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6
35화. 혹한기 생존 (1)
우득우득-.
목을 좌우로 꺾는 것으로 몸 상태 확인을 마무리한 유리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휑-.
그 많은 사람으로 바글거리던 객실에 유리만이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뭔, 썰물 빠지듯 쑥 빠져 버리냐.”
배가 정박하기 무섭게 순식간에 텅텅 비어 버린 객실.
그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남들이 다 빠져나갔음에도 느릿느릿 느긋하게 행동하는 유리는 애검 흰둥이를 들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조금 걸어가니 저 멀리 범선의 출구에서 대기 중인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웅성웅성-.
출입구는 좁은데 한꺼번에 몰린 이들이 많으니 병목현상이 일어난 거였다.
이를 본 유리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빨리 움직일 거면 가장 첫 번째로 내리든가.
그러지 않으면 저렇게 어중간하게 끼어 시간을 낭비하는 거였다.
“차라리 쉬면서 아예 마지막에 내릴 생각을 하든가. 쯧.”
잘게 혀를 찬 유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저 인파에 끼어들어 마지막에 내릴 생각이 없었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굳이 저기로 내려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배에서 내리는 데 출구를 거칠 필요가 있나?
길이란 개척하는 거다.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범선과 선착장을 연결한 홋줄이 시야에 들어왔다.
훗줄이 묶인 곳은 출구와 정반대, 구석진 자리.
이를 발견하기 무섭게 유리는 몸을 날렸다.
탁-.
가볍게 난간을 박차고 그대로 홋줄 위로 올라선 유리가 빙판에서 미끄러지듯 홋줄을 타고 내려왔다.
솨아아아-.
어린아이 팔목 두께의 홋줄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놀라운 균형감각.
경쾌하고 가벼워 보이는 몸놀림으로 홋줄을 타고 미끄러지는 유리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즐거워 보이는 황금안이 반짝인 것은 덤.
하지만 그건 잠시 잠깐이었다.
탁-.
유리가 짧게 뛰어올라 지면에 착지한 순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다시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남들은 기다리고 있을 때, 유유히 범선을 빠져나온 유리는 주머니에 속을 쓱 찔러 넣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오와?”
아찔한 높이의 돛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던 푸른 머리의 소녀.
그녀는 멀어지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마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한 듯, 과하게 반짝이는 눈빛.
푸른 머리 소녀는 살짝 미소 지어 보이고는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탁-.
엄청난 높이에서 낙하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정확하게 유리가 밟았던 훗줄로 떨어졌다.
푸른 머리 소녀의 무게에 홋줄이 살짝 밑으로 가라앉고, 그 탄력을 이용해 소녀가 다시 튕기듯 날아갔다.
떠오른 소녀의 육신이 공중에서 가볍게 두 바퀴 회전했다.
사라락-.
생기 넘치는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탓-.
마침내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짠!”
두 팔을 벌려 무사히 지면에 안착한 소녀는 활짝 웃었다.
아무리 홋줄을 이용해 낙하하는 속도를 한 번 죽였다고 해도, 말이 안 될 정도의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 높이에서 홋줄을 향해 몸을 날린 대담성부터가 놀라웠다.
사박-.
너무도 완벽한 착지를 선보이며 범선을 벗어난 푸른 머리의 소녀는 이내 폴짝폴짝 토끼 같은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소녀가 사라진 길은… 조금 전 유리가 나아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 * *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선착장에 내린 유리.
그는 먼저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의 행렬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동시에 유리는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선착장에서 조금 벗어나니 목적지가 드러났다.
‘성벽?’
예비 기수들의 행렬은 다름 아닌 높게 솟은 성벽을 향하고 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성벽.
예비 50기 기수들은 그대로 성벽의 문을 통과했다.
동시에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뭔…….”
“와…….”
보통 성벽의 안쪽은 도시가 있으리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친 성벽은 달랐다.
그 안에 자리한 것은 침엽수가 가득 들어찬 광활한 숲이었다.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숲.
“여긴 대체……?”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그들의 걸음은 성문 바로 앞쪽에 마련된 너른 공터에 도착해서야 정지했다.
공터는 나무를 베어 내어 만든 공간이었다.
