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move the Kind Protagonist’s Mask RAW novel - Chapter (47)
47화
“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등 뒤의 돌들이 무너졌다.
끝없는 구멍에 빠진 듯 계속 아래로, 더 어두운 곳을 향해 더 빠르게, 더 가까이.
곧 땅이다.
안 돼!
몸을 잔뜩 웅크렸던 요이델은 예상했던 고통이 없자 살며시 눈을 떴다.
먼저 착지한 율리시스가 자신을 받아 준 상태였다.
“서, 성하?”
요이델을 가볍게 툭 내려놓은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꼭 뭔가를 아는 것 같은 눈이었다.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위쪽보다 훨씬 어두컴컴하고 습한 곳이었다.
“신수의 뼈군요.”
“뼈요?!”
거의 나무만큼 커다란 기둥들은 자세히 보니 곡선으로 휘어 있었다.
정말로 일반 동물들에게서 보이는 뼈 모양이었다.
“신수들은 생이 끝날 때를 직감하면 안식에 들 수 있는 곳을 찾아 종적을 감춥니다. 이곳에 잠든 신수들이 많군요.”
“와…… 성체가 되면 커지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네요.”
뼈들은 동굴 천장까지 꽉 찰 만큼 컸다. 플로테스도 크면 이렇게 될까?
“성하께서는 이런 거대한 신수가 나는 걸 직접 보셨겠네요?”
“몇 번 되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도 개체가 극도로 적었던 터라. 이곳에 묻혀 있다는 건 몰랐습니다.”
“왜요?”
“관심 없습니다.”
율리시스는 잠든 신수들을 시큰둥하게 훑었다. 하긴 그는 플로테스도 별로 안 좋아하니까.
플로테스가 태어났을 때도 아마, 결혼 독촉을 막아 줄 장치가 하나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을 거다.
그는 자신의 혈통뿐만 아니라 신수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는 듯했다.
“제, 제가 앞장서서 걸어 볼까요?”
신수는 자신이 더 관심 있으니까. 씩씩하게 말한 요이델은 금세 그의 뒤로 당겨졌다.
“용맹함은 높이 사나 제 뒤에 붙어 계십시오.”
“하지만…… 성하께서는 등 뒤에 누가 있는 걸 싫어하시지 않나요?”
율리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정면보다 등 뒤에서 부를 때 더 예민하게 알아차리셔서, 싫어하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아마 어릴 적부터 이어진 생명의 위협 같은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짐작했다. 적에게 등을 보이면 위험하다는 걸 체득했을 테니.
표정을 보니 맞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어두운 곳에 계셨다가 또 쓰러지시면 곤란합니다. 뒤로 오십시오.”
“네? 제가 언제 쓰러…….”
그랬던 건 딱 한 번, 연무장의 관물함에 갇혔을 때뿐이었다. 설마 그때 그도 왔었나?
“땀을 흠뻑 흘리시더군요. 갈아입을 옷도 더 이상은 없으니, 두 번이 되면 곤란합니다.”
“성하께서도 연무장에 계셨어요?”
율리시스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설마 하는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휘스테론이 “내가 구해 줬어!” 하고 유난히 웃고, 라이오스가 그를 나무라긴 했다.
휘스테론의 장난기가 심한 건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할지도.
“혹시 저를 구해 준 게, 성하셨어요?”
쿵!
그 순간 이마를 그의 등에 박았다.
요이델이 이상해 앞을 보니 율리시스가 입에 손을 대고 쉿, 소리를 냈다.
미처 인식할 틈도 없이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고개를 푹 누르고 자신도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
휙―
파바박.
수백 개의 화살이 그들이 있던 자리를 관통해 벽에 꽂혔다.
율리시스가 요이델을 돌아보았다.
“힘을 가져오려면, 가벼운 접촉만 해도 된다 하셨습니까.”
“네? 네!”
