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45)
45화
“물소리가 참 맑네요.”
“…….”
“물은 왜 투명할까요? 신비하고 아름다워요. 그죠? 공기도 참 좋은 것 같아요.”
일방적인 소통을 묵묵히 듣고 있던 율리시스가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요이델도 그에 하하 웃다가 서서히 정색했다.
둘은 스치면 죽기라도 할 듯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동굴의 안쪽은 돌무더기로 막혀 있고, 밖에는 위협 요소가 있는 데다 결계로 가로막혀서 나갈 수도 없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호흡 곤란이 올 지경이었다.
성하와 단둘이 동굴 안에 있는 것보다 초면의 반달곰이랑 끌어안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언뜻 스치듯 본 성하의 표정은 어마어마했다.
“에취!”
옷이 물에 젖어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똑같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인데 성하는 나랑 다르게 최고급 사료를 먹고 자란 우아한 우두머리 쥐 같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현실도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요이델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손을 꼼지락대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은발은 밤 호수의 윤슬처럼 아름다워 품위를 잃는 법이 없었다.
머리에서 떨어지는 맑은 물조차 후광처럼 반짝여서 꼭 이르게 개화한 달맞이꽃 요정 같았다.
아, 요정이 돌아본다.
“그 꼴로 계실 겁니까?”
요괴였구나.
사람의 눈길이 한파보다 차가울 수가 있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옷도 벗었…… 왜 벗어?
“뭐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얼어 죽으세요!”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게 훨씬 더 체온 유지에 해롭습니다. 그대도 탈의 후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가방에서 여분의 옷을 꺼내 주었다.
“그대가 기사들과 다정한 대화를 나누시던 게 쓸모가 없지만은 않은 사교 행위였군요.”
기사들이 주었던 그 가방은 다행히 보존 마법이 걸려 멀쩡했고, 비상 용품도 알뜰하게 들어 있었다.
율리시스는 가방에 시선을 두고 다른 적당한 물건을 살펴보았다.
당황한 요이델과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긴 일단 자신도 남자로 보일 테니까. 그래도,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요이델은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는 제 옷가지도 훔쳐 가신 분이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그건, 그건 제가!”
과거에 그런 짓까지 했었다고?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은 아니란 말이야. 요이델은 분기탱천하여 이마에 핏대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몸인 건 맞지.
요이델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페어링에는 상대의 기억을 삭제시키는 기능은 없는 걸까? 제발 있으면 좋겠는데.
눈을 질끈 감았던 요이델은 체념하며 눈을 흐리게 뜨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대도 갈아입으십시오.”
“저요? 음, 꼭 옷을 갈아입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입은 채로 말려도 되고, 어…… 또, 저는 축축해도 제 옷이 너무 좋아요. 신관복에 자부심을 느끼거든요.”
“…….”
“아니면 성하께서 주무실 때 갈아입을게요.”
하얗게 질린 요이델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그는 덤덤히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젖은 옷을 입고 계시면 악취도 풍기게 되고 체온 역시 떨어집니다. 저체온증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벗어 말리십시오.”
“하지만 페어링은 질병 자체를 공유하진 않잖아요?”
“그로 인한 합병증에 걸려 사망하신다면 결과적으로는 같습니다.”
너무 극단적인 상황이잖아요. 하지만, 하아.
율리시스는 악의 없이 객관적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가 말하는 건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니까.
“옷이 마를 즈음엔 이미 눈사람이 되신 뒤겠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요이델도 추위를 느끼는 중이었다.
“당장의 부끄러움은 찰나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하고 몸 상태를 우선으로 생각하십시오.”
요이델은 한숨을 후우, 내쉬고 담요를 뒤집어쓰듯 두른 뒤 안에서 손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어쩐지 긴장감에 신경이 곤두섰다.
요이델은 그에게서 최대한 멀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절대로 뒤돌아보시면 안 돼요.”
“제발 봐 달라고 애걸하셔도 보지 않습니다.”
“네? 제가 왜 그런 이상한 부탁을 드려요?”
“저야말로 타인을, 그것도 요이델 님의 탈의를 봐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전제부터 성립되지 않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요이델 님’이라니 무슨 뜻이야?
속으로 씩씩대는 한편 조마조마함에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여태 모두를 속인 게 알려지면 끝장이다.
요이델은 바퀴 빠진 마차처럼 소매를 뺄 때는 부르르르 떨었고, 버튼에 손을 댈 때는 드르르르 떨었다.
후, 하, 후하―
‘당황할 거 없어. 아무렇지 않게. 나는 지금 성하랑 똑같은 성별이니까.’
한편으론 신기했다.
성하의 힘까지 제약될 정도인데 자신의 변장 마법은 멀쩡하다니.
놀랍고도 다행스러웠다. 혹시 이게 뭔가 관련이 있을까?
동굴 안은 곧 침묵에 잠겼다.
툭.
그러나 등 뒤로 그의 겹옷이 하나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은 왜 작은 소리도 잘 들릴까.
요이델은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불에 댄 듯 일일이 놀랐다.
‘안 들린다. 저건 하얀 강아지다. 사람이 아니다……. 하얀 강아지가 털갈이 중이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
요이델은 자기 암시를 하며 마른 옷으로 완전히 갈아입었다.
