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8
37화. 혹한기 생존 (3)
땡땡땡-.
멀리서 들려온 종소리가 사라지기 무섭게 새하얀 눈밭에서 까만 머리통 하나가 빼꼼히 올라왔다.
“응?”
미어캣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유리.
그의 눈이 약간의 흥미로 반짝였다.
‘첫 낙오자가 나왔나 보네.’
고작 열흘 만에 포기하다니.
대체 어떤 병신인지 얼굴이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니, 열흘이면 많이 버틴 건가?’
지난 열흘간 자신이 본 게 예비 기수들의 평균이라면 열흘도 많이 버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얕은 감상도 잠시.
그는 다시 눈 속으로 상체를 숙이고 원래 하던 일에 집중했다.
슥- 탁- 슥- 탁-.
유리의 검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꽁꽁 언 땅이 숨풍숨풍 파여 나갔다.
삽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작업 속도.
도저히 손가락 두 마디 굵기의 검으로 땅을 파내는 속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땅을 파던 유리는 잠시 허리를 폈다.
그는 애검을 황홀하다는 듯 응시했다.
“캬! 역시 우리 흰둥이! 이 하나 안 나간 거 봐라!”
어디 이가 안 나간 것뿐이랴.
지난 열흘간 흰둥이로 판 구덩이만 족히 수십 개가 넘어간다.
온갖 흙, 나무뿌리, 자갈 속을 파헤쳤음에도 백강철검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래서 다들 백강철검, 백강철검 하는 거였구나!’
조금 이상한 방법으로 백강철검의 성능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유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좋은 게 좋다는 거 아니겠어?
“흐흥~.”
유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금 흰둥이를 땅에 쑤셔 넣었다.
슥- 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땅파기를 멈춘 그가 구덩이 속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렸다.
후드득-.
유리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흙이 덕지덕지 묻은 나무뿌리였다.
“오! 이번 건 제법 씨알이 굵네?”
유리가 캐낸 것은 그냥 나무뿌리가 아닌 ‘토사바’란 뿌리채소였다.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에 구황작물로 길러지는 토사바.
다만 야생의 토사바는 찾는 방법을 모른다면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리는 달랐다.
‘코찔찔이 시절, 토사바 하나 캐 먹겠다고 내가 판 구덩이만 수천 개다!’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어지간한 토끼보다 자신이 더 구덩이를 많이 팠을 거다.
이제는 가볍게 훑어만 봐도 ‘아 저길 파면 대충 어느 정도 크기의 토사바가 나오겠구나!’라고 견적이 나올 정도.
이쯤이면 토사바의 달인이라 부를 만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유리는 눈 덮인 숲을 헤집고 다니며 파는 족족 토사바를 건져 올렸다.
“흐흥~.”
유리는 흥겨운 얼굴로 토사바를 캐 냈다.
그 뒤로도 유리의 손에 토사바 뿌리가 줄기줄기 딸려 나왔다.
턱-.
“흐음…….”
그렇게 잠시간의 노동이 있고 난 뒤.
마지막 토사바를 캐낸 유리는 제 허리만큼 쌓인 토사바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너무 많은데?”
아무래도 너무 흥을 낸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토사바만 먹고도 며칠은 버틸 양.
하지만 그렇다고 캔 걸 버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유리는 다시금 코찔찔이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운 좋게 구한 토끼 한 마리를 싹싹 발라 먹고, 그 뒤로 식량을 못 구해서… 먹고 남은 토끼 뼈로 국물을 우려내 닷새 동안 버텼었지.’
토끼 뼈를 닷새 동안 우려먹으면 사실상 그냥 맹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끔찍한 맛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떤 유리는 잠시나마 눈앞의 토사바가 많다고 느낀 자신을 책망했다.
‘많기는 개뿔! 쟁여 놓으면 언젠가는 쓸 날이 오겠지!’
유리는 웃옷을 벗어 토사바를 쓸어 담았다.
아주 작은 뿌리 하나 놓치지 않고 몽땅 챙긴 유리.
