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살아서 보자
“이건 기회야!”
장양이 소리쳤다.
“…뭐가.”
도율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소문이 퍼졌나?
도율은 간밤에 각주의 호출로 첨성각의 각주실에 드나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접점도 없었기에 의아했지만, 노비라는 신분을 생각해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각주실에서 들은 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첨성각으로 오라…고.’
첨성각(瞻星閣).
이곳 세가 내에서 첨단 기술을 연구, 개발하는 업무를 도맡는 곳이었다.
‘부잣집에서 왜 첨단 기술을 연구하냐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세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개 가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도율에게는 이들이 일종의 재벌 가문과 비슷한 존재라 여겨졌다.
그렇기에 가문의 업무를 분장하는 각 역시 엄청난 힘과 명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곳에 소속된다는 건 평범한 개인이 바란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일개 노비라면 더더욱.
‘어제 그 질문은 테스트였나.’
대답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듯, 각주는 단숨에 도율을 첨성각에 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의 질문은 대답할 수 있었지만, 정말 첨성각에 들어가서도 제대로 활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도율은 스스로 그 원리를 깨우친 천재 수학자가 아니라 고등 교육을 받은 현대인에 불과했으니까. 그 이상으로 자세한 건 몰랐다.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아니, 나중에 거짓말 했단 게 들통나면 분명…….’
경을 쳤을 것이다.
탄탄한 장래가 정해져 있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한낱 노비 신세에서는 입 밖에 꺼내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이래저래 골치가 아픈 상황.
“뭐야! 너 소문 못 들었냐?”
“무슨 소문?”
도율이 자기 얘기가 나올까 봐 노심초사하며 물었다.
생각해 보니, 도율에 대한 소문이라면 장양이 저렇게 남의 이야기처럼 꺼낼 리는 없었지만.
“이번에 큰 건이 온댄다.”
“큰 건?”
“그래.”
흥이 잔뜩 올라 떠벌리듯 말하듯 장양이, 이번엔 소리를 죽여 말했다.
“큰돈 만질 수 있는 건.”
“큰돈?”
도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쪽 세상에 야근 수당이나 인센티브 같은 개념은 전혀 없었다. 노비는 얼마나 열심히, 오래, 잘하든 말든 받는 삯에는 하등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돈을 만질 수 있는 건이 생겼다고 하면, 의심부터 갈 수밖에 없었다.
“노름이라도 하는 거냐?”
“설마. 있는 돈도 털릴 일을 하겠어?”
그렇게 말한 장양은 호탕하게 웃어 제끼다가 웃음이 말랐다. 있는 돈 털린단 얘긴 경험담인 듯했다.
“아무튼, 확실하게 돈 벌 구석이 있다, 이 말씀.”
“뭔데?”
도율은 큰돈 따위에 관심은 없었지만, 물어보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바람 잡고 있을 게 뻔했기에 냉큼 물었다.
장양이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잘 물었다. 이건 아직 비밀인데…….”
장양이 도율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노비가 알 정도라면 이미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나 싶지만, 잠자코 들었다.
“이번에 아주 귀한 물건을 전달할 거라는 말이 있더라고.”
“설마……. 훔칠 거냐?”
“말조심해!”
장양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걸 훔쳤다가 제 명에 살 수나 있겠냐? 죽을 때까지 쫓겨 다닐 텐데.”
“그럼 뭔데.”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 대규모 편성을 할 거란 말이지. 근데 기존 인원으로는 인력이 모자라서 자원자를 모아서 충당할 거란 얘기가 들려오더군.”
확실히.
세가에선 연구, 개발을 주로 하는 첨성각이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중요한 물건을 운송하거나 요인을 호위하는 일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크게 투자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따금 이런 일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럼 자원자를 받아서 보수를 두둑히 나눠 준다더군.”
“노비는 차출 아닌가?”
“아니.”
장양이 고개를 저었다.
