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18
17화. 3판 2선 (2)
못마땅하다는 유리의 기색과는 달리 이를 마주한 요한의 얼굴은 근래 들어 가장 밝았다.
요한은 도통 유리가 뭐 때문에 심통이 났는지 모르겠다는 어투로 답했다.
유쾌함과 상쾌함을 가득 담아.
“뭐가 말이냐?”
“내 눈이 이상한가… 저 빌어먹을 게 왜 여기 있어?”
“어허, 네 이놈! 우리 붕붕이에게 빌어먹을 것이라니! 당장 그 말 취소하거라! 내 분명 오래된 물건에는 영혼이 깃드는 법이라 하였거늘! 우리 착한 붕붕이 상처받는다!”
“뭔, 개소리를! 아니, 약속했잖아? 내가 크롬까지 이틀 안에 도착하면 저 빌어먹을 거 안 끌어도 된다고! 체력 단련은 끝이라고!”
“내가 언제?”
“이 영감탱이가!”
“허허,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
“내가 언제 체력 단련이 끝이라고 했냐? 크롬까지 이틀 안에 도착한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했지.”
“……?!”
요한의 이야기에 유리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확실히… 그랬지.’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저 빌어먹을 영감탱이의 말장난에 놀아났다는 것을.
유리의 얼굴이 썩어 가면 썩어 갈수록 요한의 낯빛은 환하게 변해 갔다.
마치 지난 항해 동안 유리 때문에 겪은 마음의 고초가 샤르르- 치유되듯 말이다.
“푸흐흐, 우매한 애송아, 아무리 마나를 품었다고 해도 체력과 육체의 단련은 평생 해 나갈 과업인 거다!”
비웃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에 유리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가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 좋아. 내가 백번 양보해서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영감…….”
“왜 자꾸 불러?”
“저건 뭔데!”
그가 부활한 붕붕이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유리의 손가락이 향한 곳.
그곳에는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유리의 분노에 요한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뭐가? 무슨 문제라도 있냐?”
“문제? 문제에에? 지금 문제라고 했어?”
천진난만한 요한의 어투에 결국 유리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아니, 대체 수레바퀴는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그랬다.
요한이 가져온 수레.
부활한 붕붕이는 이제 수레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양쪽의 바퀴가 모두 없었으니까.
유리의 격노에 요한은 너무도 기쁘다는 듯 답했다.
“클클클. 기껏 마나도 익히고 몸도 좋아졌는데 난이도가 이전과 같아서야 훈련이 될까?”
거기까지 말한 요한이 잽싸게 바퀴 빠진 붕붕이에 올라탔다.
그리고 의족을 난간에 올리며 소리쳤다.
“시간 없다 애송아! 후딱후딱 움직여라! 여기서 날 샐 셈이냐!”
신이 나 소리치는 요한을 보고 유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주받을 노친네…….”
그리 욕하면서도 수레의 손잡이를 잡는 것을 보니 아직 몸이 수레 끌기 체력 훈련을 기억하는 듯싶었다.
“자, 출발!”
그렇게 니제르 행정구에 발을 내디딘 첫날.
유리의 고된 훈련이 다시금 시작됐다.
* * *
유리와 요한이 니제르에 발을 내디딘 지 보름이 흘렀다.
니제르 행정구와 발탄 행정구를 나누는 냉벽 산맥의 끝자락.
땅- 땅- 땅-.
시간이 흘러 해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때쯤.
쉼 없이 울리던 소리가 마침내 사라졌다.
그리고 소리의 진원지.
끼익-.
이틀 내내 새하얀 수증기를 피워 올리던 대장간의 문이 벌컥 열리며 2m가 넘어가는 거구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넙데데한 얼굴과 거칠게 자라난 빳빳한 흰 수염.
그리고 위압감을 조성하는 우락부락 거대한 근육.
“흠…….”
조금 전까지 쇠를 두들기고 있던 랄프 슈넬은 해가 떠오른 동쪽을 응시했다.
햇빛을 받은 그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른 시간부터 어떤 후레 잡놈이…….”
