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피는 피로
“일어나라.”
촤악!
차가운 물이 도율의 얼굴을 때렸다. 덕분이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긴…….’
도율이 있는 곳은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이었다.
벽이나 바닥이 돌으로 되어 있었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출입구는 쇠창살로 막혀 있고, 팔은 철로 된 구속구에 묶여 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설마…….’
가문의 감옥이었다.
간혹 눈이 돌아가 가문의 패물에 손을 대거나 가문의 인간에게 무례한 짓을 한 자들이 잡혀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자신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두워서 희미하긴 하지만, 눈앞에는 간수로 보이는 인간도 한 명 있었다.
‘…상처는?’
도율이 고개를 돌려 화살에 찔린 자리를 살펴봤다.
이미 한번 죽다 살아난 거라면 화살에 찔린 상처도 깨끗하게 나아 있을 터였고, 병사들의 증언과 맞물리면 의문을 낳을 수도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통증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프다고 생각하면 아팠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것도 같았다.
‘어차피 시간문젠가.’
감옥에서 천년 만년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사형을 받아도 평생 구치소에서 썩는 것과 같았던 한국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죄수를 수감하는 것도 귀중한 자원이 계속 소모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죄인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 방침이었다.
그때 바람의 흐름이 거세졌다.
‘…문을 열었나?’
아니나 다를까, 조용하게 죽였지만 미처 숨기지 못하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갇히는 걸까. 그렇다면 설마 장양이 따라잡힌 건가.
‘아니라고 해 줘라.’
그래서야 모처럼 잡힌 보람이 없다.
발걸음 소리는 도율의 앞에서 멈췄다. 이제 보니 새로 들어온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주위에 사람을 대동한 누군가였다.
그 남자가 엄숙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해라.”
뭘 말하는 거지?
도율의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그들의 주위에 선 누군가가 쇠창살을 열고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는 손에 날붙이를 들고 있었다.
“잠……!”
남자의 칼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남자의 억센 손은 도율의 몸부림을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다.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이건…….’
바닥 위를 꿈틀거리며 도율이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깨달았다.
‘처형이 아니다.’
죄인을 처형하는 걸 이렇게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마구잡이로 할 리가 없었다.
본보기를 보여야 할 놈이라면 해가 떠있는 대낮에 다른 놈들을 불러 놓고 공개적으로 처형하지 않던가.
이런 식으로 정육점 고기처럼 단순히 멱을 따는 건, 무언가 보고 싶은 게 있다는 뜻.
도율이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정체를 들킨 후였다.
“놀랍군.”
놈들은 이미 도율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분명히 심장을 찔렀을 텐데, 상처 하나 없이 나아 있군.”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도율은 남자가 웃고 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좋은 소재가 들어왔군.”
분명히.
* * *
그날 이후 도율의 몸은 실험체로 사용되었다.
인체 구조.
사람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디가 약하고 강한지 파악하기 위한 재료였다.
강한 적을 손쉽게 무력화하려면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반대로 가능한 손상을 가하지 않고 제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는 소리 소문 없이 죽이려면.
그를 통한 암기(暗器)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작은 크기로 보관하고 숨기기에 용이하지만, 사람 하나 죽이기엔 충분한 역할을 하는 날붙이들.
자연스레 독에 대한 실험도 이루어졌다.
어떤 독이 어느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사지를 마비시키는가, 내분비에 장애를 일으키는가, 눈과 귀를 멀게 하는가. 며칠에 걸려 어느 정도의 효력을 발휘하는가.
또는 단숨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자네는 최고의 실험체야.”
도율이 있는 방에서 독약을 제조하고 있던 사내가 문득 중얼거렸다.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 한 번 죽이고 나면 다시 깨끗한 상태로 돌아오지. 이런 좋은 환경은 좀처럼 없거든.”
덕분에 마음껏 약의 배합을 실험해 볼 수 있었다. 이전의 약이 남아 영향을 줬으리란 예상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
도율이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칭찬이랍시고 하는 거냐.”
이럴 때가 아니면 대화할 기회도 없었다.
며칠은 살려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빌어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것도 질렸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야 했지만, 다시금 되돌아와 선명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덕분에 도율은 고통 그 자체에서 무감해졌다.
