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nly Warlock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完)
이름만은 많이 들어봤다.
흑룡의 수호신, 유일하게 길들인 진룡, 왕의 진정한 힘 등등.
하지만 윤준휘가 철이 들 때는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데 마련한 보금자리에 있다 들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말을 꾸며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무시무시한 활약상을 많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건만.
‘전부 진실이었어.’
이제는 한 치의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이런 괴물이라면 무슨 짓을 벌인다 한들 이상할 거 없겠지.
윤준휘를 포함해 모든 이가 새하얀 낯빛으로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파프닐, 오랜만에 일 좀 해줘야겠다. 너무 오래 쉬느라 몸이 녹슨 거 아니지?”
크르르릉!
아무 문제 없다는 것처럼 파프닐이 콧김을 내뿜었다.
그 반응에 왕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민재윤 공작을 바라봤다.
“재윤아, 파프닐이랑 함께 가라.”
“저도 말입니까? 굳이 제가 안 나서도 파프닐이라면 알아서 할 텐데요.”
“전투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파프닐은 죽일 놈 안 죽일 놈을 구분 못 하잖아. 가서 적당히 걸러내고 와.”
“알겠습니다.”
크르륵
파프닐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 거부 반응에도 민재윤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 내가 타는 건 싫겠지. 하지만 폐하의 명령이다. 우리의 주인께서 명령하시는 데 따라야지.”
킁!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콧김을 내뿜은 파프닐이 창가에서 고개를 치웠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연회장이 다시 밝아지자, 민재윤 공작은 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라.”
짧은 인사와 함께 민재윤 공작은 연회장에서 떠나갔다.
쿵, 하고 연회장의 문이 도로 닫히자 이번엔 왕의 시선이 주변국들의 지도자에게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 때문에 잠시 대화가 끊겼군. 자, 이제 다 끝났으니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고.”
“….”
“푸른 매는 이미 의견 표명을 했으니 됐고… 나머지 지도자들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지? 기아스 스크롤에 서명할 건가?”
명백한 협박에 지도자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는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 튀어나갈 자세로 박상구 공작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윤준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박상구 공작은 육체 능력으로 파프닐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 들었는데….’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기에 전혀 믿지 않았던 이야기.
하지만 거짓말이라 단정하기엔 왕과 그 측근들이 너무 많은 걸 보여줬다.
만약 그 소문조차 사실이라면 지금 지도자 곁에 있는 호위대는 아무 의미도 없으리라.
박상구 공작 혼자서 전부 몰살하는 데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을 테니까.
백화의 지도자인 중년 여인, 유미나는 암울한 안색으로 앞에 걸어 나와 말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가벼운 조사를 받겠지.”
“창천과 결탁하여 흑룡을 공격하려 했다는 조사 말입니까?”
왕은 대답 대신 그저 미소만을 내보여줬다.
몇 초간의 침묵 후, 기나긴 한숨과 동시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서명하지요.”
다른 지도자들도 힘없이 끄덕였다.
암살에 성공했다면 모를까 실패한 이상 흑룡이 판을 뒤엎을 명분만 생긴 상황.
여기서 반대했다간 조사란 명목으로 창천과 같이 개미지옥에 끌려 들어가리라.
약소국으로서는 살기 위해서라도 서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명이 끝나자 왕은 씩 웃으며 연회장에 있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군. 주최자로서 면목이 없는 일이다만, 그래도 연회가 끝나기까지 며칠 더 남았으니 마음껏 즐기고 가도록! 청탁은 안 받으니 괜히 뒤로 찾아오지 말고!”
여전히 경박한 말투에 위엄 없는 태도.
그러나 누구 하나 왕 앞에서 비웃기는커녕 숨 한 번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윤준휘마저 그러했다.
연회장에서 떠나가는 왕의 등을 바라보던 중 윤준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예법, 어조, 기품 같은 건 결국 의도적으로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행위.
따라서 특별하지 않은 인간일수록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특별하다는 걸 알고 범접할 수 없는 인간은 그딴 게 필요 없겠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무릎을 꿇게 되건만 예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폐하를 본 감상이 어떠냐?”
상념에 빠져있던 윤준휘를 깨운 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윤준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진솔한 감정을 내뱉었다.
“두렵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윤도준은 씁쓸한 음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누군가에게 굴복했다는 걸 슬퍼하면서도 앞으로 실수할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 같았다.
“잊지 마라. 폐하께서는 무서운 분이고… 결코 대적해서는 안 되는 분이시다.”
