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
18화 이러다 스캔들 나겠다
잘그락, 잘그락.
오른손에 쥔 물건을 공중으로 던지며 놀았더니 공중에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어렸을 때, 도은이가 하도 졸라서 공기놀이를 같이해 주곤 했다. 그때 생각이 나네.
공기놀이를 하기에 썩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놀던 건 납치범의 입에서 뽑아낸 어금니였다. 피가 묻어서 지저분한 감이 있었다.
“아으… 아…….”
납치범은 입가에서 피와 침을 흘리며 나자빠져 있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모두 환자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뒤가 구린 일을 하며 밥 벌어먹는 놈들은 으레 어금니 안쪽에 독약을 심어 놓곤 했다. 모처럼 생포해서 심문하려고 해도 수포로 돌아갈 때가 많았다. 저쪽 세계에선 스스럼없이 목숨을 끊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살수를 제압하고 나면 항상 하는 일이 자결 수단을 찾아서 죄다 망가뜨려 놓는 것이었다.
이 납치범의 사정도 비슷했다. 저쪽 세상에서 나를 습격하러 온 놈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바로 목숨을 끊었지만, 이 녀석은 자기가 이길 거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실패했고, 내 손아귀에 잡힌 이상 목숨을 끊어 편해지는 것도 불가능했다.
뽑아낸 네 개의 어금니 중 하나에서 작은 알약 하나가 나왔다. 겉을 까보니 하얀 가루가 나왔다. 청산가리.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독극물이다.
나는 네 개의 어금니를 버리고 손을 털었다.
“말해.”
“무, 무얼…….”
“누구냐.”
질문을 받은 납치범의 눈빛이 흔들렸다.
흔히 뒷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용은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물론 그걸 철저하게 지키는 진짜배기는 잘 없다. 그래도 누구든 한두 차례는 저항하기 마련이었다.
“내가 그걸 말할 것 같나?”
“편히 죽게 해 주지.”
“퉷! 웃기는군. 난 네놈 같은 애송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옥을 헤쳐 왔다. 시간만 버리지 말고 죽일 거면 죽여 보시지?”
납치범은 피가 섞인 침을 내 발밑에 뱉었다. 아직도 내가 사람을 끝장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짠! 취업 기념 선물. 내가 사는 거야.
이 신발은 도은이가 사 준 거였다. 매니저 일을 하면 돌아다닐 일이 많은데, 발이 편해야 한다며 사 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이 지금 더러워질 뻔했다.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알겠다.”
손을 타고 흐르는 내공. 정안을 통해 관찰한 상대의 혈도. 그곳에 정확히 손가락을 찔러 넣으며 순서대로 점혈했다.
분근착골.
살을 가르고 뼈를 바르는 고통을 주는 기술.
“그럼 빌지 마라.”
분근착골에 당한 남자는 의문을 표하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움직인다고 해서 고통을 막을 방법은 없다. 무의미한 발버둥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할 뿐.
“걱, 그윽…….”
사지를 덜덜 떨며, 말을 하긴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 남자의 몸이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핏줄이 돋아났다.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근육조차 남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요동치고 있었다.
바닥을 헤엄치던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간절한 눈빛. 그러나 나는 흔들림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 * *
건물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왔다.
놈들이 쓰던 아지트는 완전히 연소해서 재가 되었다. 제대로 지은 건물도 아니고 컨테이너에 가까운 가건물이어서 단숨에 태우고 불을 끌 수 있었다.
심문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은 상태였다. 남자는 이 일을 사주한 놈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모두 낱낱이 불었다. 몇 차례의 대조에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플레이아데스] 길드.
“플레이아데스라…….”
나도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이쪽 세계에 돌아온 후, 매니저 일을 하며 한국의 헌터 업계에 대해 공부하면서 알게 됐다.
현재 대한민국의 길드계를 가르는 4강 길드.
천상의 축복, 대현, 로얄 로드 그리고 플레이아데스. 이 넷이었다.
