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352
89 이이제이(以夷制夷) (3)
설록진은 김석훈의 부름에 김석훈의 자택 쪽으로 향했다.
미리 정해져 있는 만나는 날이 아닌데도, 급히 자신을 찾는 일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일이 있다면 ‘취소를 해서라도’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
김석훈 전 대통령은 자기 주제를 아는 인간이었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일단은 설록진의 일정을 배려해 주었다. 은퇴한 자신과 아직도 현역에서 힘을 쓰는 설록진의 가치는 다르다며 말이지.
그랬던 인간이, 이렇게 다짜고짜 자신을 부른다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설록진이 제 다도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김석훈은 그를 앉히고는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김석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과연 그의 기준에서 ‘급한 일’이 맞긴 맞았다.
“제가 뒤를 캤다고요?”
“모르는 척할 생각은 말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흐음.”
김석훈의 말에 설록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김석훈은 설록진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배신감 때문인가? 아니,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든, 겉으로는 하하 호호 웃으면 적당히 경고를 주고 넘어갔을 일을, 이렇게 깊게 파고들다니.
정말로 설록진이 김석훈의 뒤를 캤다고 하더라도, 이런 반응은 김석훈답지 않았다.
“제가 캐낸 비밀이 무엇이길래요?”
그만큼, 제가 알아냈다던 비밀이 치명적인 것일까. 설록진의 질문에 김석훈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모르는 체를 할 생각인가?”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모릅니다.”
“양양시 저택, 뭐 떠오르는 게 없나?”
떠오르는 게 있을 리가. 설록진은 정말로 김석훈의 뒤를 캐지 않았다. 왜냐, 설록진에게는 김석훈 의원의 뒤를 캘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설록진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다. 이미 김석훈 의원은 설록진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리고 그 태도에서 설록진은 무언가를 읽어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김석훈의 행동에서 평소와의 차이를 거의 찾아내지 못했을 테지만, 설록진은 달랐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며 몇백, 몇천의 사람을 지켜본 그에게는 보였다. 그 미묘한 차이가.
‘정신계 재능이려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김석훈을 바라보면서도 설록진은 태연히 그리 생각했다.
만약 정신계 재능에 당한 거라면……. 설록진이 김석훈을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할 거다.
조용히 설록진은 머릿속에서 김석훈의 가치를 가늠했다.
자신의 능력을 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 가늠은, 순식간에 끝이 나 버렸다.
“그 정보를 어디에서 알아냈는지 내게 모두 털어놓게. 그리고 그 정보를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해 줬으면 좋겠어.”
김석훈이 제게 내민 ‘계약서’에 설록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노리던 물건이 제 앞에 내밀어졌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이곳에 사인하지 않으면요?”
“내 모든 걸 걸고 자네를 파멸시켜야지.”
“제가 아는 정보가 두려워, 이런 식으로 제 입을 막으려 하셨으면서 제가 내뱉을 말은 두렵지 않으신가 봅니다.”
“자네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거야. 내겐 나를 보호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지. 이 버튼을 누르면, 바깥에서 사람들이 달려올 거야.”
그 협박에 설록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한낮에 당신의 집에서 현직 국회의원을 살해하겠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할 수 있어, 나라면. 자네가 제아무리 날고 기는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나 또한 아는 이들이 많으니까 말이지. 자네는 결국 대체 가능한 인물일 뿐이지 않나.”
그 말에 설록진의 얼굴이 굳었다.
“대체 가능하다…… 라.”
“그래! 그러니 어서 이 계약서에 사인하게.”
김석훈의 말에도 설록진은 그 계약서에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 빳빳한 태도에 김석훈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할 때, 설록진이 선수를 쳤다.
“나는 당신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아.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주제에 당신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됐잖아? 그래,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멋지다고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도 생각했지.”
설록진의 뜬금없는 말에 김석훈은 얼굴을 구겼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제게 내뱉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지금 내게 반말을 한 건가?”
하하, 그 지적에 설록진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중요한 게 그건 아닐 텐데……. 하긴,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결국, 자기가 쌓아 올린 왕관에 취해서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착각해 버린 바보란 말이야. 실제 당신에게는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도.”
설록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김석훈을 내려다보며 설록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에게서 배울 건 없어. 당신에게서 받을 것도. 당신의 가치는 이미 모두 사라졌다고.”
그 말에 김석훈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네놈!”
“당신은 착각하고 있어. 당신은 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야. 내가 당신을 선택한 거지.”
그동안 뒤집어썼던 가면을 설록진은 완전히 벗어던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거라면, 누군가에게 휘둘려 일이 이렇게 돼 버렸다는 것.
