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차 세워요
“할 말이라니…….”
도율이 말끝을 흐리자, 클레어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뭐, 없다면 없는 거고요.”
“…….”
그 모습을 도율이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클레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재개했지만, 그게 무표정을 가장한 실망이라는 걸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고 직감이 경종을 울려 대고 있었다.
“아니, 뭐…….”
도율이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은 있는데요.”
“그럼 해 봐요.”
“지금 여기선 좀…….”
“왜요?”
도율이 서툰 변명을 쥐어짜 냈다.
“준비가 좀 필요하달까.”
“준비……?”
그 말을 들은 클레어 역시 뻣뻣하게 굳었다. 뻣뻣하게 굳은 클레어를 보고 도율도 골치 아프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무언가 둘러대는 말을 만들어 보려 해도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튼 그런 걸로.”
결국 도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머진 다녀오고 얘기하죠.”
그렇게 말한 도율은 겉옷을 챙긴 채 잽싸게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어설픈 연기를 곁들여서.
물론 아직 정해진 시간까진 여유가 있었지만.
“…….”
식탁에 혼자 남은 클레어가 어안이 벙벙하게 도율의 말을 곱씹었다.
‘준비가 필요하다고……?’
뒤늦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도율은 지금까지 할 말을 미루거나 감추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면, 평범한 말은 아니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설마…….’
입술이 바짝 말랐다.
클레어가 떨리는 손가락을 붙잡고 간신히 물 한 컵을 비워 내자, 식탁 위에 늘어진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도율은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내가 치워야겠네.”
집주인인 클레어와 더부살이하는 도율. 그 관계로 인해 암묵적으로 온갖 잡일은 도율이 도맡아 하는 걸로 정해져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게 지켜지지 않는다 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면 가사도 절반으로 나누는 게 맞지 않을까. 도율도 요즘 나름대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는 모양이니.
‘오히려…….’
일 나간 바깥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요리를 하고 기다리는 것이 전통적인 아내의 모습 아닐까.
클레어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앞치마를 두르고 낮에는 빨래와 청소를 끝내 두고. 시간 맞춰 장을 봐 온 후에 요리를 시작해, 도율이 돌아왔을 때 현관으로 나가서 맞이하는…….
‘아니, 아니.’
미쳤지.
한국에선 이걸 김칫국이라 표현했다.
‘애초에 요리도 그쪽이 더 잘하고…….’
자신은 아직 명함을 내밀 단계가 아니었다.
클레어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도율이 뭘 어쩌겠다고 확실하게 발표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들뜨는 건 좋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
며칠이나 더 뜸을 들여 놓고서, 옆구리를 찌르니까 그제야 달랑 한마디 하고 튀다니.
오히려 괘씸할 지경이었다.
지금부터라도 고삐를 단단히 쥐고 정신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그렇게 다짐한 클레어는 팀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하에 딸린 주차장에 도은이가 픽업을 위해 마중 나와 있었다.
익숙하게 차에 오르니, 도은이가 의아하게 물었다.
“언니, 뭐 좋은 일 있었어?”
“…내가? 왜?”
“왜긴 왜야, 입이 귀에 걸렸는데.”
핫.
언제 표정이 풀린 거지.
다시금 정신을 무장한 클레어가 표정을 가다듬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평소보다 톤이 조금 높았다.
도은이 그런 클레어를 보고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정신 차려, 언니! 아직도 얼굴 풀려 있다고!!”
“어……?”
손으로 입가를 매만져 보니 도은의 말이 사실인 걸 알 수 있었다.
이도은 가라사대, 정색 하면 클레어, 클레어 하면 정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표정 관리에 일가견이 있는 그녀였으나. 이번만큼은 그 특기를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어라…….”
그런 클레어를 보며 도은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소리쳤다.
“언니가 고장 났다!”
* * *
“반갑습니다. 불카누스 소속 보안팀 과장 이민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센터에서 파견 나온…….”
“백란 씨, 여우 씨 되시죠?”
“예, 맞습니다.”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나름대로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하는데. 백우진은 그런 나보다 먼저 도착해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있었다.
작전은 보안을 이유로 시행 당일이 될 때까지 참가 인원을 확정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미리 만나 본 사람은 사장인 임수길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보안팀 과장이라는 자가 백우진에게 설명했다.
“타고 오신 차량은 잠시 주차해 두시기 바랍니다. 호송은 동일한 모델의 차량을 다수 포진해서 이동할 예정입니다. 두 분께서는 그중 하나에 탑승해 주시면 됩니다. 운전은…….”
“제가 합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간격을 잘 맞춰서 함께 운전해 주시고. 기본적으로는 무전으로 소통할 텐데, 운전석에 하나씩 비치되어 있으니 그걸…….”
백우진이 설명을 듣는 사이. 나 역시 주변 광경을 둘러봤다.
과장의 말대로 똑같이 생긴 검은 차량이 잔뜩 주차되어 있었다. 크기는 SUV 정도 될까.
하지만 평범한 차량은 아니었다.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해 방탄 장갑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눈에 띌 정도로 두껍지는 않지만.
“핫핫! 저희 회사에서 제작하는 특제 장갑 장비입니다. 세련된 곡선 디자인에, 어느 차에 얹어도 될 정도로 폭넓은 호환성을 자랑하고…….”
임수길이 괜히 자랑했다.
확실히 일반 장갑차에 비해 세련됐다면 세련됐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건 마찬가진데. 이런 차량들이 줄지어 이동하면 대놓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습격해 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은밀하게 숨기는 것보다는 대놓고 싸우는 걸 즐기는 성격인 거다.
“물건은 이 중 하나에 보관해 이동하는 거겠군요?”
