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7
36화. 혹한기 생존 (2)
유리는 빠르게 숲을 달려 나가며 애꾸눈 사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달 동안 생존해라. 악착같이 살아남은 이들만이 예비란 딱지를 떼고 50번째 기수로 거듭날 것이다.]유리는 그 말 중 ‘생존’과 ‘살아남은’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살아남으란 건 앞으로 우리가 지내야 할 환경이 최악이라는 소리일 거다.’
또한, 애꾸는 이곳을 ‘버러지를 걸러 내는 거름통’이라 칭했었다.
생존에 필요한 식량, 식수 및 기타 등등.
그런 것들을 일일이 다 챙겨 주면서 걸러 낼 사람을 걸러 낸다?
절로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하물며 예비 기수 중 마나를 품지 못한 이들은 없을 거다.
마나란 그 자체만으로도 생존 능력을 몇 배나 끌어올리는 기적의 힘이다.
쉬이 지치지 않는 체력.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 낼 저항성.
또한, 평범한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운동 능력 등.
극한의 상황에서 마나의 효용성은 무궁무진했다.
‘마나가 있다면 열흘 치 식량과 식수만으로도 한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런 잠재력을 품은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물품을 제공한다?
과연 그걸 ‘살아남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생존이야? 숲에서 놀다 오란 소리지.’
유리는 비웃었다.
그의 나이 7살 무렵.
유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수년간 대륙을 떠돌며 살아남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오는 더위와 추위, 강한 햇빛과 폭우, 폭설.
갈증과 배고픔, 맹수와 독충으로부터의 위협.
나아가 방방곡곡 숨어 있는 도적 떼까지.
유리가 직접 겪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생존’이란 극한의 환경에서 내던져졌을 때나 쓰는 단어였다.
챙길 거 다 챙겨 주며 야영 학습이나 시키는 일에 ‘생존’이란 거창한 단어 따위는 사치였다.
‘뭐, 손에 흙 한 번 안 묻혀 본 도련님들이나 다닐 법한 아카데미였으면 그딴 짓거리에도 생존이란 말을 가져다 붙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연 요람이 그런 곳일까?
다짜고짜 성문을 걸어 잠그고, 기타 설명 없이 규칙만 대충 설명해 준 뒤 바로 현장으로 내던져 버리는 놈들이?
그 불친절한 것들이?
따라서 유리는 이 숲 어디에도 요람 측에서 준비한 생존 도구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만에 하나의 확률로, 요람의 성향이 자신의 예상과 다를 수도 있었다.
‘요람이 앞에서는 잔뜩 겁주고 뒤에서는 말랑말랑하게 대하는 놈들이라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줄 확률도… 없지는 않아.’
하지만 이는 매우 불확실했다.
따라서 유리는 그런 불확실한 확률에 의존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생존 물품을 찾아다닐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직접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자급자족할 생각이었다.
‘겨울의 숲에서 취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유리가 누구보다 빠르게 숲으로 들어선 거였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숲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잘 내어주지 않는다.
숲을 잘 알고 있는 이가 갖은 노력을 해야 겨우겨우 얻어 가는 수준.
심지어 그 양 또한 그리 풍족하지 않다.
‘5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한꺼번에 숲을 헤집고 다니면… 금세 바닥날 거다.’
따라서 남들보다 빨리, 조금이라도 부지런히 움직여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아야 했다.
후욱-.
숲을 빠르게 주파하던 유리가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새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속도를 높여야겠어.’
조금이라도 빨리 비, 눈, 바람을 막아 줄 완벽한 은신처를 찾고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
뒤에 남은 500명이 본격적으로 자신과 경쟁에 돌입하기 전에 말이다.
스읍-.
깊게 숨을 들이마신 유리.
탓-.
빠르게 앞으로 쏘아진 그의 신형이 이내 숲속 깊숙이 사라졌다.
이때 유리는 한 가지를 실수를 범했다.
바로 예비 기수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숲에서 어떤 물을 마셔야 하는지.
어떤 것을 가려 먹어야 하는지.
심지어 어떻게 해야지 불을 피울 수 있는지 등등.
