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은 ‘김하늘’이 죽은 뒤 그의 친구인 ‘이기현’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영화였다. 그 탓에 정작 이정은 주인공이면서도 1화 분량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초반은 건너뛰고,”
임 감독의 말에 펄럭거리며 종이 넘기는 소리가 대본리딩실에 울려 퍼졌다.
“갤러리 오픈부터 쭉 리딩하겠습니다. 컷할 부분은 적당히 말씀드릴게요.”
“네.”
“예,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종이 넘기는 소리가 잦아들고, 대본리딩실에 적막이 흘렀다.
― 틱, 틱, 틱.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모두의 집중이 은연중에 이정을 향했다.
“이기현! 여기!”
그리고, 밝은 이정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찬 공간을 박살 내며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앉은 자리에서 가볍게 부르는 것 같은데도 구석구석 또렷이 들릴 정도로 정확한 음성이었다.
“야…. 이게, 대체.”
“놀랬냐?”
“놀랍다기보단 어이가 없는데 지금 난.”
이정과 안상후가 단번에 15년 지기 절친이 되어 대화를 주고받았다.
“진짜 네 전시회라고? 어떻게?”
“아, 김하늘 작가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저야말로 급하게 열게 된 전시인데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하죠.”
대본리딩은 임 감독이 배우가 없는 대사들을 대신하며 순조롭게 진행됐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라며. 내가 또 추진력 하나만큼은 죽여주잖아.”
“미친놈…. 지금 팔자 좋게 그림 그릴 몸 상태 아닌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은 15분짜리 공식 예고편 1화, 1시간짜리 본편 3화, 그리고 30분짜리 스페셜 1화. 총 5화 구성으로 확정되었다.
“야, 우리 고딩 때 너는 딸, 나는 아들 낳아서 둘이 결혼시키자고 했던 거 기억나냐?”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이지만 너랑 사돈 맺을 생각 없다고 한 건 쏙 빼놓지?”
“에이, 기억 못 할 줄 알았더니.”
은 애초에 영화화를 목표로 했던 만큼 러닝타임이 길어지면 지루해지기 쉬운 장르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는 안돼!”
“저긴 작업실 아니야?”
“작업실은 작업실인데…. 어쨌든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보여줄게. 나아중에.”
그러나 수정된 원고는 안 작가가 그렇게 까다로운 질문을 해가며 작품을 아낀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끝까지 적당한 텐션을 유지했다.
“뭐 시켰어?”
“아, 바지 몇 개.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청바지를 사본 적이 없는데 살이 빠져서 그런지 옷이 줄줄 흘러내리더라.”
“벨트 없어?”
“있는데, 그냥 새것 입고 싶어서. 어차피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런 거 아껴서 뭐 하냐.”
극의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현실감은 더욱 커져갔다. 이정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흐릿하고 약했지만, 밝은 표정이나 말투만큼은 여전했다.
“아직도 있었어?”
“깼냐.”
“해리 씨, 저 물 한 잔만. 너는 저녁 먹고 가지 그래?”
“됐어. 처리 못 하고 온 일이 있어서 병원 다시 들어가 봐야 돼.”
설령 힘없는 억양일지라도 이정의 연기는 앉은 자리에서 목소리와 표정만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선물은 잘 간직할게. 잘 가라.”
안상후의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약 두어 시간 만에 대본리딩이 종료됐다.
“어휴, 힘들어.”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은 안상후가 한숨을 토했다.
“매번 하는 일이지만 매번 힘드시죠?”
“어…. 해리 씨.”
혼이 나간 듯 의자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안상후에게 해리 역의 배해리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정 씨, 제가 좀 늦게 와서 아까는 인사를 못 드렸네요.”
“바로 대본리딩 시작해서 그런 건데요 뭐.”
“단체 인사는 했지만, 해리 역의 배해리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김하늘의 제자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그를 케어하는 전문 간호사 조해리 역을 맡은 그녀의 이름 역시 똑같은 해리였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이정이 배해리가 내민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눈대중으로도 170cm가 훌쩍 넘어 보이는 배해리는 큼지막한 이목구비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인상이었다.
“이정이 너는 오늘 회식 가?”
“술은 안 마시고 자리만 차지하려고요.”
첫 촬영 날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적당히 어울려 먹고 마셨겠지만, 당장 2주 뒤가 첫 촬영이었다. 촬영용 몸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서 회식을 즐기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냥 집에 가도 되는데 너도 참 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안상후가 기특하다는 듯 이정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 기분 나빴으면 미안. 내 동생보다도 어려서 그런지 무의식중에 되게 어리게 느껴지네.”