율리시스는 요이델의 손을 잡고 제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원래 그의 신성력 색처럼 하얀빛이 아닌 따뜻한 금색이었다.
쾅!
쿠르릉.
그때 저 먼 곳의 벽이 무너져 내리더니 작은 털 뭉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곰?”
“사람입니다.”
율리시스는 잘 알겠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당신에게 가장 필요할 사람.”
털 뭉치는 서류를 후드득 떨어뜨렸다. 요이델은 보다 높은 지대에서 내려온 종이를 받아 읽었다.
‘이건, 전부 신수에 관한 거잖아.’
정체가 묘연한 남자는 빼곡히 자란 머리를 걷어 올리고 반짝이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하!”
그리고 곧장 납작 엎드려 숙였다. 요이델은 그때 바로 깨달았다.
“제 전대에 계셨다는, 신수 관리자님!”
━━━━⊱⋆⊰━━━━
달칵.
율리시스와 요이델의 앞에 각각의 뜨거운 찻잔이 놓였다.
온도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차를 내온 사람은 쉽게 호로록 마시는 걸 보니 그에게만은 맞는 온도인 듯했다.
‘혼자 오래 살았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각은 할 수 없는 거야.’
그의 이름은 아슈레오라고 했다.
그 방대한 자료의 주인. 그리고 미켈레 씨가 그리워했던 옛 친구.
하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요이델은 주위를 둘러보며 천진하게 감탄했다.
“이 엄청난 수집품들도 전부 아슈레오 씨의 보물인가요?”
“하하하! 그렇지. 폐쇄된 카라발 해안을 뚫고 들어가 주워 온 난파선의 멈추지 않는 시계, 루버 왕국의 신수의 족적 등 전부 내 수집품이지!”
“대단해요. 여기 신수의 무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오신 거예요?”
“사실은 조난을 당했는데 운이 좋았지. 그리고 살다 보니 연구에도 좋고 괜찮더라고.”
처음엔 야생의 곰 같다고 느꼈지만, 그는 의외로 수더분했다.
그리고 키가 꽤 앙증맞게 작아서 정말 귀여운 털 뭉치 같았다.
“그런데 내 말투 안…… 이상한가? 허허, 누군가랑 대화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더듬는다거나 어색하거나 요즘 말투가 아니라거나…….”
“정말 평범해요.”
“휴, 그건 다행이군.”
옷도 머리도 수염도 모두 곰같이 덥수룩한 그는 껄껄 웃으며 말하다 성하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일을 관두고 멋대로 도망쳐 나와서 죄송합니다, 성하.”
율리시스는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지만 요이델은 지난 경험으로 잘 알았다. 그가 눈빛만으로 사람을 떨리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저 눈빛 좀 봐. 무서워.’
성하도 차를 마시다 살짝 멈칫하는 걸 보니, 역시 그에게도 뜨거운 온도인 듯했다.
“맞다, 서, 성하. 아까의 화살은 결코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외부 침입자들을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멋대로 발동해서…….”
“아슈레오 경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대신전을 나가서 무엇을 했는지도.”
그는 유랑하며 학문을 더 배웠다고 했다.
그런데 아슈레오의 표정은 어딘가 숨기는 게 있어 보였다.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많이 긴장한 듯했다.
그가 나간 이유에 대한 소문은 다양했다. 한직이라서, 심심해서, 책임감이 없어서, 무슨 일을 저질러서 등등.
‘하지만 그렇게 단순해 보이진 않아. 예전에 봤던 미켈레 씨의 태도도 어딘지 이상했고.’
성하는 그게 뭔지 알고 계실까?
요이델은 율리시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율리시스의 차분한 눈이 그의 연구실을 훑었다. 조잡했지만 널찍하고 나름 안락했다.
“마수를 만들어 낸 것도 경입니까.”
“아, 그건…… 제 힘이 신성력이고 여기 지내면서 이런저런 작은 마수들이 배를 곯길래 조금 돌봐 주다 보니 특이점이 생긴 듯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하.”