“예. 물론 어딘지는 기밀입니다.”
외부 인원이라고 따돌리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정말 주요한 인물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거다.
작정한다면 기감을 펼쳐 찾을 수도 있지만, 공연히 의심 살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진짜 물건을 훔치러 온 것도 아니고.
“알겠습니다.”
언제쯤 출발하게 될까.
백우진이 있는 곳에 돌아와 보니 과장이 여러 주의 사항들을 주입하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모두 충분히 숙지하시고 나면 출발할 테니, 나중에 알려 주시면…….”
“전부 외웠습니다.”
“…예?”
백우진이 두꺼운 서류를 팔랑거렸다. 그러자 과장이 어안이 벙벙해 되물었다.
그런 과장을 향해 백우진이 말했다.
“뭐하면 테스트해 봐도 좋습니다.”
“그럼……. 키워드 ‘소풍’은 뭡니까?”
“2열 주행. 정속 80킬로입니다.”
“붉은 장미는?”
“전방에 미상정 개체 등장, 대기.”
“검은 구름.”
“전투를 상정해 대기할 것.”
“반대로, 정찰 명령에 따른 결과 보고 시의 암호는 어떻게 됩니까?”
“이상 없을 시 개나리. 이상 요소 발견 시 진달래. 적대적 상황 발생 및 대치 진행 시 무궁화입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문답을 주고받았다. 백우진은 모두 막힘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결국 과장이 혀를 내두르며 인정했다.
“정말 그사이에 전부 외운 겁니까?”
백우진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익숙해서.”
확실히 부길드장이라면 이런 기밀 작전도 어느 정도 익숙할 법했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쓰는 암호까지 단숨에 외워 버리는 건 보통이 아니었다.
‘…폼 좀 나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쿨한 태도까지. 유능한 요원이라는 느낌이 팍팍 풍겼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작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차에 올라타 무전 지시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과장이 상급자와 합류하러 떠나고. 백우진과 나는 배정된 차에 올라탔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아아. 수송대, 수송대. 전원 잘 들리나? 임무를 시작하겠다. 초석은 두꺼비집으로 하겠다.]두꺼비집?
그러자 앞에 있던 차들부터 순서대로 일렬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백우진 역시 차례가 다가오자 능숙하게 꼬리를 물고 간격을 두고 차를 몰았다.
계기판이 정확하게 시속 60킬로미터를 가리켰다.
* * *
“백우진 씨는 왜 이 일을 시작했습니까?”
“…뭡니까, 갑자기?”
백우진이 여전히 정해진 속력을 지킨 채 대답했다.
작전 도중, 옆자리에는 유사시를 대비한 각성자가 타고 있었다. 요컨대 전투원이었다.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그 남자는, 한 대형 길드를 홀몸으로 무너뜨릴 정도로 강한 헌터였다.
가능하면 그가 나설 일이 없이 끝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여우가 나설 필요가 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남자 둘이서 조용히 드라이브나 하고 있는 꼴이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화제거리를 던지는 것도 이해는 갔다.
“저번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센터는 여러 모로 중립적인 위치라서 편하다고.”
“그건 여길 고른 이유고. 왜 다시 일을 시작했는지는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
그건 그랬다.
한국 헌터 업계의 세력 구도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본질을 흐리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고. 실제로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그가 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말 알고 싶은 거라면, 센터장님께 물어도 가르쳐 줄 텐데요.”
한때는 적대 세력에 몸담았던 남자다. 그러니 꿍꿍이를 알아야겠다고 캐내면, 명분을 위해서라도 알려 줄 텐데.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는 듯,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그게 백우진 씨 생각을 알려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우진이 센터장에게 무엇을 부탁했는지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백우진의 동기를 설명하는 건 아니었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온통 검은 칠을 한 차량 덕분에 앞뒤로 붙은 차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보이는 건 헤드라이트의 불빛과 줄줄이 지나가는 주황색 전등뿐이었다.
“군식구가 늘었습니다.”
아는 아이도, 책임져야 할 필요가 있는 아이도 아니었지만. 이왕 돌보게 되었다면.
“어른이라면 아이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가까운 어른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백우진이 다짐했던 일이었다.
“책임감입니까?”
“조금 다릅니다. 그런 멋들어진 말로 포장할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을 싫어하게 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자신을 싫어하게 되고 싶지 않다라.
옆자리 앉은 남자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터인 창밖을 응시하며 말을 곱씹었다.
“고맙습니다.”
“예? 뭐가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백우진이 눈길을 돌렸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백우진 씨 말을 들으니 어떻게 할지 알 것 같아서요.”
“특별히 대단한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냥 마음에 들었다고 하죠.”
“…그렇습니까.”
백우진은 이전, 부길드장으로 활동하며 커다란 강연장에서 거창한 주제로 이런저런 소리를 떠든 적도 있었다.
그때가 훨씬 더 정확하고 조리 있는 말들이었다. 밤새 자료를 모으고 몇 번이나 연습해 머릿속에 대사를 모두 외울 지경으로. 손을 잡고 대단한 말씀 감사히 잘 들었다는 감상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때보다 지금이 더 마음에 들었다.
“차 세워요.”
“예?”
갑작스러운 말에 백우진이 혼란을 느꼈다. 지금은 작전 도중. 다른 명령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절대 멈추지 말아야 하지만.
백우진은 명령보다, 옆에 앉은 남자의 말을 우선했다.
차를 세우자 남자가 문을 열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앞뒤로 있어야 할 주행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멈춰 있으면 뒤에 있는 차가 지나쳐야 할 텐데. 한참이 지나도 그러지 않았다.
무전도 응답이 없었다.
“대체…….”
“여기서 나오지 마세요.”
남자가 그리 당부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