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76
76화 잡았다
클레어가 커다란 코트를 벗자 안쪽에 입고 있던 옷이 드러났다. 그녀는 몸의 라인이 드러나는 타이트한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클레어가 내 외투를 가리켰다. 동시에 숨결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지시했다.
“그거, 벗어요.”
“…….”
말하지 않아도 벗을 생각이었다. 방 안에서 외투를 입고 있는 건 불편했으니까.
그러나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클레어의 손가락질 후에 행동하는 건 기분이 꺼림칙했다. 마치 하면 안 될 일에 손을 대는 것처럼.
벗어 둔 옷을 대충 접어 의자 등받이 위에 걸어 두자 클레어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 양 손목이 X자로 교차되어 있었다.
“잠…….”
말릴 새도 없이 클레어의 손이 올라갔다. 새하얀 복부와 배꼽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흘끗 훔쳐보니 하얀 민소매 티가 있었다. 니트에 딸려 올라간 티가 명치 부근까지 말려 있다가 천천히 내려오며 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에 뭘 입고 있었구나.
복잡한 심경이 담긴 긴 숨을 내뱉는 나를 보며 클레어가 장난기 가득한 눈매로 웃음 지었다.
“왜요? 뭘… 상상했길래?”
“…별로.”
“당신 차례예요.”
차례라니, 마치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표현이었다. 순서대로 번갈아 가며 옷이라도 벗는 게임인가. 승패는 어디에 있고, 벌칙은 뭐지.
위에 입고 있던 맨투맨을 벗었다. 안에는 클레어와 비슷하게 검은 티를 받쳐 입고 있었다.
“다음은…….”
클레어가 다시 한번 옷 위로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내가 클레어의 손목을 붙잡았다.
“…장난 그만하고, 잡시다.”
“저, 아직 불편한데요.”
“얼른.”
이 이상은 내 정신이 못 버틴다.
방에 침대는 하나였다. 일인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싸구려 여관답게 침대도 한 명이 누우면 거의 다 가득 찰 정도였다. 둘이 누우려면 몸이 닿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안 돼요.”
클레어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도율 씨가 빌린 방이잖아요. 방 주인을 바닥에서 재운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죠.”
“…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말고 한 침대에서 자죠?”
클레어가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침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좁아터진 침대였다. 여기 두 사람이 누우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좀…….”
“왜요?”
“아, 알잖아요.”
“아뇨, 난 모르겠는데요.”
클레어는 속내를 숨기고 웃고 있었다. 비웃음을 머금은 듯한 미소를 띤 채로 그녀가 빈정거렸다.
“한 지붕 아래 살아도 여태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라서, 나는 정말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요.”
“…….”
“안 그런가요, 겁 많은 동거인 씨?”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클레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갔다고 해도 좁은 방 안이라 겨우 몇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그토록 짧은 시간이라, 클레어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탁.
내가 엄지 손가락을 튕겨 클레어의 가면을 벗겨 냈다. 벗겨진 가면이 바닥 위로 떨어지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야.”
“…읏.”
클레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까불래?”
“아… 아니, 난…….”
“누워.”
내가 손가락으로 침대를 가리키자, 클레어의 시선이 그곳을 향해 미끄러졌다. 빠져나갔던 시선이 되돌아와 다시 한번 내 눈과 마주했다.
“…….”
클레어가 크게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달칵.
방의 전등을 껐다. 시야가 깜깜해졌지만, 이 정도 어둠은 이미 익숙했다.
침대를 찾아 클레어 옆에 나란히 누웠다. 확실히 좁긴 좁았다. 몸이 닿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거기로부터 의식을 돌린 채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잘 자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
클레어가 부스럭거리더니 윗몸을 일으켰다.
“…자요?”
대답하지 않았다.
“자는 척이죠?”
뺨을 찔러도, 어깨를 흔들어도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하아…….”
클레어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풀썩 쓰러뜨렸다.
싸구려 침대가 거칠게 흔들거렸다.
* * *
“…뭐야, 이건.”
이튿날.