동쪽의 저편.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강한 살기가 랄프의 작업을 방해했다.
그가 집중을 깨고 밖으로 나오게 할 정도의 농도 짙은 살기.
때문에 랄프는 저 예의를 내다 버린 불청객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 버릴 생각이었다.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즈그극- 즈그극-.
기괴한 소리와 함께 누런 흙먼지 구름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번뜩이는 시퍼런 안광.
“시부… 럴 죽인다… 시부럴… 주, 죽인다…….”
연신 이어지는 욕설에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바퀴가 없는 기괴한 수레.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수레를 끄는 상거지 꼴의 소년.
그 기괴한 조합의 등장에 거한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러.
즈그극-.
마침내 바퀴 없는 수레와 상거지 소년, 유리가 랄프의 앞에 도달했고.
“도, 도… 착했…….”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리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며 기절했다.
“…이건 뭐 하는 놈이야?”
난데없는 상황에 랄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기절한 유리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익- 푸스럭-.
안 그래도 심하게 낡았던 바퀴 없는 수레가 그대로 부서졌다.
앞뒤 좌우, 마치 선물 상자가 열리듯 수레의 나무판자가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둥글게 말려 있는 담요.
푸스스-.
“푸헛!”
폴폴 날리는 먼지 속에 담요가 꿈틀거리며 굵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사람의 인기척에 랄프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
요람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열두 명의 명인.
그중 여섯 번째 검, 랄프 슈넬은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누군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체 누가?!’
랄프가 경계심을 높이며 기세를 끌어올리자 맞은편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잉! 거, 애새끼, 먼지 안 날리게 살살 달리라니까.”
투덜거림과 함께 담요가 확 젖혀지며 드러난 낯익은 얼굴.
“아이고 이런, 불쌍한 우리 붕붕이… 그동안 고생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거라.”
기절한 유리보다 부서진 수레를 더 측은하게 바라보는 이의 얼굴을 본 랄프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한… 선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요한이 깔짝깔짝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다.”
* * *
대장간의 옆에 딸린 2층짜리 주택.
우락부락한 랄프의 인상과는 달린 그의 집 내부는 아담하고 정갈했다.
달그락-.
집주인인 랄프가 요한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여까진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무려 15년 만에?”
15년 동안 찾지도 않더니 뭐 때문에 왔냐는 타박.
나이 먹은 후배의 투정에 요한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너 샤리 있지? 왜, 예전에 그거 얻었다고 자랑했잖냐.”
“20년도 더 된 일을 기억하십니까?”
“네놈이 오죽 자랑질을 했어야지.”
“험험, 아무튼. 정말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요? 20년 전에야 있었지, 지금은 없으면 어쩌려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문제고. 그리고 네놈 성격상 그런 물건이라면 꽁꽁 쟁여 뒀겠지. 너 원래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반짝이고 예쁜 거 좋아했잖으냐.”
“사람을 생긴 거로 판단하는 거는 옳지 못한 습관…….”
“시끄럽다. 그래서 있어 없어?”
“그건 뭐 때문에 찾으십니까?”
“다 저 썩어 빠질 놈 때문이지.”
요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방 한쪽 구석에 걸레처럼 널브러진 유리를 턱짓했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랄프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흠, 내 안 그래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 꼬맹이는 뭡니까?”
“뭐긴, 우라질 놈이지.”
“제자요?”
“제자는 무슨. 나 그런 거 안 키운다.”
“이제 제자 좀 키울 때 되지 않았습니까? 레드너 가문의 비전을 선배 대에서 끝낼 셈이요?”
랄프의 이야기에 킁- 하고 콧방귀를 낀 요한.
그가 술 한잔을 털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레드너의 마지막 가주는 나다. 내 걸 내가 말아먹든, 팔아먹든, 네놈이 뭔 상관인데?”
“아까워서 그러오, 아까워서! 레드너 가문의 마체술이 어디 보통 마체술입니까? 그게 그대로 사장된다면 범인류적 손실인데?”
“뭐, 틀린 말은 아니구나.”