속칭 ‘있는 집 녀석’인 예비 기수들이 받은 고등교육 속에는 지금 상황에 쓰일 지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설사 이를 배웠다 하여도 그 지식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누적된 실전 경험이다.
가문의 울타리 속에서, 허드렛일은 시종과 시녀들에게 맡겨 온 그들이 쌓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그래도 요람에 들어올 정도니까, 내가 알고 있는 녀석들과는 다르겠지?’
…라던 유리의 생각은 처음부터 크나큰 오류를 품고 있었다.
* * *
숲에 들어온 지 열흘 차.
사흘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세상을 온통 새하얗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흘간 미친 듯이 퍼붓던 폭설이 그치고.
거의 허벅지 깊이까지 쌓인 눈밭을 헤치며 한 소녀가 휘청휘청 눈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서걱- 서걱-.
덜그럭 덜그럭-.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애처롭게 흔들리는 검 한 자루.
기어코 그 흔들림조차 감당하기 힘들게 된 소녀는 검을 풀며 근처 나무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거의 눈 속에 파묻히다시피 한 소녀.
그녀는 꽁꽁 언 손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소녀의 눈에 옅은 고통이 스쳤다.
‘하다못해 불이라도 피울 수 있었으면… 조금이라도 몸을 녹일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마나를 돌리며 추위를 버티고 있다지만, 이를 계속해서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종종 이렇게 마나 운용이 멈출 때면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에 따뜻한 불의 온기가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을 피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깊고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녀가 보았던 책 속에서는 돌끼리 부딪혀 불을 피운다거나, 마찰열을 이용해 불을 만든다 등의 방식이 적혀 있었다.
이를 떠올리고 시도는 해 보았지만, 불씨는 고사하고 연기조차 피울 수 없었다.
새삼 자신의 방을 따뜻하게 데우던 벽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소중함을 깨달은 건 불의 온기만이 아니었다.
꼬륵-.
배 속에서 공복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소녀의 입에서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배고파…….”
제대로 된 끼니를 먹어 본 게 언제였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숨겨져 있으리란 믿음으로 숲속을 떠돈 지 어느덧 열흘.
오늘도 희망의 끈을 억지로 부여잡고 새하얀 눈밭을 헤집고 다녔지만, 간절히 바란 생존 물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다 찾았는데 나만 못 찾은 건가? 내가 운이 없는 거야?’
정말 이 숲에 생존을 위한 물건이 있기는 한 거야?
그런 생각이 연이어 들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꼬르륵륵- .
계속해서 밥을 달라 재촉하는 소리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이 씨, 무슨 이딴 숲이 다 있어?!”
정말로 기괴한 숲이었다.
자고로 숲이란 그 안에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 법.
풀이 있다면 이를 먹는 곤충, 혹은 초식 동물.
그리고 그런 곤충과 초식 동물을 먹는 상위 포식자까지 존재하는 게 정상이었다.
한데, 이 기괴한 숲에는 네발 달린 짐승이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짐승의 씨를 말려 버린 것처럼.
‘사슴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사슴은 고사하고 토끼 한 마리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뀌헥- 뀌헥-.
기괴한 소리를 흘리는 저 괴상한 새들뿐.
뀌에에에엑-.
마치 돼지 멱 따는 듯한 새 울음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소녀는 옆에 있는 돌을 움켜쥐었다가 내려놓았다.
‘…됐다. 괜히 기운 빼지 말자.’
저 재수 없게 우는 새라도 잡아먹기 위해 던진 돌이 몇 개던가.
그때마다 새는 소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돌팔매질을 피해 높디높은 하늘로 날아오를 뿐이었다.
설사 잡을 수 있다고 해도, 불조차 피우지 못하는데 구워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꼬르르르륵-.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울리는 공복음에 소녀는 자신이 기댄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눈 쌓인 나뭇가지가 마치 새하얀 생크림이 내려앉은 과자처럼 보였다.
이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거라도 먹을까?”
갈증은 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추운 겨울, 유일하게 씹어 삼킬 수 있는 것은 침엽수의 나뭇잎 정도.
