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85
55 시련, 시련, 시련 (6)
그냥 S급 게이트를 공략한 C급 용병대에 대한 호기심이길 간절히 바랐지만, 우리를 알아보고 접근한 거라니. 차라리 이렇게 되니 그동안의 퍼즐이 착착 맞춰진다.
아무리 S급 게이트를 공략한 C급 용병대라도 테이카 쿠퍼의 전폭적인 관심을 받기에는 부족했다. 그냥 관심을 가지는 정도라면 이해했을 거다. 하지만 테이카가 보였던 관심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하아,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 발뺌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했고, 테이카가 우리에게 보이는 호의를 믿어 보기로 했다.
내 질문에 테이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게이트를 보고 있는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모래가 퍼지더라고요.]
모래라고? 내 질문에 레이가 대신 답을 주었다.
━게이트에서 나올 때 모래가 자욱하긴 했다. 그때에는 한서현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아서 말이다. 마력이 줄줄 샜거든.
[그때 같이 싸웠는데 몰라볼 수는 없죠.]
하긴, 예브리카를 공략하면서 같이 호흡을 맞춘 사이니만큼, 알아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단번에 확신했네요.]
[흑마력에 모래를 쓰는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체를 감추고 S급 게이트를 공략할 만한 사람은 당신들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하긴, 평범한 헌터라면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길 바라지 우리처럼 숨길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 정체가 뻔히 보였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중환자실에 있는 친구는 그동안 많이 야위었더라고요.]
“예?”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말이 나갔다. 설마 지금 김재호를 차송진과 착각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키가 10cm는 차이 나는데…….’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냐? 그 덩치 차이가 그냥 야위었다는 말로 퉁쳐질 정도냐고! 저 순진한 사고방식에 나도 모르게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이라니까. 나는 한숨과 동시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쨌거나 이걸 어떻게 해결한다.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내게 테이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난 그쪽이 내가 눈치챘다는 걸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요?]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르는 사람 병원비를 마구 내주고 다녔다간 파산했을 거라고요.]
그랬냐. 왠지 어디서든 호구 잡힐 것 같은 이미진데. 그나저나 잠깐, 병원비를 대신 내줘?
[쿠퍼 씨가 우리 병원비를 대신 내줬단 말입니까?]
[예, 얼마가 나오든 내 이름으로 처리될 거예요. 그리고 아직도 나를 쿠퍼 씨라고 부를 겁니까? 테이카라고 부르라니까.]
순간 테이카의 머리 뒤로 후광이 보였다. 병원비! 병원비를 다 내준다니. 안 그래도 입원한 날이 길어질수록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말이다.
━잠깐, 정신을 차려라! 고작 병원비를 내준다고 저 녀석에게 넘어갈 참이냐!
‘허억! 그, 그렇죠?’
레이의 말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니, 잠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잖아! 병원비를 내준다고 넘어가면 어떡하냐. 테이카야말로 병원비보다 무서운 존재 아니던가.
[됐습니다, 저희끼리도 처리할 수 있어요.]
나는 테이카와 선을 그었다.
[진짜요? 여기 꽤 비싼데.]
[비싸 봤자, 얼마나 비싸…….]
자신만만하게 말을 내뱉은 내게 테이카는 대략 액수를 말해 주었다. 내가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답 없는 허세였음이 곧 밝혀졌다.
[그, 그렇게 비싸다고요?]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테이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아무래도 중환자실 환자도 있으니까요. 거기 하루 입원할 때마다 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아니, 뭐! 처치도 대충하는 거 같던데! 겨우 기계에 사람을 연결해 놓고는!]
액수에 눈이 돌아간 나는 의료진의 노력과 헌신을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해서는 안 될 발언까지 내뱉었다.
━정신 차려라, 인마!
‘허억, 잠시 이성이 집을 나갔습니다.’
레이의 외침에 나는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치료비였다.
‘30억이라니…….’
내 병원비도 어마어마했지만, 집중 치료실에 들어간 차송진의 병원비가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한국 계좌에 있는 돈을 다 털어야겠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하냐?
‘아니요.’
일단은 범죄자인 나는 당연하지만 내 명의의 계좌를 쓸 수 없었다. 그동안은 금박사가 마련해 준 차명 계좌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차명 계좌로는 해외 인출이 어려웠다.