“여튼 그래서… 저 녀석이 제자라는 거요 아니라는 거요?”
“아니라니까. 내 비록 저 녀석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고는 있다만, 제자라 생각지 않는다. 저 녀석도 날 스승이라 여기지 않을 테고.”
“오호? 그러니까 뭘 알려 주고 있긴 있다는 거잖소?”
“그래.”
“보통 그런 걸 사람들은 사제 관계라고 합니다만?”
“어허, 아니래도! 저놈과 난 그저…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인 거다!”
“맞으면 맞는 거지, 뭘 그리 복잡하게 꼬아서 생각하는 겁니까?”
“…그냥 네놈 편할 대로 생각해라.”
더는 입씨름하기 싫다는 듯 요한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에 향했다.
동시에 요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살짝 고심하는 듯한 얼굴.
“흠… 뭐냐, 이건?”
잔을 들어 요리조리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건 귀부인들의 사교 모임에서나 쓸 법한 찻잔이 틀림없었다.
이에 요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요즘 술잔은 이렇게 만드는 게 유행이냐?”
“그거 찻잔 맞수다.”
“미친 게야? 너랑 나랑 오붓하게 차 마실 사이냐? 당장 술 가져와, 임마!”
“…술 끊은 지 좀 됐습니다.”
“세월이 세월이긴 한가 보다. 네놈 입에서 술을 끊었다는 정신 나간 소리가 다 나오고.”
“커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5년 만이니 저도 당연히 변했습죠.”
“옘병하고 있네,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네놈이 술을 끊었다고? 얌전히 한 병만 가져다 바칠래, 아니면 내가 집구석 뒤져서 싹 다 털어 버릴까?”
“끙…….”
요한의 으름장에 랄프는 쭈뼛쭈뼛 일어나 찬장에서 술을 꺼냈다.
살짝 열린 찬장의 틈으로 언뜻 보이는 술병의 개수에 요한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었다.
“에라이, 저리 많이 꼬불쳐 두고 고작 한 병 내놓는 게 아까워서 차를 내오냐? 네가 그러고도 내 후배냐!”
“나한테 술 맡겨 뒀나…….”
“뭐 인마?”
부릅뜬 요한의 눈에 랄프는 살짝 어깨를 움츠리고 후다닥 술을 내왔다.
그렇게 결국, 내온 찻잔은 술잔이 되었다.
쪼르르-.
적막 속에 퍼지는 달짝지근한 술 향기.
대화 없이 몇 잔의 술이 빠르게 오갔다.
둘의 경지가 경지이다 보니 고작 그 정도로는 취기가 오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술자리 특유의 분위기는 쉬이 입에 담기 힘든 대화 주제를 꺼내게 했다.
취하지 않더라도 술을 마셔야지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건… 어찌 된 겁니까.”
그리 운을 뗀 랄프의 눈길이 요한의 낡은 나무 의족에 향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요한이 피식 웃었다.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나한테 직접 듣고 싶은 거냐?”
“…후자요.”
“우라질 놈, 병신 된 이야기를 당사자한테 듣고 싶어? 못 본 새 성미가 고약해졌구나.”
“그리 말할 거면 애초에 자주 연락이라도 하지 그러셨소. 내가 그 이야기를… 남을 통해 들어야겠습니까?”
“그럼, 알고 있으면 됐지, 뭘 캐물어, 캐묻기는?”
“…….”
랄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꼭 들어야겠단 의지를 읽은 요한.
그는 빠르게 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뭐, 별거 아니다.”
살짝 입가에 흐른 술 방울을 훔쳐 낸 그의 눈에 허무가 깃들었다.
“너도 알고 있다시피, 15년 전 싸움에서…….”
그리고 연달아 두 번째 잔을 들이켰을 때, 깃들었던 허무는 씻겨 내려갔고.
3번째 잔을 연거푸 마셨을 때.
“…목숨 대신 빼앗겼다. 그 빌어먹을 괴물에게.”
씻겨 나간 허무 대신 날카로운 의지가 새로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