“명심하겠습니다.”
재차 강조하는 아버지의 말을 뼈에 새기며 윤준휘는 계속 옥좌를 바라봤다.
****
기분이 이렇게 좋았던 날이 언제였더라.
연회는 진즉 끝나고 밤이 되어도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8년 전 전쟁이 끝난 직후 무미건조한 나날이 드디어 끝난다는 사실에 죽어있던 심장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흥분을 잠재우기 위해서 아껴두었던 술을 꺼냈다.
쪼르륵
술병에서 쏟아진 푸른색의 액체가 유리잔에 담겼다.
언뜻 보면 단순한 음료수 같지만, 이 액체야말로 소모품이면서 유니크급 아이템인 넥타르였다.
한 병을 다 비우는 것만으로도 모든 능력치를 1씩 올려주는 데다 맛도 효과 못지않게 엄청났다.
무심코 맛 때문에 한 병을 비우고도 또 다른 한 병의 뚜껑을 따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나중에 선물로 써먹으려고 간신히 참아냈으나 오늘은 선물이고 나발이고 이 술을 마셔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벌컥
“후우우!”
술맛 좋고!
혀부터 목구멍, 위장에 이르기까지 기분 좋은 화끈함이 전신에 퍼졌다.
나른함이 흥분을 조금 진정시키자 간신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좀 냉정해진 머리로 미래의 일을 생각하려던 순간이었다.
“기뻐 보이시는군요.”
인기척과 함께 서창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벌써 정기 보고를 받을 시간인가.
의자를 돌리자 조금씩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는 서창우가 보였다.
한때 혈기로 가득했던 얼굴은 어느덧 혈기 대신 관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창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곁에 다가와 물었다.
“새로 정복할 땅이 생긴 게 그리 기쁘십니까?”
“기쁘고말고.”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대답이었다.
흑룡의 확장이 멈추고 내부 발전에만 집중한 게 벌써 8년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새로운 세력은커녕 메인 퀘스트조차 나오지 않았다.
답답함에 애가 닳았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어서 시간만 죽이고 있던 상황.
그런데 8년만에 새로운 땅과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기쁘지 않을 리가 있나.
“여긴 지구가 아니야. 확장이 멈추는 건 세계관 그 자체가 멈춘다는 거지. 솔직히 요 8년 동안은 사방이 희뿌연 맵에서 뱅뱅 도는 기분이었어.”
“저도 처음엔 그리 느꼈지요. 분명 뻥 뚫려있는데 만들다 그만둔 오브젝트처럼 갈 수는 없는 그 기분.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과거형이네? 지금은 괜찮아?”
“지킬 게 생겼으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술잔을 다시 기울였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사이 서창우가 과거를 추억하듯 말했다.
“상구 씨야 지금도 혈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만, 대부분 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이가 들었고, 가정이 생겼고, 다른 행복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하기야 도연이도 많이 바뀌었지. 출세라면 눈이 돌아가던 애인데, 아이 생기고부터는 현모양처가 따로 없어.”
“오히려 상구 씨가 등짝을 맞고 산다더군요. 애들도 있는데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요. 참 격세지감입니다.”
격세지감이라.
솔직히 말해서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지.
서창우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말실수를 했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뭐, 폐하께서는 항상 젊은 얼굴이니 늙은 기분이 안 드시겠군요. 라이프 드레인이라 했던가요? 참 부러운 스킬입니다.”
“덕분에 나도 아직 혈기가 넘치지. 옛날 지구에서 육체랑 정신의 상관관계니 뭐니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앞으로도 팔팔할 거야.”
“이토록 많은 걸 얻으셨는데 잠시 쉬어갈 생각조차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서창우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발코니로 향했다.
발코니 너머에는 이전과 비교도 안 되게 발전한 서울이 있었다.
한때 시스템에 의해 주어진 계획 도시는 이제 정말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기사단이 근엄하게 왕궁을 지키고, 치안대가 사방을 순찰하며, 각종 간판을 단 상점은 곳곳에서 보인다.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지만 때로 마찰을 빚고 싸우다 처벌받는다.
어떨 때는 평민끼리 싸우고, 어떨 때는 귀족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어떨 때는 선을 넘은 귀족이 이건 아니라며 소리를 지른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흑룡의 법과 질서를 삶의 일부로 여기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
20년 전만 해도 나와 서창우가 꿈에도 그리던 ‘왕국’이 이곳에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제 만족해버렸습니다.”
