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66
“공작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디트리오 기사단의 단장 하인켈 마르쿠스라고 합니다. 부디 이렇게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시길.”
중년 기사의 말에 에밀리나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록벨이 한껏 겁을 준 것이 무색하게 점잖은 태도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하인켈이 좀처럼 숙인 허리를 들지 않으니 에밀리나로서는 퍽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괜찮다며 그만 일어나 달라 말을 붙이려는데 이번엔 록벨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빠른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님, 마르쿠스 경은 지금 새로운 안주인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려는 것입니다. 의례적이긴 해도 마님이 인사를 받아 주셔야 서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록벨의 말에 에밀리나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 되었다.
충성 서약이라는 무거운 말이 양심을 쿡쿡 찔러 왔기 때문이다.
자신은 길어 봤자 1년짜리 공작 부인이었고, 그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기사의 서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주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러나 고민도 잠시, 에밀리나는 끝내 결단을 내렸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손을 내밀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저와 키르젠의 관계를 모르고 있을 이들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던 탓이다.
그렇게 하인켈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서약을 이행하려던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다.
“허억, 허억…… 내가, 기다리라고 했지!”
그리고 사나운 목소리.
문을 열고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키르젠이었다.
어디 진창에라도 구르고 왔는지 잔뜩 흐트러진 채였다.
숨마저 연신 몰아쉬고 있어 보기에 괴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았는데, 꼭 누군가를 찢어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에밀리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는 순간.
“엇.”
“순서가 무슨 상관이랍니까.”
하인켈이 손등에 입을 맞추며 가볍게 비웃었다.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 충성 서약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에밀리나에게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끝으로 굽혔던 무릎을 바로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서약을 받은 에밀리나는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만 이리저리 굴려 댔다.
그러다 황급히 정신 차리곤 하인켈에게 서약에 대한 예의를 보였다.
그래도 일단 받기는 했으니까…… 라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슬쩍 키르젠을 돌아보니 그의 표정이 처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키르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에 분노가 치밀었다.
충성 서약. 디트리오 기사단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때 보이는 형식적인 인사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일이기도 했고, 응당 공작가에 속한 기사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맹세이니 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처음이었을 때의 이야기였어.’
키르젠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남달랐기에 기사단 소집도 뒤로 미루던 참이었다.
그만큼 에밀리나에게 진심을 보이고 싶었고, 처음을 양보하고 싶지 않아 조급한 마음을 숨기며 서약을 기다렸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말도 기사단에 전하였고.
단장인 하인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제 말을 들어야 할 기사단장이라는 자가 명령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저택을 비운 틈을 타 일을 벌였다.
왕성에서 제롬이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이리 급하게 달려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필 오늘 같은 날, 그녀가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알려 왔을 때 국왕의 호출이 생겨서는.
키르젠은 그녀의 공작가 입성을 급하게 연락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며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제 말에 코웃음 치던 하인켈이 결국 공작저에 돌아와 에밀리나를 만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상황. 키르젠은 제 명령을 어기고 서약을 맺은 하인켈을 보며 분노로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종종 이런 식으로 자신을 업신여기듯 가볍게 행동하는 그가 진심으로 짜증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충성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내칠 수도 없어 열만 뻗치게 되었다.
그는 잊을 만하면 제 신경을 건드렸고, 결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선에서 자신을 도발해 왔으니까.
그게 약이 오를 지경이라 키르젠은 더욱 이가 갈렸다.
그래서 치솟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하인켈을 노려보고 있는데, 문득 한쪽에서 에밀리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굳어진 표정을 보니 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키르젠은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입가를 쓸었다.
그리고 애써 표정을 풀고서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기사단장이 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서둘러 귀택하느라 제가 조금 성급하게 굴었습니다. 혹 그가 무례하게 굴진 않았는지요.”
“아…… 전혀요. 그저 소개만 받았을 뿐이에요.”
에밀리나가 그렇게 말하자 하인켈이 거 보라는 듯 옆에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키르젠을 돌아보더니 삐뚜름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무례라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단순히 서약을 맺은 것뿐인데.”
“사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잊으셨나 봅니다.”
하인켈의 이기죽거림에 록벨이 나서서 대꾸했다.
그는 주인에게 불충한 태도를 보이는 하인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주름진 이마를 더욱 좁히던 참이었다.
키르젠 역시 진한 불쾌감이 담긴 눈으로 하인켈을 다시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말을 남기며 이만 꺼지라는 듯 무언의 퇴장을 종용했다.
“이따 나 좀 보지.”
“어련히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부인. 환영받지 못한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따로 뵙는 거로 하지요.”