세월의 흐름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문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의식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지표는 늘 실험을 하러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던 것인가, 남자는 확실히 늙어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등의 주름이 눈에 띄게 늘었다. 허리도 조금 굽어 있었다.
“그래. 감사하고 있다.”
그렇게 말한 남자가 작은 독약을 하나 꺼내 들었다.
“오늘은 이쯤 하지.”
한 방울이라도 닿자마자 즉사하는 극독. 도율의 덕에 배합에 성공한 가문의 비전이었다.
도율이 한 번 죽음에 이르고 되살아나, 너덜너덜한 몸을 말끔히 고쳐 냈다.
그런 도율이 남자가 준비하는 물건을 보고 물었다.
“뭐지, 그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데에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채혈이다.”
“채혈?”
“그래.”
남자가 도율의 팔뚝에 관을 삽입했다.
투명한 관을 타고 피가 흐르는 것을 지켜보며 남자가 설명했다.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네 모습은 그날 이후로 변함이 없었지. 난 이렇게 늙었는데 말이다.”
“…….”
“가문의 높으신 분들은 모두 네 존재를 알고 있지. 그들이 네가 만들어 내는 암기와 독약에 흥미가 있었지만, 최근엔 그 관심이 옮겨 간 것 같더군.”
불사성, 그 자체.
가문을 지배하는 자들은 도율로부터 만들어 낸 산물들로 세를 늘리고 더 많은 위용을 떨칠 수 있었지만.
가문이 빛나면 빛날수록, 그들의 몸은 쇠락하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세월의 흐름 탓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도율이 가진 불멸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네 피라도 마시면 하루라도 오래 살 수 있을 거라 믿더군. 나는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 답변했다만.”
그래도 명을 거스를 순 없지, 하고 남자가 채혈기에 피가 충분히 모이는 걸 기다렸다.
도율이 문득 물었다.
“너도 마실 거냐?”
“설마.”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고 웃음을 흘렸다.
“설령 효과가 있다 해도 마시지 않을 거다.”
“왜지?”
“왜냐니. 네가 몸소 보여 주지 않았나.”
깊게 파인 눈동자가 도율을 바라보았다.
“불사란, 그만큼의 고통이 뒤따르는 고달픈 인생이란 걸.”
그 말엔 도율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말이 맞군.”
어처구니가 없어서.
* * *
“가져왔느냐?”
“…예.”
남자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누군가 몇 계단 위를 올라간 단상 위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금과 같이 화려하고 호화로운 장식이 달린 의자.
저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이 세가에서 가장 정점에 서 있는 자. 문주였다.
곁에 있던 시종 중 한 명이 문주에게 붉은 비단으로 감싼 병을 양손으로 진상했다.
“오오, 이것이……!”
문주가 손에 쥔 것은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붉은 액체. 피였다.
순서대로 곁에 있던 다른 장로들도 같은 병을 받아 손에 쥐었다. 그들 역시 감히 입을 열지 않을 뿐, 같은 기대에 빠져 있다는 건 뻔히 보였다.
“불로불사의 비약이로구나.”
문주의 말에 남자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건 불로불사의 비약이 아니었다. 단순한 피에 불과했다. 물론 그 피의 주인이 모종의 이유로 되살아나긴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분석을 통해 그 원인을 찾고자 애썼다. 하지만 결국 신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문주는 듣지 않았다.
한때는 문주 역시 젊고 패기 있는 남자였다. 가문을 이끌며 이 지역을 장악하고 맹위를 떨치던 때가 있었다.
남자 역시 그 시절의 문주에게 이끌려 이곳에 묶여 있었다.
‘이젠 끝인가…….’
빛나고 찬란하던 시절은 모두 지났다. 이제는 쇠락할 길만 남은 것인지.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문주가 그리 말하며 도율의 피를 들이켰다. 다른 장로들 또한 문주의 선창을 뒤따라 하며 마셨다.
“음, 그래.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하군.”
변한 건 전혀 없었다.
“이제부터 매일 같은 것을 바치도록.”
* * *
“이봐.”