잠에서 깬 도율이 얼굴 위를 덮고 있는 무언가를 손으로 치웠다. 조금 거리를 두고 노려보니 뭔지 알 수 있었다.
“…청바지?”
이게 왜 얼굴을 덮고 있는 거지.
도율은 잠결에 바지를 벗는 잠꼬대 따윈 없었다. 애초에 그가 입고 있는 건 청바지가 아니었다. 없던 청바지가 갑자기 생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생각이 닿았다, 옆에서 클레어가 자고 있다는 사실에.
“……!”
소스라치게 놀란 도율이 벌떡 일어났다. 옆에선 클레어가 곤히… 라고 표현하기엔 어려운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한 집에 살고 있으니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클레어는 아침에 강한 타입은 아니었다.
‘이 청바지는…….’
아무래도 클레어가 자다가 답답한지 자기도 모르게 벗어 둔 것 같았다. 분명히, 청바지를 입고 자는 건 불편하다고 불평하긴 했다.
도율은 이불 아래에 있는 클레어의 하반신으로 시선을 흘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다시 입히는 것도 우스운 짓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짓을 하다가 도중에 클레어가 깨기라도 하면 무슨 소릴 들을지 몰랐다.
클레어의 적극적인 공세에는 안 그래도 혀를 내두른 참이었다. 빌미를 주고 싶진 않았다.
대신 도율은 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잠버릇 하고는…….”
도율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클레어를 아이로 보려고 하는 경향이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실제로 도율이 보기엔 아이가 맞았다. 무림에서 긴 세월을 보냈던 그가 보기에는.
이곳에서는 10년에 불과한 세월.
하지만 그곳에서는…….
기억도 불분명한 데다가, 노화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몸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그 부분은 자신조차 혼란스러웠다.
아직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율이 외출 준비를 끝마쳤다. 토너먼트 경기가 없는 날이어도 가게 일을 돕거나 탐정의 조사 내용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도율이 방을 나설 때까지 클레어는 침대 위에 파묻혀 있었다. 그가 피식 웃고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자 클레어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자랑거리인 밝은 금발은 마구 떡지고 헝클어져 있었다. 평소 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침대 위에서 밍기적댄 대가였다.
“왜 안 넘어오는 건데, 진짜아아…….”
클레어가 이불보를 움켜쥐고 탄식했다.
* * *
시간이 흘러, 오늘.
토너먼트 4강전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대진표는 예상대로였다. 8강전에 먼저 이긴 1번 주혁, 8번 나. 그리고 다른 경기에선 4번인 샤디아와 5번인 토마스가 이겨서 올라왔다.
즉, 오늘 경기는 총 2번. 1번과 4번의 대결과 5번과 8번의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순서는 1번과 4번의 대결이 먼저였다. 시간에 맞춰 도착해 개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여어.”
호쾌한 인상의 금발 남자, 토마스였다.
“결국 여기까지 올라왔군.”
“보다시피.”
추첨식에서 처음 봤을 때 그는 긴장이 풀어져 쉽게 떠벌거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단단한 집중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까지다. 이 위로는 결코 보내지 않아.”
“글쎄.”
한동안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던 토마스가 분위기를 한풀 누그러뜨렸다.
“뭐, 됐어. 도망치지 않았나 확인하러 온 것뿐이다. 여기서 눈싸움해 봤자 남는 것도 없으니.”
“너, 그냥 항복하지?”
“뭣……!”
등 뒤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토마스가 돌아봤다. 그곳엔 샤디아가 서 있었다.
어깨와 배가 드러난 상의에 옆이 트인 기다란 치마 사이로 허벅지가 엿보였다. 그 위로 금빛 장신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었다. 얼굴 위로도 옅은 베일을 쓰고 있었다.
그 복장에서 떠오르는 것은.
“무희?”
“바로 맞췄어. 난 싸울 때 항상 이렇게 입거든.”
샤디아가 한 바퀴 빙글 돌며 옷자락을 나풀거렸다. 토마스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전투복이라는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저런 옷을 입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진심일 때만 꺼내는 옷이라는 뜻이겠지.
“원래라면 결승 때까지 아껴 두려고 했는데, 이번엔 상대가 좀……. 뭐, 그런 거야.”