결국 신성력에 적응한 마수의 출현도 그가 만들어 낸 사건이었다.
“은둔이 오래되어서 타, 타인과의 접촉이 쉽지 않네요, 하핫.”
그는 긴장한 듯 연신 손에 난 땀을 닦았다. 아슈레오는 오랜만의 성하와의 대화에 겁을 먹은 듯했다.
“혹시 입구에 결계를 친 것도 아슈레오 씨예요?”
“나?”
아슈레오는 놀란 듯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런 게 있었나?”
그리고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상한데. 그 결계는 누가 만든 거지?
“나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든 결계는 아슈레오 씨가 친 게 아니었어요?”
“모르는 일이야. 나는 떨어진 후 계속 여기에서 살았어.”
“여긴 신수의 강력한 마나가 있을 텐데, 그럼 아슈레오 씨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신 거예요?”
그는 정말로 모르는 듯했다.
“나는 그저…… 세상을 떠돌며 수십 년에 걸쳐서 신수의 알을 모았어. 깨진 것이든 죽은 것이든 상관없이. 그러다 길을 잃었고 눈을 뜨니 여기. 그게 다였어.”
저 선반 위에 담긴 열 개가 넘는 알들이 전부 그거였구나.
플로테스의 것은 선명하고 뽀얀 알이었는데, 이건 묘한 신성함만 흐를 뿐 아무 생명도 느껴지지 않았다.
“쿨럭, 후우, 어쨌든 마수의 일은 제가 잘 처리해 보겠습니다. 성하. 이런 꼴로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슈레오가 고개를 숙인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건 성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슈레오 씨, 어디 아프신가요?”
“조금, 나이가 들었으니. 대신전을 나온 지도 20년쯤 됐나? 가물가물하지 뭐야, 하핫.”
하지만 신관의 신체 능력은 신성력에 따라 다르다. 그에게 어떤 질병이 있는 듯한데.
“이 차, 뜨겁지 않으세요?”
“오히려 미지근해서 걱정이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뜨겁다고 느끼나? 하하, 내가 옛날 사람이라.”
아니다, 절대 미지근한 온도가 아니었다. 이건 그의 감각이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뀨.’
요이델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방금 아슈레오 씨께서 뀨, 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아니, 어린 신관님, 아무리 혼자 은둔했다고 해도 아이로 퇴화하진 않았어.”
‘뀨으.’
그런데 또 들렸다.
이건 플로테스의 소리와 비슷한데. 요이델은 율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성하, 아까 제 힘을 끌어다 쓰신 이유가 혹시 저는 여기서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건 플로테스와의 관계 때문이죠?”
“이곳은 신수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묻혀 온 안식처입니다. 제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제약되지만, 신수에게 허용받은 자는 그 제약에서 빗나가는 듯합니다.”
“아슈레오 씨는요?”
요이델은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대단한 마법은 안 썼지만 샤워나 양치에는 문제가 없었지. 음식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고.”
그럼 확실했다.
요이델은 그의 수집품 중 여러 개의 알들에게 다가갔다.
‘먀.’
그러자 아까와도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린 신수, 플로테스와 비슷한 여러 개의 목소리들.
“결계는 아슈레오 씨의 행동이 아니에요. 성하, 의심을 거둬 주세요.”
요이델은 알에 가만히 손을 댔다. 분명히 훼손됐지만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를 여기로 끌어들인 건 신수들이에요.”
“하지만 내가 모은 알들은 태어나지 못…….”
콰르릉―!
그때 다시 한번 동굴이 진동했다.
“콜록, 콜록…….”
쿵, 쿠웅, 종유석이 떨어져 바닥으로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손된 돌들과 공격의 흔적. 그 사이로 들리는 비릿한 웃음소리들.
“이거, 뜻밖의 수확이군.”
그건 제국의 억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