팔에 채혈기를 꽂은 도율이 물었다.
“이 머저리 짓은 언제까지 하는 거지?”
독약을 마시거나 날붙이로 뼈를 긁는 것보단 편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보짓이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자는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도율이 실험에 ‘협조’해 줬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 낸 수많은 암기와 독약. 그리고 엮어 낸 지식들은 남자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독과 약은 한 끗 차이.
그런 그가 도율을 가지고 이런 저런 짓을 하며 사람 죽이는 방법을 갈구하는 동안, 반대로 사람을 살릴 방법에는 눈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약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나 의료 도구의 개선에도 많이 기여했다.
하지만 도율이 어떻게 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선 알아내지 못했다.
그랬다면 얌전히 포기할 때도 됐는데, 남자는 여전히 피를 뽑아 가고 있었다.
남자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미 실패한 방법을 계속해서 고수하는 것은.
“시끄럽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라는 듯 남자가 투덜거렸다.
“양을 두 배로 늘리라는 지시가 있었다. 한 번에 뽑아내는 건 모자랄 것 같으니, 한 번 죽여 두도록 할까.”
“좋을 대로. 독약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그런 걸 높으신 분들께 바쳤다간 역모죄로 삼대가 멸할 테니까.
이러나 저러나 이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일하게 대화를 한 상대였으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사라지는 건 원치 않았다.
“아니. 감옥 동료가 되려나?”
도율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게 채혈을 마친 남자가 감옥을 떠났다. 발걸음이 바쁜 걸 보니 어지간히도 재촉하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떠나자, 다시 감옥에 혼자 남았다.
어림잡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갖혀 있었지만 탈출할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매번 리셋되니까…….’
감옥에서 운동을 통해 몸이라도 가꿀 수 있다면 몰랐을까. 지금 도율은 나약한 현대인의 몸 그 자체였다.
똑, 똑.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빼 놓고 갔군.”
어지간히 급했는지, 남자는 모인 피만을 들고 갔다. 팔에는 여전히 채혈기가 꽂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피가 다 빠져나가고 나도 다시 살아나겠지.
앞으로도 더 뽑아 둬야 할 것 같은데, 미리 해 둬서 나쁠 것 없어 보였다.
그렇게 스스로 피를 뽑아내고 있으니 눈이 스르르 감겨 왔다. 피가 모자라면 잠에 들듯 죽는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 걸까.
도율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도율의 의식이 사라지고 다시 되돌아오는 순간.
‘…뭐지?’
도율의 몸이 수복하며 피를 갈구했다.
‘목이… 타는 것 같아.’
피가 모자랐다.
도율의 몸으로 피가 모여들었다. 죽기 위해 뽑았던 피가 다시 혈관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모자랐다.
원래 가지고 있던 그의 피는, 감옥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설마……!’
그 모자란 피는 어디에 있든 되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피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도율의 몸 또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목이 아닌 온몸이 바짝 마르는 듯한 감각.
“돌아와라.”
그러자 어디선가 무언가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윽고 도율의 몸으로 모자랐던 피가 모두 되돌아왔다. 갈증에서 해방되는 것과 동시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아랫배에서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 힘을 깨닫자 온몸의 근육과 뼈가 뒤틀렸다.
“……!”
갖은 고통에 익숙한 도율조차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격통이었다.
그렇게 몸을 가누지 않은 채 잠시 시간이 지나자, 고통은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도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이었지만, 주위엔 온갖 악취를 뿌리는 노폐물이 흠뻑 쏟아져 있었다.
환골탈태.
도율의 몸에 들어찬 내공이 격에 맞지 않는 몸뚱이를 강제로 뜯어고친 것이었다.
평소엔 꿈쩍도 않던 쇠창살을 간단히 구부리고 나왔다.
장원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율은 느긋하게 숨을 쉬었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공기였다.
지금부터 뭘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당한 게 있으면 그만큼 되갚아 줘야 하는 법. 도율은 현대인이었고 사적 제재는 틀렸다고 배웠지만.
이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다른 세상은 다른 법칙이 필요했다.
단순하고 원초적인 세상에서 필요한 건 보다 단순한 법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는 피로.”
혈마(血魔)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