잠깐이었지만 억겁이 흐르듯 긴장의 시간이었다.
‘으아아…… 어서 나가고 싶어.’
요이델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긴장감에 몸이 더 아프고 손발에 힘이 빠졌다.
‘휘스랑 라이가 열심히 찾아 주고 있겠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까?’
만년설이 펼쳐진 아크만 설원.
그중에서도 각개의 골짜기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다.
율리시스의 힘이 제한된 데서 추측할 수 있는 가설은 몇 가지가 있었다.
‘대륙의 중심부에 최고로 가깝다거나.’
창공 대륙의 현 주인이 율리시스이긴 했지만, 본디 그가 탄생시킨 대륙은 아니었다.
먼 옛날은 신수와 신족들이 살던 땅.
율리시스는 그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후계자였다.
창공을 부유시키는 힘은 성황인 그의 몫이긴 했지만, 오로지 그의 힘만은 아니었다.
대륙의 중앙에는 거대한 부력이 존재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하지만 그 힘은 있다고만 언급될 뿐, 나온 적은 없었어.’
원래 열리지 않아야 할 길이 열린 건 혹시 플로테스가 태어나서일까?
만일 대륙 중앙에 가까워진 거라면 율리시스는 느끼고 있을 텐데.
‘본인은 혈통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의 피에 자부심을 갖지 않았다.
후사를 위해 혼인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아 오히려 끔찍해할 뿐.
성국의 신관들은 성년이 지나면 성별 불문 혼인이 가능했고, 그를 보좌하는 모두 그가 후손을 낳기를 염원했다.
‘지금도 혼인 압박을 받고 계시겠지?’
자신이 반려가 되어 버려서 더 곤란해졌을 텐데.
요이델은 옷을 점검한 후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곳은 무서우니까.
그래도 좁진 않아서 그때처럼 과호흡이 오진 않았다.
율리시스의 유리처럼 예쁘고 투명한 눈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한결같이 덤덤했다.
그래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요이델은 일정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죄송해요, 성하.”
뜬금없는 사과에 율리시스는 미간을 좁혔다. 영문을 모르는 듯했다.
“성하께서 나중에 곤란해지시지 않도록 페어링을 풀 방법을 얼른 찾을게요.”
“무슨 곤란 말씀이신지.”
“반려가 있다는 걸 들켜도 그렇고, 혹시나 성하께서 진심으로 누군가와 혼인을 하고 싶어지시면 곤란하실 테니까요.”
율리시스는 마르지 않아 대충 쓸어 넘긴 머리를 다시 말없이 헝클어뜨렸다. 그래서 그의 이마에 있는 문양이 제대로 보였다.
요이델은 그를 힐끔 바라보다가 빨리 고개를 돌렸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묘하게 몸이 노곤했다.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이 페어링이 아무 의미도 없고, 제 탓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걸 설명해 드릴게요.”
“…….”
“잘은 몰라도, 성하께서 좋아하시게 될 분이라면 제 말을 들어 주실 것 같아요.”
아마 무척 상냥한 사람이 상대일 테니까요. 아니, 반드시 그런 상대여야 할 테니까요.
냉랭한 율리시스의 성격상 쉽게 혼인 상대를 찾진 않을 거다. 원작에서도 끝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그때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다지만, 그의 앞날까지 막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는 동경했고 좋아했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기도 했으니 행복한 결말을 맞으면 좋지 않은가.
‘혼자 긴 세월을 살아온 성하도 가끔은 지칠 때가 있을 테니까.’
아마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당장 걱정되지는 않았다.
‘성하도 특별한 상대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시겠지? 그래야 할 텐데. 가면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상이 잘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는 대외용 가면처럼 늘 따스할 수도 있을 거다.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앞뒤가 다르지 않고 일관적으로 다정한 율리시스.
‘끙, 상상이 안 돼.’
요이델은 여러 가정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애롭고 친절한 게 맞으니까. 아마 그런 식이겠지?’
그런데 생각할수록 머리가 점점 무겁고 어지러웠다.
왜 이럴까?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고 그 틈으로 한껏 찌푸려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성하, 왜 흔들거리면서 앉아 계세요?
묻고 싶었지만 너무 졸렸다.
“그럴 일은 결코 없습니다.”
율리시스의 말투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거칠게 얼굴을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혼인을 하게 될 일도 없을뿐더러, 특정 대상을 만드는 것은 가정조차 불가합니다. 일어날 리 없는 사항이고 그대가 관여하실 일도 아닙니다.”
절대 없을 일이라며 재차 단언했다. 뚜렷한 이유는 몰라도, 타인과의 교류 자체를 끔찍이 여기는 듯했다.
“불필요한 말씀 마시고―”
그러나 요이델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머리가 왜 이러지?’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왔기에. 손과 팔,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왜 이럴까? 성하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졸리고 또 졸리고.
자꾸만 의식이…….
‘어리광 부리지 말렴. 요이델. 약해 빠진 아이는 식사를 할 자격이 없어.’
그때, 공작 부부의 목소리가 의식 너머에서 들려왔다.
점차 몸에 힘이 빠졌다. 안 되는데. 아프면 혼이 날 텐데.
쿠당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