하인켈이 그렇게 말하고는 키르젠을 향해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에 키르젠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단칼에 끊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럴 일 없으니까 당장 나가.”
“사람 일이라는 게 어디 뜻대로 되겠습니까? 언제고 또 볼 일이 있을 겁니다.”
하인켈은 사뭇 유쾌한 웃음과 함께 미련 없이 응접실 밖으로 벗어났다.
키르젠은 끝까지 약 올리는 듯한 태도로 나가는 하인켈을 보며 열이 받은 표정이었고.
록벨은 미간에 잡힌 주름을 문지르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에밀리나는 폭풍처럼 지나간 하인켈을 보며 바람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해 버린 것도.
뭐랄까……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퇴장도 급작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짧은 만남과 이별 후, 키르젠이 피곤한 얼굴을 지우며 에밀리나를 향해 다가왔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택을 비운 것도, 제가 직접 맞이하지 못해 이런 일을 겪게 한 것도…… 영애를 많이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전 괜찮은걸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요. 애초에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잖아요. 일 때문에 바쁘셨다고 들었어요.”
에밀리나의 차분한 되받음에 키르젠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기분 나쁘거나 불쾌하진 않으십니까? 영애를 무시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작님도 무시하실 생각인가요?”
에밀리나의 여상스러운 답변에 키르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영애가 언짢을까 우려되는 마음에 물은 겁니다.”
“그런 거라면 저는 괜찮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까도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정이 있었잖아요. 이해하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키르젠은 다 괜찮다는 듯이 구는 에밀리나를 보며 복잡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여러 의미로 좋지는 않았으니까.
그녀의 태도는 마치…… 잠깐 있다 떠나갈 사람처럼 선을 긋는 것 같았다.
그가 뭘 하든 크게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시작부터가 어긋난 느낌이라 이걸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괜한 거짓말로 그녀를 속인 벌을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오해는 이제부터 풀어 가면 돼.’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였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녀는 저와 결혼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내비쳤으니까.
그를 받아들여 준 게 당분간이라는 전제라면, 만약 이혼을 염두에 두고 이 결혼을 생각한 것이라면, 기한은 아마도 1년 남짓일 것이다.
그 기간 안에 진실을 고하고 저를 다시 보게 하면 되었다.
키르젠은 그 시기를 가늠하며 에밀리나의 원망을 가정했다.
어쩌면…… 자신을 농락했다며 떠나갈지도 모른다.
결코 원하지 않은 전개였지만, 그리될 가능성은 있었다.
키르젠은 동정을 사서라도 그녀를 붙들고 싶었다.
그러니 그녀가 저를 떠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파고들고 말리라.
키르젠은 그렇게 생각하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하면 이제 곧 저녁 시간인데, 함께 식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영애를 위해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저녁을 함께하자는 키르젠의 제안에 에밀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목상의 결혼이듯 아직 관계가 어색하다 보니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같이 밥을 먹다가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저택도 전부 다 돌아보았고, 마땅히 거절할 핑계도 없어 사실상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식사를 따로 하자니 관계가 소원하다는 걸 주변에 알리는 꼴이었다.
또한, 키르젠을 우습게 만드는 일이었고.
어찌 됐든 그와 저는 부부가 되지 않았는가.
보는 눈이 많은 만큼 대놓고 내외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네, 좋아요. 같이 먹어요.”
따로 할 이야기도 있고, 슬슬 배가 고파지던 참이었으니.
에밀리나는 긍정적인 대답을 들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하인켈은 응접실을 나와 몇몇 부하에게 필요한 보고를 들은 뒤 잠시 정원에 멈춰 서서 하늘을 감상하고 있었다.
탁 트인 정원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장관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여인, 플로라 디트리오. 키르젠의 모친이자 선대 공작 부인이었던 여자.
붉게 진 노을을 바라보는 건 그녀와 나누었던 몇 안 되는 추억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사로운 감정이 아닌, 오로지 주인과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의 관계일 뿐이었다.
단지 플로라를 처음 공작저로 이끈 게 자신이었고, 의지할 곳이 없던 그녀에게 울타리가 되어 지켜 주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우정을 나누었던 것이 다였다.
그래서 플로라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다.
여동생을 잃게 된 기분이었으니까.
플로라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날, 마차에 오르며 남겼던 말이 유언이 되었을 땐…… 정말이지 참담한 심정이었다.
제 아들을 지켜 달라던 그 말이 저주처럼 돌아와 하인켈을 괴롭혔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석연치 않았던 건 플로라는 이미 죽음을 예감한 사람처럼 담담하게 그런 말을 뱉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