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여기까진가
“저쪽이다!”
한 차례, 칼을 찬 자들이 수풀을 꺾으며 달려가는 소리가 지나갔다.
커다란 나무 기둥 뒤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도율이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품에 안고 있는 짐덩이가 미약하게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들의 행색을 곁눈질로 훔쳐본 도율이 떠올렸다.
‘정규군은 아니겠지.’
가문의 병사들은 모두 그럴싸한 갑옷과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반면 방금 지나간 자들은 모두 가지각색의 복장에 날붙이 하나만을 쥐고 있을 뿐이었다. 행색도 꼬질꼬질한 것이,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가문이 옮기고 있는 보물을 노리는 산적들이었다.
‘짐만 주면 살려 준다… 같은 일은 없겠지.’
간간히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도율은 아무에게도 모습을 들켜선 안 된단 사실을 알아챘다.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일개 표국도 아니고, 거대 세가에서 행하는 일에 칼을 박은 멍청이들이다. 얼굴이나 복색을 증언할 목격자는 남겨 두지 않는 게 좋았다.
‘그것도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세가라면 단서가 많든 적든 이놈들을 추적해 모두 멸해 버릴 터였다.
그런 머저리 불나방 같은 짓을 할 정도로 이들이 옮기고 있는 물건에 가치가 있다는 것일까.
‘도대체 뭐였길래…….’
이놈들 역시 나름대로 믿을 만한 배후가 있기에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일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정황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 본들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주위 정황을 확인한 도율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한 장소에서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추격전 따윈 처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무사히 도망치고 나면…….’
세가로 돌아가야 하나?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지금까진 밥 잘 나오고 잠 재워 주는 제법 도의적인 놈들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 목숨을 길가 돌멩이만도 못하게 흩뿌리는 놈들일 줄이야.
어쩌면 첨성각이란 곳에 들어가게 된다 해도 처지가 크게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얼굴도 모르는 높으신 분들을 위해 일하다가, 여차할 땐 목숨조차도 빼앗기는.
‘세상사 어디나 똑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쪽은 좀 더 노골적이었다.
쐐액!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직후, 도율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쭈뼛하게 서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퍼억!
“커억…….”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사람 주먹만 한 돌이 주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건…….”
말도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워 나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보따리 따윈 이미 손에서 놓쳐 지저분한 바닥 위로 널브러진 지 오래였다.
지금 바닥에 쓰러지는 건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런 곳에 쥐새끼가 숨어 있었구만.”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손에 짱돌을 야구공처럼 던지고 있는 산적 한 명이었다.
날붙이조차 구하기 쉽지 않아 몽둥이로 대신하고, 돌멩이와 같이 산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다루는 놈들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빗나가면 너만 아프다.”
산적이 남은 돌을 던져 도율을 끝장내려 하고 있었다.
도율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퍼억!
무언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오고, 도율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까와 같은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단숨에 죽어서 편해진 건가. 그렇다기엔 허리의 통증은 여전했다.
도율이 의아하게 눈을 뜨자, 거기엔 몽둥이를 들고 피에 젖은 장양이 있었다.
장양은 쓰러진 산적의 머리를 몇 번 더 내리치고는 침을 뱉었다. 도율이 눈을 떴단 걸 알아채곤 외쳤다.
“뭘 졸고 있어! 튀자!”
“너…….”
“고맙단 말은 일단 됐고.”
사람을 때려 죽이는 모습에 뭐라 할 때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율이 죽었을 테니까.
그런 장양의 등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팔뚝만 한 칼을 찬 남자였다.
그가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발을 뻗으면 장양의 등이 닿을 위치였다.
정말 급할 때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남자가 마지막 한 걸음을 크게 내딛는 것과 동시에 팔을 뻗자, 도율이 장양을 밀쳐 냈다.
푹!
도율의 몸에 칼이 박혔다.
“이… 이런 씹!”
남자에게도 의외의 상황이었다. 이미 돌을 맞고 제정신이 아닌 놈은 나중에 천천히 정리할 수 있다. 무기를 들고 있는 장양부터 처리해야 했다.
장양이 바로 몸을 일으키고 남자의 머리통울 후려갈겼다.
퍽!
“야, 얌마! 너 괜찮냐?!”
“그래…….”
“이런 씨발, 피가……. 쫌만 참아! 가문 놈들한테 돌아가자. 아무리 개새끼들이어도 환자는 받아 주겠지…!”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도율이 눈을 감았다.
“야! 자지 마! 눈뜨라고!”
장양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도율의 눈이 떠지는 일은 없었다.
“젠장…….”
장양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잠시 후, 도율이 기침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쿨럭! 켁!”
입에서 피거품을 몇 번 토해 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너?”
장양이 도율의 얼굴과 몸을 번갈아 쳐다봤다. 분명히 칼에 찔린 상처가 있었고, 피도 잔뜩 흘렸는데.
옷은 여전히 찢어져 있었지만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러게 괜찮다니까.”
장양이 눈을 꿈뻑였다.
* * *
도율이 그걸 처음 깨달은 건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맨몸으로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속을 헤매다가 야생 동물을 만나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도구 하나 없는 사람 몸으로 짐승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곧바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지만.
‘…살아났다.’
분명히 되살아난 것이었다.
운이 좋게 짐승 녀석이 흥미를 잃고 떠났다 하더라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였다. 그러나 도율은 멀쩡한 상태로 살아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남들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것을.
‘지금 난 친구도, 가족도 없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휙하고 사라져도 찾지 않는 인간.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도율은 특히나 더 그랬다.