애초에 30억이라는 큰돈을 넣어 둔 통장도 없었다. 수십 개의 통장에 자잘하게 분산된 나의 돈을 다 빼내려면, 그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릴 거다.
‘젠장!’
진작 돈세탁 좀 해 둘걸! 그동안 돈이 필요하면 금박사한테 손을 벌리기밖에 안 했으니 이런 문제가 생긴 거다. 크윽, 앞으로는 금라에몽에 기대기만 하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겠다.
‘하지만 금박사한테 손을 벌리는 게 너무 편하단 말입니다!’
━이게 다 금박사가 널 오냐오냐해서였다는 거냐?
‘아니, 무슨 병원비가 30억이 나옵니까…….’
한국의 헌터 병원도 비싼 건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다. 30억이라니. 그것도 심지어 실시간 갱신 중이라니!
S급 게이트 공략 보상금을 죄다 갖다 박아도 안 될 것 같은데.
━뭘 고민하는 척이야. 그냥 평상시 했던 대로 떼먹으면 그만 아니냐.
‘나쁜 놈 돈이면 몰라도 여기에서 착실하게 일하는 사람들 돈을 어떻게 떼먹습니까?’
그리고 이대로 튀면 모든 책임이 노먼에게로 향할 테니, 어쩔 수 없지.
━놀아 드려라, 성심성의껏.
‘예.’
나는 테이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신의 호의 고맙게 받도록 하죠!]
정이 떨어질 상황임에도 테이카는 내 말에 방긋 웃기만 했다. 테이카가 호구라서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은 한서현이 내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이에요?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데.”
역시 한서현. 영어는 못해도 눈치는 빠르다고! 나는 침착하게 한서현에게 말했다.
“음, 아무래도 우리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다.”
그 말에 한서현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잠깐만! 무슨 짓이야!”
“우리 정체를 들켰다면서요!”
손을 들어 올린 테이카가 재빨리 말했다.
[워, 워! 친구한테 내 얘기 잘 좀 전해 줘요. 난 그쪽이랑 싸울 생각 전혀 없다고.]
손을 휘저어대며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고 어필하고 있는 테이카를 보고 있자니, 황당함에 말도 나오지 않는다.
저런 게 세계 최강의 헌터?
“보면 알겠지만, 우리랑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단다.”
“그래 보이긴 하네요.”
한서현은 순순히 마력을 가라앉혔지만, 여전히 두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그럼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데요.”
“그러게, 나도 그게 참 궁금하다.”
이제 나도 그걸 물어볼 참이다.
[우리한테 뭘 바라는 겁니까?]
일부러 오승우가 없을 때 티를 낸 걸 보니, 우리를 신고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아니, 그럼 우리에게 굳이 아는 척을 할 이유가 있나?
[아! 그거요. 솔직히 그쪽이 미스터 오 제안을 받아 주길 기대하고 오긴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무리더라고요.]
테이카가 눈을 찡긋거렸다.
[아무래도 그쪽은 지금 정체를 숨기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당신은 골든데이의 이산호 씨가 아닐 테니까. 저번에 나한테 말한 것도 거짓말이죠? 아, 일단 우리 통성명부터 할까요?]
[벨츠머츠의 션입니다…….]
이 닉네임을 직접 입으로 뱉을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마는구나.
━쑤어하오주한테는 잘만 써먹더니.
‘왠지 새삼 부끄러워졌거든요.’
내 말을 들은 한서현이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끼어들었다.
[벨츠머츠의 토트.]
━한서현을 봐라! 전혀 부끄럼이 없지 않으냐.
‘저럴 나이잖아요.’
새삼 자기소개를 읊고 있자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나저나 중요한 게 이건 아닐 텐데.
[그러니까 그쪽이 우리에게 바라는 게…….]
[너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에요? 그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일단 저는 아주 잘 지냈어요. 사실, 그 다음에 여기로 돌아와서 미스터 오한테 죽도록 깨졌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어요. 예브리카를 공략한 다음 호주의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는 거 들었어요? 호주 쪽에서 나한테 감사패를 보냈는데, 그쪽의 공이 더 크다고 말하고 싶었다니까요. 미스터 오가 뜯어말려서 실패했지만.]