성숙한 외모와 성격 탓에 어디를 가던 나이에 비해 어른 취급을 받아온 이정이 간만의 애 취급에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안상후의 나이가 올해로 서른. 이정이 스물넷으로 여섯 살 차이니 충분히 어리게 느껴질 법하긴 했다.
“아뇨, 기분 나쁜 건 아닌데 이렇게 애 취급받은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요.”
특히나 회귀 후 외모는 전과 다를 바 없어도 더 성숙해진 분위기와 큰 키 때문에 보통 다들 이정을 적게는 이십 대 중반에서, 많게는 후반까지 대여섯 살 정도 많게 봤기 때문에 더더욱 익숙하지 않았다.
“스물넷이면 애지….”
“이정 씨 스물넷이에요? 오빠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어리… 네?”
오히려 그에겐 해리 같은 반응이 더 익숙했다.
“다들 이동하실까요? 오,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모두 키가 커서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길쭉길쭉하네요.”
임 감독이 손대중으로 키 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를 가도 보통 가장 키가 큰 사람이었던 이정보다도 큰 안상후와 모델 출신인 배해리, 그리고 그 사이에 이정이 끼어있으니 세 사람의 평균 키만 180cm가 넘었다.
“상후 씨 키 진짜 크구나.”
“190이 넘으니까요.”
처음부터 의도한 캐스팅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말라가는 ‘김하늘’과 대비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
“왠지 해리 씨가 작아 보인다 했어….”
“제가 어디 가서 작단 소리 듣는 키는 아닌데, 여기선 유독 작아 보이네요.”
배해리가 키득거렸다.
높은 힐을 신으면 어지간한 남자 배우와 비슷해지는 탓에 그녀를 부담스러워하는 남자 배우들도 있었는데, 적어도 이 둘 앞에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감독님! 출발 안 하십니까!”
“어어, 가! 다들 가죠.”
다툼이나 기 싸움 없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작품이 잘되기를 바라는 배우와 스태프들 순간, 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정아, 얼른 와.”
그를 부르는 우재의 목소리에 이정이 대답하며 서둘러 문자를 보냈다.
― 영화 촬영은 잘돼 가고 있어요? 오 감독님은 좀 어떠세요?
슬럼프에 지쳐 자살을 택했던 오 감독. 영화는 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의 우상이었던 그가 이번 생에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태영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 감독님도 괜찮으시고요. 이정 씨한텐 여전히 미안해하시는 중이지만요.
마침 시간대가 맞았는지, 태영범에게서 금방 답이 왔다.
― 태영범: 다음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매일 말씀하시는 탓에 저랑 이정 씨 사이가 엄청나게 안 좋은 줄 아는 스태프들이 제 눈치를 봅니다. 나중에 한 번 오세요.
― 그래도 다행이네요.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들를게요.
― 태영범: 네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비록 조금 기분 나쁘게 헤어지긴 했어도, 충분히 사과받은 일 가지고 영원히 척질 정도로 극단적인 관계는 아니었기에 이정도 적당히 태영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정말로 갈지 가지 않을지는 미지수였다.
* * *
대본리딩 2주 뒤. 최종적으로 12kg를 감량한 이정은 이제 멀리서 봐도 핼쑥해 보일 정도로 살이 빠졌다.
아픈 사람을 연기하기 위한 만큼 운동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더 힘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분장 좀 줄일까?”
“아뇨. 딱 좋은데요?”
오죽하면 분장을 해주던 지영이 흠칫할 정도였지만, 이정은 살 뺀 보람이 있다며 거울로 제 상태를 확인했다.
“덥진 않아?”
“어지럽진 않아? 너 더위 많이 타잖아.”
우재와 지영은 가을 배경에 맞게 차려입은 옷 때문에 혹시나 이정이 더위라도 먹을까 전전긍긍했다. 특히 트라우마 극복 전 이정이 더위에 힘들어하던 걸 본 우재는 더했다.
“형이랑 누나 때문에 어지러워질 거 같아요. 지금.”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예!”
스태프의 외침에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이 조금 넓은 니트 사이로 빠져나온 손목이 앙상했다.
역으로 찍기로 한 만큼, 첫 촬영인 오늘의 촬영은 반대로 ‘김하늘’의 건강이 가장 최악인 시기. 지금 이정의 몸과 가장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김하늘 앞치마 전달해 주세요! 앞치마!”
“여기요!”
이정이 진갈색 작업용 앞치마를 목에 걸어 허리끈을 한번 조인 뒤 손가락에 끈을 둘렀다. 리본을 묶기 전 준비 자세였다.
“리본 묶는 것부터 컷 들어갈게요. 자 슬레이트 준비!”
임 감독이 손을 높이 들자 시끌시끌했던 현장이 차차 조용해졌다.
“레디,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