발코니에서 감상에 젖은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던 서창우가 입을 열었다.
마치 함께 걸어온 동지에게 죄를 고백하는 듯한 말투였다.
“지구에 있을 때조차 이런 넓은 영역을 마음대로 오간 적은 없었죠. 순수한 국가의 규모로 따지자면 아직 한참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한 인간이 평생 눈에 담을 수 있는 경치는 담고도 남았다 생각합니다.”
“과장이 지나치구만. 겨우 이 정도 땅으로 평생이라니.”
“물론 모험심 가득한 여행자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하지만 사람이란 보통 자신의 거주지와 직장 사이에서 가던 길만 가는 법입니다.”
그러니 아마 지구에 남았더라도 이보다 많은 땅을 밟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창우란 인간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취직한 회사에서 해고되지만 않는다면 평생 한 지역 토박이로 살았을 일반인.
상식이 뒤집히고 모든 게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야망이 생길 일도, 재상이란 지위를 탐낼 일도 없었으리라.
“폐하 덕분에 생전 처음 욕망을 위해서 달려봤지요.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많은 걸 원하게 되었고, 얼마나 더 멋진 풍경이 있을까 기다려졌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났다.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작은 생명체를 품에 안은 순간 서창우는 만족해버렸다.
야망은 이제 잔재만이 남았고 더 얻기 위해 쉴새 없이 달리던 젊은이는 가진 것을 온전히 누리기 바쁜 중년이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원탁에서 모이는 동료 대부분의 열기는 이전만 못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여전하시더군요. 그 누구보다도 많은 걸 손에 넣으셨음에도 아직 부족하신 겁니까?”
“부족하지. 한참 부족해.”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나이가 들었다? 혈기가 죽어? 이제 좀 안주할 마음이 안 드냐고?
아니, 아니, 절대 아니다.
오히려 더 얻지 못해 끙끙 앓던 몸이 이제야 기운을 차리는 것 같다.
“손 한 번 휘저어서 천재지변을 일으킬 만큼 강해지고 싶다. 파프닐과 함께 전설 중 하나가 되고 싶기도 하고. 히포그리프 기사단은 드래곤 기사단이 되는 걸 보고 싶고 저 먼 땅끝의 민족이 내 이름에 벌벌 떠는 황제의 자리도 원하지.”
그뿐이 아니다.
‘라이프 드레인’으로 진화한 마법은 이미 상대방의 생명력을 빨아들여 젊음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한 수준.
그렇다면 언젠가 불로불사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처럼 영웅신 비스무리한 존재로 승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같아서 입 밖에 낼 생각은 없다만.
내 대답에 서창우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얼마나 얻으셔야 만족하실 생각입니까?”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100년 내로는 만족할 일이 없을 것 같네.”
“푸핫.”
서창우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숨죽이고 웃던 서창우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시스템은 폐하 같은 사람을 원한 걸지도 모르겠군요.”
“응?”
“모든 발전은 안주하려고 결심한 순간 멈추기 마련이니까요. 끝없이 욕망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시스템이 원하는 개척자겠지요.”
“흠.”
나는 할 말이 없어서 뺨을 긁적이기만 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긍정했다간 대놓고 내가 선택받은 자라고 하는 꼴이었으니까.
서창우는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폐하. 내일부터는 전쟁 준비로 바빠지실 테니까요.”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창우가 집무실에서 떠나갔다.
홀로 남아 다시 술을 기울이려던 순간,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장 시스템이 원하는 개척자라.’
서창우의 추측이긴 해도 사실이라면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세상이 긍정해주는 욕망이라.
너 원하는 대로 하라고 신이 등을 떠밀어준다면 이보다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까지 시스템이 보여준 행보를 본다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닐 터.
나는 유쾌한 기분에 술잔을 들고 달에 비추었다.
“내 꿈과 이 세계를 위하여.”
건배사와 함께 넥타르가 목을 타고 위장으로 넘어갔다.
그래, 아직 멀었다.
이 목숨이 남아있고 다리도 멀쩡하다면 끝까지 달려야 하지 않겠나.
모두를 이끌고 갈 데까지 가보자.
아직도 넘쳐나는 이 갈증이 채워질 때까지 말이다.
결심과 함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넥타르를 위장에 들이부은 순간이었다.
《메인 퀘스트가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가볍게 등을 떠밀어주는 시스템의 메시지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퀘스트창을 열었다.
자, 이번엔 과연 무슨 보상을 제시했는지 한 번 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