테이카는 그야말로 따발총을 입으로 내뱉는 것처럼 우다다다 말을 던져댔다. 웬만한 영어 리스닝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한 나도 단어와 단어를 붙잡기 위해 정신을 최대로 집중해야 할 정도였다.
[그쪽들 소식도 중간중간 확인하긴 했어요! 미스터 오는 벨츠머츠랑은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뭐, 범죄 조직이 모두 다 나쁜 건 아니니까요. 물론 나쁘긴 한데, 그래도 그쪽은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더라고요. 사실 그래서 전문 빌런 잡지에서는 벨츠머츠를 올해 최악의 루키로 선정했던데 혹시 봤어요?]
전문 빌런 잡지는 또 뭐냐. 그런 게 있었어? 최악의 루키? 그건 또 뭔데.
[아니요. 대체 왜 최악이라는…….]
[오! 벨츠머츠가 올해의 선정 최악의 루키가 된 이유는 간단해요. 너무 ‘착하게’ 굴었기 때문이죠. 나이스하다는 게 빌런 쪽에서는 욕이 될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그 잡지에서는 그러더라고요. 아, 평가 기준은 이거였어요. ‘이놈들은 진정한 빌런이 될 수 없다. 악인만을 처단한다는 그 빌어먹을 놈의 기준이 보아하건대, 이놈들은 헛된 히어로 망상증에 걸려 있는 듯하다!’랬나.]
테이카가 말을 쏟아 내는 동안 내가 한 거라고는 고르게 숨 쉬기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가. 그동안 이 말들을 어찌 다 참고 있었던 거지? 내 질린 표정에 테이카가 아하하,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동안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한 마디도 못했다고요! 내가 진짜 그쪽에 얼마나 궁금한 게 많았는데. 아, 잡지에서 한 말이 너무 심했다면 미안해요. 정확하게 전달해 주려는 마음에, 그만. 내가 그쪽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 전혀 걱정하지 말아요.]
아니, 나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낼 시간을 주고서 말을 해야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테이카의 미친 듯한 말 ‘쏟아 냄’(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대화라고는 부를 수 없다. 말을 쏟아 낸다는 표현이 정확하다)에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나랑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더니, 정말로 많았네요.’
그야말로 질릴 정도다. 내 얼굴이 실시간으로 탈색되는 도중에도 테이카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아, 그래! 그 모래 말이에요. 어떻게 다룰 수 있게 된 거예요? 원래는 예브리카가 소환했던 모래를 이용한 거잖아요. 오! 맞다, 혹시 예브리카의 마정석 효과인가요, 그거?]
역시 보고 경험한 게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바로 정답이 튀어나오는군.
그나저나 너무, 너무…….
‘너무 가까이 붙은 거 아니냐!’
말을 쏟아 내는 동안 슬금슬금 다가온 테이카의 얼굴이 어느새 바로 내 코앞에 있었다.
[저, 그 조금만 거리를 벌려 줬으면 좋겠는데요.]
이상하다. 미국인들은 퍼스널 스페이스인가, 뭔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는데. 테이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인 것 같았다.
[앗차차,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앞서서.]
[음…….]
정말 여러모로 부담되는 사람이다.
나는 천천히 테이카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토트가 다룬 그 모래는, 그쪽이 생각한 바가 맞습니다.]
이것 또한 비밀이라면 비밀이겠지만, 이미 다 봤으니까. 게다가 전력을 숨긴다고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도 했고.
[오, 역시 대단하네요! 적의 힘을 빼앗아 그대로 사용한다니. 확실히 네크로맨서다워요. 제가 본 네크로맨서 중에서도 최곱니다!]
[흠, 확실히 그렇긴 하죠.]
한서현의 칭찬에 나도 모르는 사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흠, 그렇지.
━정신 차려라!
앗차차! 레이의 경고가 없었다면 속절없이 저놈에게 넘어가 버릴 뻔했다.
‘위, 위험했네요. 쉴 새 없는 말로 저의 정신을 빼놓다니. 역시 세계 최강의 헌터답군요.’
━그냥 네가 못 말리는 팔불출인 게 문제 아니냐?
아니, 내 잘못이 아니다. 한서현이 뛰어난 네크로맨서라는 건 부정할 길 없는 사실이니까.
[……저희한테 원하는 게 뭔지 확실하게 말해 주시죠.]
저 지옥의 주둥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제18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