스스로 내뱉은 말에 소녀가 파르르 고개를 털어 냈다.
‘아, 아냐!’
자신이 누구던가.
위대한 명문, 블랑 가문의 자랑스러운 차기 가주, 넬리 블랑이었다.
또한, 가문의 요리사들이 두려워 마지않은 자타 공인 최고의 미식가였지 않은가.
그런 자신이 고작 이런 배고픔도 참지 못해 저딴 나뭇잎으로 배를 채울 생각을 했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하아아…….”
넬리의 긴 한숨 속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당하게 은룡패를 받아 요람의 시험에 합격했던 순간의 기쁨.
가문을 떠나 요람으로 향할 때의 설렘.
드디어 그 유명한 흑선에 올라 자신의 경쟁자를 보았을 때의 긴장.
경쟁자를 꺾고 요람의 정상에 우뚝 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순간의 희열.
마침내 마주한 현실에서 오는 좌절.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히는 배고픔의 고통.
순간 그녀는 잠시 떠올렸다.
‘…포기하면 편하겠지?’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그녀는 고개를 털며 정색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고작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포기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그것도 고작 열흘을 굶었다고?
“큭!”
넬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이 정도 시련에 포기할 정도로 자신은 나약하지 않았다.
아직은 충분히 버틸 만했다.
마나와 체력이 바닥나기 전까지 생존을 위한 물건, 혹은 다른 먹을 거라도 찾으면 되는 거다.
아직 희망은 차고 넘쳤다.
“움직이자.”
저벅 저벅-.
한 명문가의 아가씨가 눈을 밟으며 내는 소리 속에.
꽈로로로록-.
배고픔을 알리는 우렁찬 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비단 넬리 블랑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넬리 블랑을 비롯한 몇몇은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에 속했다.
503명의 예비 기수 중 98%에 해당하는 곱게 자란 도련님과 아가씨들.
그들은 혹한의 환경 속에서 고통받으며 나날이 정신력이 깎여 나가는 중이었다.
다만, 도련님과 아가씨의 고고하고 드높은 자존심이 겨우겨우 이성을 유지케 할 뿐.
그리고 그렇게 버티고 또 버틸수록 그들은 점차 거지꼴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마치 유리가 처음 흑선에 올랐을 당시, 그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거지 같은 모습처럼 말이다.
* * *
성문 인근에 자리한 공터.
일명 ‘버러지의 갈등’이라 불리는 종 옆에서 애꾸눈의 사내가 물었다.
“아직 한 명도 낙오되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50기는 제법 버티는군.”
이전 기수에서, 의지박약한 어떤 버러지는 고작 사흘 만에 종을 치고 돌아간 적도 있었다.
열흘 동안 단 한 명도 낙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제법’이라 칭할 정도는 되는 일이었다.
다만…….
“이러면 재미가 없지.”
애꾸눈 사내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아무리 마나를 품었다고 하여도 그들은 아직 미숙한 소년·소녀.
그런 이들에게 열흘 정도면 슬슬 한계가 올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여태껏 낙오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건 오기로 버티고 있다는 소리겠지.’
낙오될 땐 되더라도 가장 처음 낙오되는 쓰레기가 될 수는 없다는 하찮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선례를 만들어 주면 어찌 될까?”
씨익 웃은 사내가 종에 달린 줄을 강하게 잡고 흔들었다.
땡- 땡- 땡- 땡-.
크게 울리는 거대한 종소리가 숲속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자, 처음으로 낙오자가 나왔다. 이제 어찌할 거냐?’
아마 종소리를 들은 이들은 고민할 것이다.
이 고통을 더 참고 인내할까?
아니면 그냥 포기해?
과연 앞으로 내가 20일을 더 버틸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대체 무슨 낯으로 가족들을 만나지?
다른 사람도 포기했는데, 나도 포기할 수 있는 거잖아?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등등.
예비 기수들은 미칠 듯 고민하고 갈등하며 정신적으로 더욱더 고통받을 것이다.
그렇게 종소리는 숲속에 메아리치며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고.
땡- 땡-.
유리의 귀에까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