고 있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어. 나도 널 그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맥트런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일의 발단이 된 지난날의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으므로.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인 만큼 어디까지 진실을 알려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사실 그대로 내뱉기엔 지나치게 당한 일들이 많았다.
맥트런이 얼굴을 가린 채 가만히 손을 떨자 케이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부드럽게 다독였다.
“당신이 무도회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었죠. 그 일과 관련된 건가요?”
“그렇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천천히 말해 봐요.”
“그게…….”
맥트런이 그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 *
최근 들어 사채업자가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은 이율이 더 올랐다며 패악을 부렸고, 빠른 시일 내로 갚지 못하면 험한 꼴을 보게 되리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상황에서 맥트런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잘 달래어 일단 돌려보내는 것뿐.
기한을 조금 더 달라며 사정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사채업자가 찾아와 성질을 부리던 날이었다.
아내와 딸이 집을 비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날따라 유독 행동이 거칠었다.
급기야 집 안의 물건을 전부 부술 기세로 발길질하자, 맥트런은 자존심이고 뭐고 일단 빌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러지들 마시게. 내 금방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귀족 나리께선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런데 왜 아직까지 진전이 없어?”
사채업자는 고개를 위협적으로 들이밀며 맥트런을 향해 빈정거렸다.
말투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묻어 있었다.
맥트런은 ‘그거야 자네들이 이율을 계속 올려 그런 게 아닌가!’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성질이 불같은 그들을 건드렸다 상황이 악화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게. 지난번 약속한 대로 두 달 안엔 꼭 갚을 터이니.”
“그건 그쪽이 멋대로 정한 기한이고. 3일 드리지. 그 이상은 우리도 못 기다려.”
“그 많은 금액을 어떻게 3일 안에 갚으란 말인가!”
맥트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이미 원금은 까마득해진 지 오래.
이자로만 수십 배 가까이 불어나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그간 최대한 변제를 해 왔음에도 빚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맥트런은 거친 숨을 씩씩대며 사채업자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절망이 널을 뛰며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벗어날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은 진즉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자식과 아내를 보며 늘 죄인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과 수렁으로 밀어 넣어지는 끔찍함을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기어이 저들은 자신을 절벽으로 밀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결국 그간 눌러 왔던 설움이 노호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채업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받았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지. 내가 알 바야? 어쨌든 난 말했어. 3일 안에 갚아. 안 그럼 나 좋을 대로 받아 낼 테니까.”
그 말에 숨은 의미를 깨달은 맥트런이 아연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손속에 자비가 없는 저들이니 지금보다 더 잔혹해지려면 얼마든지 더 잔혹해질 수 있었다.
“제발, 이렇게 부탁함세. 3일은 정말 무리야. 하다못해 한 달 정도만이라도…….”
맥트런이 바닥에 무릎 꿇을 기세로 애원하던 순간이었다.
사채업자가 말을 자르며 여상히 내뱉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빚을 전부 갚을 기회지.”
“그게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