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29
229화 기다리고 있도록
“이젠 제법 익숙해진 것 같네.”
“뭐가?”
“이쪽 생활 말이야.”
남자의 말에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도율은 지금 새끼를 꼬고 있었다.
얇고 가느다란 지푸라기들이라도 열심히 모아서 꼬아 놓으면, 굵고 튼튼한 줄이 되기 마련이었다.
요즘 세상에 이런 걸 만들어서 어디다 쓰는지.
그런 의문이 가신 지도 오래였다. 그야 이곳엔 도율이 알고 있는 것처럼 증기 기관이나 산업 혁명, 마석학 따위가 발전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네.”
도율이 수긍하자 남자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게 다 이 장양 님 덕분 아니겠어?”
“그래, 맞아.”
“너무 대충 대답한다, 인마.”
장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도율은 대충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
도율에게 이곳은 생소한 세상이었다.
균열을 넘었을 때 도착한 장소는, 던전 내부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운 광활한 산속이었다. 몬스터를 만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곳엔 몬스터 자체가 없는 걸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말도 통하지 않고 시대도 전혀 다르단 것이었다.
‘옛날 중국… 같은 건가.’
역사적 지식이 해박하지 않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알고 있는 지식도 쓸모가 없고, 몸에 익힌 기술도 없어 구걸이나 하며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감집 노비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노비라고 해서 나쁠 건 없지만.’
밥은 제때 나오고 불합리하게 매질을 당하는 경우도 없었다.
하는 일은 대부분 수공업. 기계가 없는 세상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대부분의 노동력을 충당하고 있었다.
이방인인 도율치고는 상당히 좋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말에 익숙해진 건 확실히 이 녀석 덕분이기도 하지.’
옆에서 같이 새끼를 꼬고 있는 동료 노비, 장양.
이 녀석은 손과 입에 머리가 하나씩 달린 건지 일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놈이었다.
이곳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해 기본적인 의사소통밖에 하지 못할 때도 장양은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도율과 이야기하고자 부단히 애썼고.
피곤하긴 했어도 덕분에 훨씬 빠르게 이곳 말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 이 싹퉁머리 없는 놈. 넌 진짜 나 없으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 걱정.”
“1년 정도 남았다고 그랬나.”
“그래!”
장양이 득의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도율이 알기로 이곳의 노비는 평생 노비로 살아야 하는 그런 게 아니라, 일종의 장기 근속 계약으로도 다뤄지는 점이 있었다.
장양의 경우는 몇 년을 일하고 목돈을 받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목돈을 마련해서 그 돈을 기반으로 저잣거리에 만두 가게를 차린다고 했던가, 국수 가게를 차린다고 했던가.
헷갈리는 건 도율의 기억력 탓이 아니었다. 장양의 말이 늘 바뀌는 탓이었지.
“넌 어쩔 거냐?”
장양의 물음에 도율의 손이 느릿해졌다.
‘난…….’
딱히 계약 기간을 정한 것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주워 온 신원 미확인 이방인에게도 자유가 있을지.
나가겠다고 하면 붙잡을 것 같진 않지만, 나간다고 해도 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여기서…….”
“뭐?”
도율의 말에 장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야, 인마! 사내 자식이 그게 뭐야! 꿈을 크게 가져야지, 꿈을!”
“…….”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장양이야말로 특이한 편이었다.
노비 처지가 그나마 낫다곤 해도 고된 일투성이였다. 아무리 목돈을 모을 방법이라곤 해도 자진해서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몇 년씩이나.
도율이 원래 있던 세상에서나 꿈을 크게 가지라는 말이 보편적이었지, 이곳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현직 노비가.
“없냐? 꿈.”
없었다.
도율은 아직 이 세상을 잘 알지 못했다. 시대가 다른 만큼 알고 있던 것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이곳에서 스마트폰 같은 걸 만들어 떼돈을 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걸 바닥부터 만드는 방법 따윈 몰랐다.
흐르는 대로 살 뿐이다.
꿈이 있다고 한다면…….
‘고향에 돌아가는 것 정도일까.’
“생각 없으면 나랑 같이 장사나 하자.”
“내가?”
“그래. 너 말이야, 너. 여기 우리 둘 말고 누가 있다고.”
하긴. 장양의 말대로, 좁은 방 안에서 남자 둘이 새끼나 꼬고 있는 처지였다.
“난 장사 같은 거 해 본 적 없는데.”
“그래도, 너 저번에 말하지 않았냐. 아버지가 숙수(熟手)시라고.”
“그렇긴 한데…….”
도율은 아버지에게 요리로 칭찬받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 나름대로 할 줄은 알지만, 장사를 할 정도는 아닌 거겠지.
이곳 입맛에 맞는 만두나 국수를 익히려면 또 시간이 걸리기도 할 테고.
“뭐, 사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럼?”
“넌 머리가 좋아.”
“뭐?”
처음 들어 보는 소리였다.
의아해하는 도율의 반응과 달리, 장양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 왔을 땐 말도 똑바로 못하던 놈이라 몸만 자란 머저리인 줄 알았더니, 은근히 머리를 잘 굴려. 풀이름, 새 이름 하나도 모르는 놈이 주판도 없이 숫자는 마구 주무르질 않나.”
“그건…….”
고등 교육까지는 모두 끝마쳤으니, 당연히 간단한 숫자 계산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렇다고 천재 소리 들을 만한 일은 또 아니었다.
“그 정도 하는 사람은 여기도 있잖아.”