그중 하나인 플레이아데스에서 내 납치 의뢰를 사주했다.
몸값을 노리고 한 짓은 아닐 거다. 그 정도 덩치 되는 길드가 사람 납치해서 S급 헌터 삥 좀 뜯는다고 짭짤한 벌이가 되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나도 그쪽 길드에 밉보일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매니저라곤 하지만, 애초에 내가 하는 일은 심부름에 가까웠다. 다른 길드와의 알력 싸움에 끼어들 만한 짬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역시 클레어 씨와 관련된 일이라는 점인가.
물어봐야겠군.
그쪽 길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나저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강원도의 깊은 산골짜기였다. 길을 잃을 걱정을 하는 건 아니었다. 기감을 펼치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으니까.
문제는.
“집에 언제 가냐…….”
한숨이 나왔다.
핸드폰은 메모를 남기기 위해 버려 두고 왔다. 지갑을 비롯한 소지품은 납치당하는 사이에 놈들이 고속도로 어딘가에 버려 버렸다.
땡전 한 푼 없는 신세로 산골짜기에 처박혀 있자니 처음 여기에 돌아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국도로 내려가니 웬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히치하이킹을 시켜 준 덕분에 살았는데, 이번에도 그런 운 좋은 일이 있으리란 법은…….
“어?”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엔 동굴에서 탈출한 납치 피해자 선배님이 길을 잃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치 주변을 수색하는 듯한 움직임. 길을 잃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누군가와 마주치도록 길을 헤쳐 나갔더니 수풀을 젖히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네!”
“…센터장님?”
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건 그때 날 태워 준 인심 좋은 할아버지, 나중에 듣기로는 각성자 지원 센터의 센터장이라고 불리던 최강현이라는 분이었다.
“여기까진 어떻게?”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이 사람아. 자네 찾으러 왔지.”
“저를요?”
“그래. 잠깐 연락 좀 돌리고…….”
최강현 센터장이 휴대폰을 조작했다. 이런 오지에서 연락이 되는 걸 보면 극한 상황을 대비해 특수한 모듈을 탑재한 모델이 분명했다.
잠깐 기다리니 멀리서 돌풍을 일으키며 클레어 씨가 달려왔다.
“도율 씨!”
“우왁!”
속도를 거의 줄이지 않고 뛰어든 그녀가 내게 안겼다. 일부러 그런 건지 버틴다고 버틴 건데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나는 양팔을 들어 올려 항복 자세를 하고 조용히 물었다.
“이건 리액션이 좀 과하지 않아요? 이러다 스캔들 나겠다.”
“다 말했어요.”
“말했다니, 뭘요?”
“우리 결혼했다고.”
“…진짜요?”
클레어 씨가 조용히 설명했다. 센터의 수색 집단을 빌리기 위해 센터장과 그 측근들에게만 결혼 사실을 밝혔다고. 단순히 매니저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타이틀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일부라고는 하지만 이 사실을 남들에게 밝힐 날이 올 줄이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각오는 했지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내가 한 짓 때문이라서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도움을 준 센터장님께 감사 인사라도… 하고 바라 봤지만, 그는 가까이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강현 센터장은 끌어안은 채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둘의 모습을 보며 코 밑을 문질렀다. 젊은이들끼리 좋은 시간 보내라며 슬쩍 빠지는 것까지.
“저기, 클레어 씨. 이제 보는 사람 없는데요.”
“…….”
“혹시 기분 탓이 아니라면, 화났어요?”
내가 묻자 클레어 씨가 고개를 들고 노려봤다.
“그럼 칭찬받을 짓을 했다고 생각하나요?”
“…잘못했습니다.”
어쩐지 몸통을 조르는 팔 힘이 여간 기합이 들어간 게 아니더라고.
클레어 씨가 날 이 정도로 걱정할 줄은 몰랐다. 그 인간쯤이야 납치당해서 죽든 말든, 어차피 혼인 관계가 깨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고 생각할 줄…….