샤디아가 대수롭지 않은 척 얼버무렸다.
오늘 그녀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주혁. 쉽다고 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같은 랭커인 데드 페이스도 손도 못 써 보고 당할 정도였으니.
샤디아. 여유로운 태도를 내비치고 있지만, 과연 그녀가 주혁을 이길 만한 실력을 갖고 있을까?
“아무튼 난 이길 테니까. 자기도 꼭 이겨. 결승에서 봐♥”
샤디아가 손가락에 키스를 날리며 퇴장했다. 그녀의 경기는 나와 토마스의 경기보다 빠르니까. 다소 바삐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토마스는 그 후로도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절대 안 진다.”
“…….”
그리고 토마스도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 * *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두 참가자가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한쪽은 돌아온 탕아. 지난 경기를 통해 그 폭력성을 더욱 갈고닦았다는 것을 증명한 남자, 주혁이었고.
또 다른 한쪽은 검은 피부와 대비되는 새하얀 무희복을 입은 여자. 투기장의 랭커로 이름을 날리던 샤디아, ‘흑희’였다.
경기장 위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이야.”
“꺼져.”
“매몰찬 건 여전하군.”
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주혁이 전 랭커 출신이었던 만큼, 두 사람은 이미 안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친밀한 관계였느냐고 하면, 결코 아니었지만.
주혁이 맨몸으로 손을 뻗어 자세를 취하고, 샤디아 역시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철로 만들어진 원형 형태의 칼날, 차크람이라 부르는 무기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주혁이 달려들었지만 샤디아는 춤추듯 가뿐하게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주혁을 향해 차크람을 휘둘렀지만, 주혁 역시 스치기만 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
탐색전. 주혁이 감상을 남겼다.
“여전히 재빠르군.”
강한 악력을 바탕으로 근접전을 펼치는 주혁에게 발재간이 좋아 가볍게 움직이는 샤디아는 껄끄러운 상대 중 하나였다.
샤디아가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바로 끝장내 줄게.”
딸랑.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 소리에 불과했지만 관중석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갈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점점 늘어났다. 샤디아가 발뒤꿈치를 들고 경기장을 가볍게 거닐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분명히 리듬을 타고 있었다. 정박과 엇박을 오가며 방울 소리가 귀를 찔렀다.
주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세를 낮췄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은 불안정한 자세였다.
“칼날비의 춤.”
그와 동시의 샤디아의 신형이 사라졌다.
방울 소리를 통해 평형 감각에 혼란을 주고, 자신은 재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차크람의 칼날로 상대를 난도하는 기술.
주혁이 낮은 자세로 급소를 가렸지만, 그래 봤자였다. 샤디아의 날카로운 차크람이 주혁의 피부를 가르며 피를 훔쳤다.
이렇게 일방적인 공세를 이어 나가다가 체력이 떨어진 상대를 단숨에 끝장내는 것이 샤디아의 승리 플랜이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게 처음부터 진지하게 나선 건 처음이었지만.
그때였다.
주혁의 자세가 느슨해지며 급소가 드러났다. 샤디아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차크람을 들이밀었다.
‘죽어!’
투학!
조금이라도 더 깊은 상처를 만들기 위해 샤디아가 길게 팔을 내밀었다. 차크람의 칼날이 주혁의 가슴팍을 찌르며 피를 뿜어냈다.
그러나.
“잡았다.”
피투성이가 된 주혁의 손이 샤디아의 팔을 붙잡았다. 갈라진 암석 같은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
함정이었다.
주혁은 일부러 빈틈을 보인 뒤 샤디아의 공격이 깊게 들어오길 기다렸다. 평소와 달리 초조한 태도를 보이던 샤디아는 결국 먹이를 물고 깊이 손을 뻗고 말았다.
처음부터 계속 거리를 두고 일방적인 소모전을 펼쳐야 했는데, 섣부른 판단이 부른 실책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놔……!”
그러나 주혁이 한 번 붙잡은 샤디아의 팔을 순순히 놓아 줄 리가 없었다. 그녀의 힘으론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꽈악.
주혁이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