그곳의 특이한 점은 공터의 중앙에 딱 한 그루의 나무가 남아 있다는 것과 그 나무에 사람 머리만 한 종(鐘) 하나가 매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가 요람인 거야?”
“저 종은 뭐야?”
낯선 공간에 도착한 이들은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추론하기 바빴다.
웅성웅성-.
그사이 범선에서 내린 사람이 속속들이 성문을 통과해 모든 이들이 공터에 도착했다.
그러자.
드르르르르-.
쿠그그긍-.
굉음과 함께 철로 만든 성문이 떨어져 내렸다.
쿠우웅!
이윽고 먼지를 폴폴 날리며 굳게 닫혀 버린 성문.
“뭐,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이들이 성문 쪽을 바라본 순간.
척- 척- 척-.
성벽 위로 검은 망토를 두른 흑검병들이 나타나 일렬로 늘어섰다.
굳게 닫힌 성문과 살벌한 기운을 뿌리는 흑검병들의 모습은 흡사 적군을 맞이한 병사처럼 느껴졌다.
성벽이 닫힌 것에 놀라 웅성거리던 이들도 휘몰아치는 흑검병들의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터벅-.
다른 흑검병과 달리 견장이 달린 망토를 두른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190㎝의 거구.
난자된 흉터로 가득한 넙데데한 얼굴과 밤송이 같은 턱수염.
왼쪽 눈은 아예 뭉개진 상태로 상처가 아물었음에도 안대조차 하지 않아 그 끔찍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터벅- 터벅-.
사내는 묵직한 걸음으로 망루에 올라섰다.
쾅-.
망토 밖으로 드러난 갈색 부츠가 바닥을 강하게 디디고.
“환영한다, 애송이들.”
중년인의 흉터가 꿈틀거리며 비릿한 미소가 엿보였다.
그는 거만한 눈빛으로 성벽 아래 예비 기수를 응시했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시작의 숲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리 부르지…….”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마나가 담겼기에 고루 퍼져 나갔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요람의 일원이 되려는 버러지를 걸러 내는 통이라고.”
중년인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예비 50기 기수들을 향해 팔을 들었다.
“너희가 기억해야 할 건 다섯 가지다.”
중년인은 예비 기수들에게 손등이 보이게 손가락을 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엄지가 접혔다.
“첫째, 한 달 동안 생존해라. 악착같이 살아남은 이들만이 ‘예비’란 딱지를 떼고 50번째 기수로 거듭날 것이다.”
두 번째로 검지가 접혔고.
“둘째, 예비 기수들 간에 살인을 금(禁)하나 살인을 제외한 모든 것은 허(許)한다.”
다음은 중지를 건너뛰고 약지였다.
“셋째, 각자 소지한 용패는 너희의 목숨이다. 용패가 파손된 이는 시체로 간주한다.”
이어 새끼손가락이 접혔다.
“넷째, 재도전의 기회는 없다. 여기서 걸러진 버러지들은 평생 요람이 있는 땅을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할 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꼿꼿이 서 있는 중지가 접힐 차례.
하지만 그는 중지를 접지 않고 히죽거렸다.
“마지막 다섯 번째, 포기하고 싶은 병신들은 거기 있는 종을 쳐라. 그럼 무사히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 프흐흐.”
예비 기수들을 향해 중지를 까닥거리며 웃음을 터뜨린 중년인.
그게 ‘훗날 포기하고 종을 칠 병신’을 향한 손가락 욕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중년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음 말을 남겼다.
“기억해라, 1월 1일까지 살아남은 녀석들만이 진정한 요람의 땅을 밟을 수 있으리란 걸!”
펄럭-.
그 말을 끝으로 중년인은 망토를 휘날리며 뒤돌아 사라졌다.
동시에 성벽 위에 자리했던 흑검병들도 자취를 감췄다.
마치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는 듯 단호한 퇴장.
실로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
싸늘한 침묵이 공터에 감돌았다.
잠시 뒤, 침묵은 혼란으로 뒤바뀌었다.
“…어? 그러니까 여기가 요람이 아니란 거야?”
“생존? 그게 무슨 소리야?!”
“젠장! 나는 요람에서 배움을 얻고, 정당한 경쟁을 통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온 거다! 이딴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려고 온 게 아니라!”