“당신에게 궁금한 건, 하나뿐이야.”
설록진의 동공이 노랗게 물들었다.
“누구야, 당신에게 이 생각을 심어 준 건.”
“으, 으아악!”
머릿속이 헤집어지는 감각에 김석훈은 비명을 내질렀다. 설록진의 미간 또한 좁혀졌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뒤진다는 건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곧 설록진은 그의 머릿속에서 원하던 정보를 빼냈다.
노랗게 물들었던 동공이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태석…….”
몇 번 오며 가며 봤던 김석훈의 비서. 하지만 설록진은 알고 있었다. 진짜 정태석이었다면, 감히 이런 짓을 벌이지 못했을 거라는 걸.
그러니 김석훈의 기억에 있는 정태석은, 정태석이 아닐 거다.
‘정태석의 얼굴을 뒤집어쓴 다른 놈.’
설록진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로 알아내고 싶었던 것은 모두 알아냈으니. 김석훈은 침을 줄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설록진은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넋을 잃은 얼굴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김석훈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김석훈이 방에서 나간 뒤, 설록진은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기대는 순식간에 깨졌다.
“하아.”
계약서는 가짜였다. 마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종이에 설록진은 허탈한 미소를 터트렸다.
“이런 싸구려로 사람을 속이려 하다니.”
감히 설록진을 앞에 두고 가짜를 꺼내 올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테니, 김석훈 또한 속은 것일 거다. 아마도 중간에 바꿔치기 당한 거겠지.
이걸 빼돌린 놈은, 높은 확률로 이 상황을 만든 사람과 동일 인물일 거다.
‘흐음…….’
설록진은 계약서를 잘 접어 주머니에 챙겼다. 문을 드르륵 열고 나간 설록진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의원님!”
맑은 목소리에 설록진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쩐 일로 오셨어요?”
김영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설록진을 보며 수줍어하고 있었다. 설록진은 김영호의 얼굴을 차분히 훑었다.
“볼일이 있어서.”
“아버지랑요?”
“응.”
“무슨 얘기인지는, 아, 물론 말씀하실 수 없겠죠? 아무래도 제가 알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일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김영호의 얼굴에는 설록진을 향한 동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저도 얼른 커서 의원님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저 이번에 시험도 잘 봤고…….”
김영호의 얼굴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설록진이 나긋한 목소리로 김영호에게 물었다.
“영호는, 전 대통령님을 많이 사랑하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김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갑자기 왜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영호는 어떨까 싶어서 말이야.”
“그게 갑자기 무슨…….”
“그래, 그분도 참 걱정되실 거야. 오로지 네 걱정뿐인 분이었거든. 네 걱정에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정도로.”
김영호의 머리에 손을 뻗은 설록진은 가볍게 김영호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김영호는 갑작스러운 설록진의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설록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니까 널 여기에 혼자 남겨 두면, 그분이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그렇지?”
“저, 저는…….”
어느새 설록진의 동공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김영호의 동공 또한 그랬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영호에게 설록진이 무어라 속삭였다.
멍한 표정을 지은 김영호는 곧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록진은 김영호를 지나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쿠웅, 그리고 또 쿠웅.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설록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속보)김석훈 전 대통령과 그의 아들,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이런…….”
뉴스를 확인한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 뒤로 이어진 뉴스에서 나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인은 추락사. 자택 뒤쪽에 있는 테라스에서 비어 있는 수영장 쪽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거다.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고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는 것을.
김석훈 전 대통령과 그의 늦둥이 아들이 모두 자살했다는 소식은 세상을 뒤흔들었다.
TV에는 검은색 양복을 걸친 설록진이 나오고 있었다. 설록진의 얼굴은 창백했고, 그의 두 눈에는 슬픔이 가득해 보였다. 그의 눈가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붉었다.
설록진은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리내당 소속 의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도 김석훈 전 대통령님의 죽음은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김석훈 전 대통령님은 제게는 마치 어버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업적은…….]
나는 차마 그 방송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TV를 꺼 버렸다.
“저 개자식이.”
나는 설록진을 안다. 그래, 저놈한테는 양심이라는 게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부자를 모두 죽여 놓고 저렇게 뻔뻔한 방송을 해?
김석훈 의원과 설록진의 사이를 벌려 놓는다는 건 분명 내 생각이었다. 어쩌면 설록진이 김석훈 의원을 이렇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건, 설록진이 김영호에게도 손을 댄 거다.
‘그 애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입이 썼다.
제35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