공짜로 부리기 위한 노동력이 곧 노비인데, 왜 굳이 자원자를 구하는 것이며 보수는 왜 따로 지급하는 것인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사명감을 갖고 일하란 의미에서 특별히! 보수를 지급하는 건이라고.”
장양은 쉽게 오지 않는 기회라며 신이 나서 떠들었지만.
도율은 썩 달갑지 않았다.
‘줄 수 있었으면서…….’
지금까지 해 온 고된 노동들에는 따로 보수를 지급받은 적이 없었다. 알긴 알면서 주지 않았다는 점이 더 열받았다.
“넌 여기서 나갈 때 큰돈을 받고 나가겠다며. 그런데도 보수가 탐이 나나?”
“당연하지. 사업 밑천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러던 장양이 도율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 같이 큰돈 한번 만져 보자고.”
“관심 없다.”
“아, 왜?”
“돈 쓸 데도 없고.”
“쓸 데가 없긴 왜 없어?”
정말이었다. 노비 신분에, 필요한 건 사실 가문에서 모두 제공해 주니까.
매달 들어오는 적은 돈으로도 적당히 버티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래도 군 생활을 한 번 견뎠기 때문일까.
이유를 찾지 못하는 도율에게, 장양이 도율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말했잖아. 사업 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도율이 장양을 바라보자,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역시 그게 목적이었군.”
도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젠장.”
도율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보수 좋아하시네.”
도율이 앞장서 걷고 있는 장양의 등을 노려봤다.
뒤에서 들리는 도율의 중얼거림을 들은 장양 역시 투덜거렸다.
“낸들 이렇게 될 줄 알았냐.”
그렇다. 이렇게 된 게 장양의 탓은 아니었다.
도율과 장양은 지금 기나긴 행렬에 섞여 행군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후좌우로도 같은 노비들이 고된 걸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보다 앞, 혹은 뒤에는 갑옷과 칼을 찬 이들이 걷고 있었다. 간혹 가다 말을 탄 자들 또한 눈에 띄었다.
이게 바로 그 장양이 말했던, 귀한 물건을 옮길 일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보수? 무슨 헛소리냐.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니란 점이었다.
노비들은 누구나 선택권 없이 이 긴 행렬에 참가해야만 했다. 장양도 그 말을 들었을 땐 나라를 잃은 표정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땡볕에 의미도 없는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 귀한 물건이란 건, 코빼기도 못 봤고…….’
도율의 곁에도 짐수레를 끄는 나귀들이 있었다.
짐칸은 보자기로 덮여 가려져 있었지만, 무언가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을 거라는 짐작은 되지 않았다.
수레라면 앞뒤로도 길게 이어지고 있었으니.
‘위장이겠지.’
똑같은 짐수레를 여러 개 늘어놓아,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겉보기로는 알 수 없게 해 놓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곤 해도…….’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중요한 물건이라면 믿을 만한 자들에게 맡겨 조용히 옮길 것인지, 아니면 최대한 많은 인력을 끌어들여 안전하게 옮길 것인지.
그중에서 후자를 골랐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아주 난리를 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로 대대적인 행렬이라면, 관심이 없던 자들이어도 무언가 귀하고 값진 보물이 숨어 있을 것이란 건 짐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에 반해 주변을 지키고 있는 건 정규 병사들도 아닌, 대부분이 노비. 제대로 싸우는 법도 모르는 자들인데.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습격이다!”
그 말에 매가리 없이 걷던 자들의 고개가 번쩍하고 들렸다.
사람들의 불안에 떠는 눈빛이 주위를 살폈다. 습격이 왔다지만 근처엔 다른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잘 붙어 있으면 칼 맞아 죽을 일은…….
그러나 병사들은 진형을 갖추지 않고 짐수레의 보자기를 벗겼다.
짐수레에는 적당한 크기의 보따리들이 놓여 있었다. 병사들이 각자 그걸 하나씩 꺼내 주위에 있는 노비들에게 건넸다.