수학은 도율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 정도 하는 사람은 나랑 일 같이 안 하지.”
“그것도 그렇군.”
다만, 그걸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낱 노비 신세에서 벗어난 애송이와 같이 사업에 뛰어들 만한 이들은 아니었다.
“아무튼. 시간은 아직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장양이 등을 두드렸다.
“할 일은 다 끝내고 떠드는 건가?”
“핫!”
하인 한 명이 찾아와 물었다.
하인이라고는 해도 노비들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가 눈을 흘기며 장양과 도율을 살폈다.
도율은 어느샌가 새끼를 거의 다 꼬아 놓았다. 장양의 것은 그렇지 못했지만.
“거기 너. 각주(閣主)님께서 부르신다.”
그가 도율을 가리키자, 도율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이럴 때, 왜냐고 묻는 건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니라는 건 몸으로 배워서 알고 있었다.
*
“왔나.”
“각주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도율이 포권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곳의 인사법은 도통 익숙하지가 않았다.
커다란 가문에는 각(閣)이라는 이름이 붙는 단체에서 각 업무를 보좌한다. 경제, 무공, 학문, 정탐, 그 외에 여러 가지 가문에서 필요한 일들을.
각주라고 한다면 그 굵직한 일들을 총괄하는 자들의 수장이었다.
‘문주가 사장이라고 한다면, 각주는 이사진 같은 거겠지.’
그리고 노비인 도율은 한낱 신입 사원. 아니, 그조차도 아닌 일개 계약직이나 일용직에 가까웠다.
원래 있던 세상에서야 갑질이니 뭐니 하며 언론을 타서 시끄럽게라도 해 줄 수 있었지만, 이런 세상에 그런 게 있을 리는 만무했다.
눈 밖에 잘못 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모가지가 뎅겅.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앉지.”
“…예?”
각주가 의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율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각주와 겸상을 하는 노비라니. 과연 그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인가? 이곳에 와서 몸으로 배운 바에 따르면, 아마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리라.
“앉으라지 않았나.”
하지만 각주의 말에 거스르는 것 또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긴 매한가지였다.
“…예.”
도율이 마주 앉자 시비가 차를 내왔다. 마치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처음 받아 보는 대접에 도율이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각주의 눈치를 보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권하는 것을 사양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테니.
무슨 일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지만 먼저 묻지도 못했다.
그러나 각주는 어떠한 생각인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고뇌의 시간이 지나고,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박식하다지.”
“…아닙니다.”
“내 질문에 답해 보아라.”
각주가 탁자 위로 두 개의 톱니바퀴를 꺼내 놓았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톱니바퀴였다.
각주는 그것들이 맞물리게 놓고서 물었다.
“이렇게, 두 개의 아륜이 맞물리도록 한다면. 이 커다란 아륜 하나가 한 바퀴 돌 때, 작은 쪽은 몇 바퀴나 돌지?”
“잠시 대보아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도록.”
도율이 손을 뻗어 길이를 가늠한 후에 대답했다.
“두 바퀴 정도일 것 같습니다.”
도율의 대답에 각주가 흥미로운 듯 미소를 보이며 재차 물었다.
“어째서냐? 이쪽 작은 아륜은 어림잡아 네 개는 들어갈 크기이지 않느냐? 당연히 큰 쪽이 네 배의 일을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도율이 생각을 곱씹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면적으로 보면 그 정도일지 몰라도, 결국 맞물리는 건 둘레에서이니……. 그 비율대로 움직일 겁니다.”
“과연.”
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하나 더 묻지. 그 둘레가 중요하다고 해 놓고, 너는 이 두 아륜의 둘레를 직접 재지 않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이 큰 아륜의 둘레가 작은 아륜의 둘레의 두 배라는 걸 알았지?”
그건 간단했다. 한국에서는 중학생만 되어도 배우는 내용이었다.
“둘레의 길이는 중심을 관통하는 직선의 길이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두 원의 둘레를 직접 잴 필요는 없다. 지름을 보고 그 비율을 알 수 있다면, 그게 곧 둘레의 비율이 될 테니까.
도율의 대답을 들은 각주가 탁자 위에서 톱니바퀴를 치웠다.
‘…어쩔 생각이지.’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아닌지. 각주는 표정을 가다듬어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노비 생활을 한다고 하였나.”
“…예.”
“원래는 이곳 말도 하지 못했었고?”
“…하늘과 같은 문주님의 은혜 덕에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더 효율적으로 쥐어짜 내기 위해 가르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말을 가르쳐 준 건 사실이었다.
“보통은 말을 배운다 하더라도 너처럼 논리를 펼치거나 예의를 갖추진 못한다.”
“…….”
“노비 생활이 끝나면 뭘 할 거지?”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 들은 질문. 그러나 각주는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었다.
“첨성각으로 와라.”
첨성각.
눈앞의 남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었다.
“하오나…….”
오란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도율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아무리 각주의 명이라 한들, 노비로 일하던 도율이 그곳에 들어가서 잘 어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이 아니다.”
그 점은 각주도 잘 알고 있었다.
“노비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유의 몸이 되면. 그때 다시 부르도록 하겠다.”
각주로서도 당장 탐나는 인재를 들여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러나 노비의 해방에 대한 건 첨성각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각과의 마찰을 빚는 건 수지가 안 맞았다.
정식으로 주어진 기간을 끝마치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누구도 크게 따지지 않을 것이었다.
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기다리고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