대다수의 예비 기수는 요람을 아카데미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교육 수준과 그에 걸맞은 교육 환경.
그리고 같은 기수 동기 간의 불꽃 튀는 경쟁.
그게 대다수 예비 기수들이 상상했던 요람에서의 생활이었다.
한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니.
자신이 꿈꾸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 예비 기수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들불처럼 번져 갔다.
한편, 휘몰아치는 혼란 속에서도 유유히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있었으니.
‘오호라? 그런 거야?’
슬쩍 미소를 지은 유리는 혼란을 틈타 슬금슬금 조용히 공터 외곽으로 이동했고.
스르륵-.
귀신처럼 공터에서 빠져나와 광활하게 펼쳐진 숲으로 들어갔다.
이는 흑검병이 사라지고 난 뒤 불과 10초 만에 벌어진 일.
유리보다 먼저 움직인 존재는 없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러.
몇몇 사람의 눈빛이 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들은 머릿속에 흉터투성이 사내의 말이 빠르게 되풀이됐다.
‘일단 이곳이 요람이 아닌 건 확실해.’
‘한 달간 생존이라… 이건 이번 기수를 분별해 내기 위한 시험이다.’
‘시험의 주제는… 생존.’
‘그러나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지급해 주지 않았다. 그 얘기는……?’
마침내 몇몇이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숲에 생존 도구가 있다는 거다!’
생존을 위한 식량과 불을 피우기 위한 도구 등.
그 수는 결코 503명의 예비 기수가 넉넉히 사용할 정도가 아닐 거다.
그럼 가장 먼저 움직이는 이가 필요한 생존 도구를 선점할 수 있을 터.
‘만약 운이 좋다면… 다수의 생존 도구를 독점해 우위를 점할 수도 있어!’
이건 다수의 경쟁자를 떨어뜨릴 절호의 기회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빨리 숲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 판단한 몇몇이 혼란을 틈타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그중에는 푸른 머리 소녀와 군터, 그 외에도 다수의 명문가 사람이 섞여 있었다.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공터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이상함을 알아차린 이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
‘어?’
‘사람이 좀 없어진 거 같지 않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몇몇이 의문 섞인 시선으로 주변을 살렸다.
그러다가 눈치는 있으나 자제력이 부족한 어느 한 멍청이가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만 것.
“아! 숲이구나! 숲에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 있는……!”
그래도 완벽하게 멍청한 것은 아닌지 그는 다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주변 눈치를 봤다.
하지만 눈치는 그만 보는 게 아니었으니.
데룩데룩-.
그의 중얼거림은 그리 작지 않았으니 주변에서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중얼거림을 들은 주변 모두가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먼저 움직인 사람이 무조건 이득을 보는 일이란 걸.
그저 여기서 자신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게 현명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눈치를 보고 있을 뿐.
다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스윽-.
한참이나 서로서로 눈치만 보던 순간, 누군가 발을 뒤쪽으로 뺀 것이다.
그게 신호였다.
탓!
한 명이 먼저 선수를 쳐서 튀어 나가자.
“아!”
“에이 씨!”
돌발 행동에 놀란 다른 10여 명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 같이 숲으로 달렸다.
그리고 이는 공터에 모인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저 녀석들 갑자기 왜 숲으로 달려… 아?! 이거 설마?!”
“젠장! 그런 거였어?!”
누군가는 달려가는 이들을 보고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여 숲으로 뛰었고.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왜 뛰는 거야?”
어떤 이들은 집단적 동조현상, 즉 군중심리에 휩쓸려 움직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남들이 뛰니 그냥 생각 없이 같이 뛰었다는 소리다.
우르르르-.
사람들로 가득했던 공터가 비워지는 것은 순식간.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대이동에 숲이 부산스러워지니 이에 놀란 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푸드덕-.
그렇게 흑색 범선이 시작의 섬에 도착한 지 30여 분.
503명의 예비 기수 전원이 시작의 숲, 속칭 ‘버러지 거름통’으로 투입됐다.
* * *
예비 기수의 대다수가 숲에 생존 도구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숲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먼저 숲으로 향했던 유리.
그의 생각은 달랐다.
‘이 숲에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확신을 품은 유리의 두 눈이 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