“받아라.”
“예……?”
노비들이 얼떨결에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보따리를 받은 노비들을 향해 병사들이 칼끝으로 지시했다.
“도망쳐라.”
병사들의 눈은 차가웠다.
노비들이 보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에선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안에 패물 따위가 들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 걸 노비들에게 나눠 주며 도망치라고 할 리가 없으니까.
이건 습격한 자들의 주위를 돌리기 위한 미끼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노비들이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죽겠느냐?”
그러나 병사들이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물어보면, 당장은 잠자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가……!”
“나, 난 여기서 3년이나 일했는데…….”
그런 하소연도 소용이 없었다.
“가라!”
그 말을 듣지 않은 이들은 모두 본보기로 칼침을 맞았다. 안 그래도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부상을 입었다간 더욱 가망이 없었다.
결국 노비들은 병사의 말대로 각자 보따리를 짊어지고 사방으로 퍼져 도주했다.
“다음!”
도율도 누군가 등 뒤를 가격해 짐수레에 다가갔다. 그다지 무겁진 않은, 그러나 요란한 소리가 나는 보따리를 받았다.
‘이게 뭐지?’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이런다고 의미가 있나?’
행렬을 습격한 산적들이 일일이 짐을 들고 있는 노비들을 쫓을까? 진짜 귀하다는 물건을 정말 이 짐수레들이 싣고 있던 보따리 안에 숨겨 둔 걸까? 도망치는 도중에 버리고 달아나면 되는 거 아닌가?
“움직여라! 어서!”
병사가 도율을 향해 재촉했다. 도율이 선뜻 발을 떼지 못하자 칼끝이 날아들었다.
“튀어!”
그 손을 잡고 움직인 건 장양이었다.
다행히 병사들은 발을 놀리는 두 노비를 보며 뒤쫓아 오지는 않았다. 이들이 달아나게 두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니까.
재빠르게 달려 거리를 벌린 장양이 나무 뒤에 숨어 숨을 골랐다.
“일단 보따리는 꽉 묶어 둬. 그래야 그나마 소리가 덜 날 테니까.”
“…이게 뭐 하자는 짓인 거지? 버리고 도망치면?”
“멍청아.”
장양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린 노비 신분이다. 평민이 되려면 가문의 허가가 필요해. 이 보따리를 들고 가지 못하면 쫓겨날 테고, 그때부턴 일자리도 잠자리도 없는 떠돌이가 되는 거야.”
그나마 커다란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덕분에 밥도 나오고 몸 누일 공간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간이 끝나고 나면 보수와 함께 평민의 자유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문의 물건을 내팽개치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친다면. 앞으로 가문의 비호를 받는 것조차 끝이라는 의미였다.
“뭐, 나중에 이 산을 뒤적거리며 멀쩡한 보따리라도 다시 찾는다고 치면 모르겠지만……. 과연 남아 있는 게 있을지.”
행렬을 습격한 산적들이 일단 보따리란 보따리는 죄다 가져갈 게 뻔했다.
그렇다고 산적 소굴에서 보따리를 되찾아 가문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지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숨어 있을 수 있길 기도하는 게 나았다.
“아무튼. 지금부턴 따로 행동하는 게 나을 거다.”
장양이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럼, 살아서 보자.”
장양이 먼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있던 도율이 자신의 보따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걷기만 해도 힘든 산길을 마구 달려서인지, 날붙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어서인지. 갑작스레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전신으로 뜨거움이 용솟음쳤다.
“그래.”
개같은 상황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 소일거리나 하면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 노비 생활을 청산하고 평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노비 생활이 끝나고 나면, 그 잘났다는 첨성각에 들어가 어떻게든 아는 지식을 활용해 출세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산속에 버려져 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다시 짚어 보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의 목표는 명확했다.
“살아서 보자.”
살아남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