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78
“하아……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이렇게 정신 놓고 다닐 줄 알았더라면 마리의 동행을 막지 않았을 테니까.
그냥 답답해도 좀 참을 걸 하며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그르르릉…….
목 뒤가 쭈뼛 서는 감각과 함께 오한이 들었다.
귓가에는 짐승의 목울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딱딱하게 굳은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지, 짐승!’
에밀리나는 헛숨을 삼키고 뒷걸음질 쳤다.
나무 기둥에 등이 막혀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그것은 에밀리나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칠흑에 가까운 검은 털이 수풀과 나무 사이를 오가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꿀꺽. 에밀리나가 마른침을 삼키며 놈의 행동을 지켜보는 순간.
쿵-
“흡!”
짐승이 앞발을 굴렀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묵직한 걸음을 내디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은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형형한 황금색의 눈이 에밀리나를 똑바로 직시한 채였다.
그녀는 숨조차 쉬지 못할 공포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도망쳐. 도망쳐야 해. 당장, 제발!
본능이 미친 듯이 속삭여도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져 다리가 얼어붙었다.
‘아…….’
이대로.
이대로 끝인 건가?
에밀리나는 마지막을 예감하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기분이 영 좋지 않더라니.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나 보다.
에밀리나가 그런 실없는 생각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탁.
타닷.
턱.
……묘한 발 구름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을 덮쳐 오리라 생각했던 검은 짐승이, 딱 한 걸음을 남겨 두고서 가만히 앉아 있던 것이다.
에밀리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놈을 보았지만, 짐승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입맛을 다실 뿐.
그것도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하품하듯이 말이다.
물론 뾰족하게 솟은 송곳니가 무척 위협적인지라 에밀리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무에 꼭 붙어 있는데, 짐승이 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마치 자신이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듯싶었다.
그리고 나른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분위기가 굉장히 평화로웠다.
‘뭐, 뭐지?’
가도 좋다는 걸까?
공격성을 띠지 않는 놈을 보며 에밀리나는 슬쩍 발을 빼 보았다.
“히익!”
그런데 용기를 낸 것이 무색하게 짐승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왜?’
이거 아니야?
에밀리나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발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그러자 짐승이 그제야 됐다는 듯 고개를 다시 수그렸다.
에밀리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놈을 바라보았다.
하는 행동이 사람 못지않게 영리해 보였다.
제게 볼일이 있다는 사람처럼…… 아니, 짐승처럼 굴고 있었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말이라도 한번 걸어 봐?’
살려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느냐마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한심하기는 했다.
하지만 에밀리나는 굴하지 않았다.
대체 이 짐승이 원하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혹시…… 크흠.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요?”
놈의 가느다란 시선에 에밀리나는 반사적으로 말끝을 높였다.
좁혀진 동공이 너무 살벌했던지라 어쩔 수 없었다.
짐승을 상대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놈이 머리를 주억거리더니 제 오른쪽 다리에 얼굴을 살짝 비비는 것이 아닌가.
에밀리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상에. 말을 알아듣는 고양이는 봤어도 말이 통하는 짐승이라니.
생에 두 번이나 겪는 별스러운 상황에 이게 꿈인가도 싶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다. 놈은 정말로 제게 볼일이 있다고 수긍한 것이었다.
‘어라……?’
그런데 잠깐. 이거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 들지?
에밀리나는 묘한 기시감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이 상황. 굉장히 어떤 기억과 닮아 있었다.
에밀리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짐승을 살폈다.
윤기 나는 검은 털과 눈부신 금색 눈동자. 동그란 두상에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 왜인지 그 아이를 연상케 한다.
육중한 저 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제가 보았던 고양이와 느낌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저 덩치에 고양이는 있을 수 없으니, 고양잇과 짐승이라는 건데…….
‘표범? 재규어?’
아무래도 좋다. 종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키르 그 아이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 문제지.
말을 알아듣는 짐승이 이렇게 흔하게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것도 같은 과에 속해 있는 짐승이라면 말이다.
에밀리나는 말이나 한번 꺼내 보자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그, 있잖아. 너…… 설마 키르야?”
“크릉.”
……그런데 짐승이 곧장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키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설마 하고 생각했던 일이 사실인 것이다.
느낌에 확신을 갖긴 했지만 이렇게 쉬울 정도로 긍정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어쩐지 운 좋게 얻어걸린 느낌이라 배신감마저 들었다.
에밀리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키르를 보았다.
언젠가, 혹은 조만간. 감정에 북받쳐 재회할 것이라 믿었던 만남이, 감동적인 재회를 믿어 의심치 않던 만남이…… 이다지도 허무하게 끝난 순간이었다.
* * *
철저히 에밀리나의 기준에서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재회와는 별개로, 그녀는 키르에게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밥은 잘 챙겨 먹었는지, 왜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째서 키르젠한테 결혼 청탁을 한 것인지!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남자주인공과 결혼 생활을 하게 된 지라 에밀리나는 이에 관해 당연히 물을 권리가 있었다.
키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고, 궁금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키르는.
“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짐승의 모습을 풀지 않았다.
당연히 대답 또한 들을 수 없었다.
아직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건가 싶어 조심히 물었지만, 그건 또 아니라고 당당히 답한다.
조금 전,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며 인간 모습으로 변하기 싫다고 뜻을 내비친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랑 장난해?’
에밀리나는 괘씸함에 키르의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
“크르륵!”
그러자 사납고 걸걸한 울음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어릴 땐 좀 더 작고 귀여운 울음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어쩐지 아련한 추억마저 파괴당한 느낌이라 에밀리나는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이 동심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르는 제 품으로 고개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쓰다듬어 달라는 듯 연신 얼굴을 비벼 오는데, 그게 애교로 대충 때우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