아니, 사실 그러지 않을 줄 알았다. 클레어 씨는 쌀쌀맞은 태도를 내비치긴 해도 정이 많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내 사과에 클레어 씨가 고개를 저었다.
“…도율 씨 잘못이 아니에요.”
이거 봐. 사람이 착하다니까.
“다 내 잘못이에요.”
그 정도는 아니고. 나도 조금 멋대로 굴긴 했다. 통보만 남기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내가 똑바로 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었죠, 뭐.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으니…….”
“아뇨.”
클레어 씨가 말을 끊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러게요?”
조심스럽게 장난을 걸어 봤지만, 클레어 씨는 평소처럼 화내지 않고 서늘하게 웃었다. 낯선 반응.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멋대로 굴 생각 자체를 못 하게 해야 했는데.”
“…….”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거 납치범한테 하는 얘기 맞지?
* * *
다음 날.
클레어 씨는 검은색을 기조로 한 의상을 입고 집을 나섰다. 원래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어두운 코디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오늘은 그녀가 기자 회견 겸 대국민 사과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에 맞춰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의상을 고른 것이다.
이유는 그녀가 S급 던전 공략의 사전 점검 스케줄을 생깠기 때문이다.
S급 정도 되는 던전의 공략은 단일 단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길드의 내로라하는 헌터, 협회 최고의 실무진들이 손발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요약하자면 헌터 업계의 올스타전.
물론 그 올스타들의 올스타, S급 헌터인 클레어 씨 정도 되면 뻔뻔하게 나간다 해도 대놓고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S급 헌터들 하는 짓 보면 애초에 사전 점검을 제치는 사람도 많았고.
하지만 워낙 성실한 그녀이기에, 굳이 사과를 하겠다는 것이다.
“…….”
기자 회견장까지 운전하는 동안 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이게 모두 나 하나를 찾겠답시고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최강현 센터장이 무마해 주겠다는 말을 꺼냈지만, 클레어 씨가 거절했다. 이 이상으로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도은이도 사과하겠다는 클레어 씨를 말리지 않았다.
[언니는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 어차피 여론 반응도 나쁘진 않을 거야. 평소에 잘하잖아? 다른 애들은 개판이라고, 개판. 이 정도면 선녀다.]“그렇다면 다행이고.”
[근데 내가 빡치는 건 왜 두 사람 다 나한테 이유를 말 안 해 주냐 이거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 봐. 오빠도 알지?]“…미안, 끊는다.”
[야! 너 내가 이러라고 매니저 시켜 준 줄…!]도은이의 외침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 가볍게 옷매무새를 만지고 온 클레어 씨와 함께 기자 회견장으로 입장했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들고 온 기자들이 기자석에 앉아 있었다. 자리는 거의 만석이었다. 뻔한 사과라 해도 S급 헌터의 행보는 그 자체로 기삿거리가 되니까.
클레어 씨가 단상에 올라섰다. 나는 거리를 두고 회견을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단상에 올라선 클레어 씨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보통 기자 회견이란 건 기자를 불러 모은 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고, 이후에 질문을 받는 순서일 텐데.
기다리다 못한 기자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저, 클레어 씨? 하실 말씀은?”
클레어 씨가 좌중을 둘러보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거 쓴다고 기삿거리가 되나요?”
“……?!”
클레어 씨가 가리킨 건 단상의 뒤에 달린 현수막이었다. 그곳엔 S급 헌터 클레어 컴벨 사과 기자 회견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현장에 있는 기자들이 모두 고개를 쳐들고 클레어 씨를 주목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퉁한 답변. 이미 그 자체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시선이 모인 직후 그녀가 다시 물었다.
“드릴까요? 화제가 될 만한 소식.”
“어떤……?”
한 기자가 묻자 현장엔 다시 적막이 자리했다. 클레어 씨의 입에서 나올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왠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혀로 입술을 축이는 모습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적막의 한가운데에 클레어 씨가 폭탄을 터뜨렸다.
“저 결혼했습니다.”
…여파는 어마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