어딘가에 붙잡혀 실험이라도 당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푼돈을 받더라도 위험하지 않은 일만 하고, 최대한 안전한 환경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불가피하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만.
‘괜찮겠지.’
어차피 본 사람은 장양뿐이었다.
노비 생활을 청산하고 나면 목돈을 마련해 장사를 하러 떠날 녀석이었다.
몸을 숨기거나 도망치거나 해서, 결국 도율은 다시 가문의 품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짓을 당하고 나니 더는 여기서 지내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노비 신분은 떼야지.’
그렇게 해서 자유로운 평민이 되고 나면 여길 떠날 생각이었다. 떠나고 나서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장양을 따라 장사나 할까.’
같이하자고 권하기도 했었고. 요리라면 싫어하지 않았다. 재능은 없어도 꾸준히 하다 보면 늘기야 하겠지.
그렇게 미래에 대한 설계를 하고 있을 무렵, 잠에 들었던 날 밤.
누군가 도율을 조용히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라.”
“장양?”
도율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뭐야, 이 시간에. 내일 비번은 못 바꿔 준다.”
“도망쳐야 돼.”
“뭐?”
“지금 당장.”
무거운 목소리. 도율은 금세 잠을 쫓아내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설명할 시간 없다. 얼른 따라 나와.”
장양의 말에 따라 도율이 몰래 노비들의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말한 장양이 향하는 곳은 울타리의 바깥이었다.
“설마 정말 도망치는 거냐? 여기로부터?”
가문의 울타리 바깥으로.
도망치자는 말로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가문으로부터 도망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도율의 물음에 장양이 잠깐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실행에 옮겨야 한다면 서둘러야 했다.
“가면서 설명할게.”
그렇게 담을 넘어 바깥에 펼쳐진 도로를 지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숲속으로 도망쳤다.
어두운 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숲속을 헤메는 건 상당히 지치는 일이었다.
그래도 제법 멀리까지 나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도율이야 크게 미련을 가지지 않고 있었지만. 장양은 머지않아 큰돈을 받고 독립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장사 밑천으로 삼기 위해 몇 년이나 노비로 일해 왔던 것인데, 이제 와서 도망친다니.
“몰래 들었다.”
“뭘?”
“저번 습격에서 살아남은 노비들을 모두 제거하겠단 말을.”
“왜?”
도율이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에서는 귀중한 물건을 옮기기 위해 대대적으로 커다란 행진을 시켜 놓고, 도중에 습격이 일어나자 노비들을 미끼 삼아 도주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살아남아 돌아온 자들도 몇몇 있었다.
도율과 장양 역시 그들 중 하나. 다른 산적의 눈을 피하거나, 몰래 습격하거나 하며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걸 봤는데, 살려두겠어?”
“…….”
확실히, 기분 더러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어딘가에 고발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관아는 힘 있는 자들의 편이었고, 이 시대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가문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달랐던 듯했다.
그날 미처 처리되지 않고 돌아온 찌꺼기들은, 계속 품고 있는 것도 걸리적거리니 모두 한 번에 제거하라.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게 장양의 설명이었다.
“쓰레기들이…….”
힘없는 노비들이 제아무리 분노한다 한들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단은 없었다.
결국 장양처럼 도망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다.
“그나저나 아깝게 됐네.”
“…뭐가?”
“넌 얼마 안 있으면 기간 만료였잖아. 목돈을 모아서 장사를 할 생각이었다며. 지금 이렇게 빈털터리 신세로 도망치게 됐으니.”
“아…….”
도율의 말에 장양이 쓰게 웃었다.
“그건 괜찮아.”
“하긴. 목숨이 먼저지.”
그렇게 납득한 두 사람이 어두운 숲속을 나아갔다.
도율은 이런 어두운 숲속을 헤매 본 경험이 적어 어디로 나아갈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장양도 잘 모르는 걸지도 몰랐다.
‘…같은 곳을 헤매는 것 같네.’
차라리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때 숲에 은은한 불빛이 비춰졌다. 열기와 함께 느껴지는 불빛은, 기름을 두른 횃불이었다.
“찾았다.”
쐐액!
나무 줄기 사이를 휘어지듯 화살이 찔러들어왔다.
“컥!”
도율을 꿰뚫은 화살이 뒤에 있는 나무에 박혔다. 몸을 관통당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피에 젖은 손으로 화살대를 잡아 보아도, 도저히 부러뜨리고 빠져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장양이 일그러진 얼굴로 도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
도율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이번엔 말을 할 수 있었다.
“난…….”
“…알잖아.”
도율은 죽는다 하더라도 살아날 방법이 있었다.
물론 이들에게 잡혀간 후에 살아난다면, 제법 많은 이들이 그 비밀을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기회는 더 있었다.
지금 여기서 잡히면 안 될 사람은 장양이었다.
“그러니까, 가!”
도율의 외침에 장양이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렸다.
“후우, 후우…….”
도율이 마음을 가다듬고 화살대를 붙잡았다. 손이 떨렸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크악…!”
화살대를 부러뜨리자 그 충격으로 상처가 더욱 쓰라려 왔다. 이판사판으로 몸을 내동댕이치자 몸에 박힌 화살은 빼낼 수 있었다.
“크윽…….”
도율이 바닥 위에 웅크렸다. 머리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달음박질해야 한다는 걸 알아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도율의 머리 위로 그림자들이 하나둘 드리웠다.
‘여기까진가…….’
횃불을 든 병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