“흐흥~.”
살짝 콧노래를 부른 그가 운보를 사용해 인근의 두 나무를 번갈아 박찼다.
순식간에 유리의 신형이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고.
드득- 탓!
나뭇가지가 살짝 휘는 탄성을 이용해 유리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로 인해 나무에 쌓인 눈이 가루처럼 흩날렸으나 사방에 널린 눈 위로 자연스레 섞여들었다.
그렇게 나무에서 나무를 넘어, 유리는 신속하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 * *
3시간이 흐른 뒤.
유리가 토사바를 캤던 곳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의 이름은 클라리스 반.
그는 빠른 걸음으로 눈길을 헤쳐 나갔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토해 낸 클라리스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분명 있을 거다.’
클라리스 반, 그는 503명의 예비 기수 중 ‘진짜 명문’이라 칭할 수 있는 가문의 자제였다.
반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난 그는 한 가지 이념을 교육받으며 자랐다.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한 자는 가문을 이끌 자격이 없다.]가문 대대로 후계자에게 전해지는 초대 가주의 이념.
반 가문이 이 같은 이념을 후대에 전하는 건 가문의 역사와 연관되어 있었다.
약 150여 년 전.
현재는 타불 행정구로 분류된 남쪽 지역은 냉대 기후의 영향으로 매우 척박한 땅이었고, 반 가문은 그 땅의 서쪽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척박한 땅에 찾아든 지독한 가뭄.
굶주림에 고통받는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반’이란 성을 지닌 청년.
홀로 동분서주하는 젊은 영웅의 헌신에 반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곧 하나의 세력으로 변했다.
그것이 바로 반 가문의 시초였다.
세월이 흘러 반 가문의 영역은 가난을 벗어났지만, 후손들은 과거를 잊지 않고자 한 가지 전통을 만들어 냈다.
바로 가문의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숲에서 100일간 생활할 것.
비록 어른들의 도움이 있다고는 하나 어린아이들이 추운 숲에서 지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전통을 통해 반 가문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당연하게 누려 왔던 가문의 보호가 얼마나 귀중한지 깨닫게 된다.
또한,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며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어른들에게 배웠다.
사냥하는 법, 식용이 가능한 식물을 구분해 내는 법 등등.
반 가문의 아이들은 약식이나마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 나간 것이다.
‘그땐 정말 너무 힘들었었는데…….’
한데 그 지식이 이리 요긴하게 쓰이는 날이 오다니.
흑검병이 낸 시험 주제가 생존인 것을 깨달은 순간 클라리스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이후 클라리스는 어린 시절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예비 기수들과는 달리 제법 여유롭게 혹한기 생존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만약 흑검병들이 생존 시험을 지켜보며 점수를 매기고 있다면 자신이 분명 1등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클라리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며칠 전까지는 말이다.
후욱- 후욱-.
“이번에는 제발…….”
허벅지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며 나아가던 클라리스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이 살짝 커졌다.
“찾았다!”
클라리스의 걸음걸이가 대번 빨라졌다.
그가 직선으로 나아가는 곳에 자리한 것은 검붉은 잎을 가진 침엽수였다.
검붉은 잎을 가진 나무.
이는 토사바로 인해 성질이 변한 토양에서 자라난 나무가 갖는 특징이었다.
‘확실해! 잎이 저렇게 짙게 물들 정도면 인근에 토사바 군락지가 있다는 거다!’
살짝 흥분한 클라리스가 검붉은 침엽수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서, 설마?!’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클라리스의 입에서 탄식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또… 또냐…….”
여기저기가 파헤쳐진 땅.
누가 봐도 토사바를 캐 낸 흔적을 본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떨림은 이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부들부들-.
그것은 추위가 아닌 분노로 인한 떨림이었다.
“대체… 어떤 새끼야!”
클라리스는 며칠 전부터 토사바를 찾아 움직였다.
이런 환경의 숲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작물이 바로 토사바였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어떻게 토사바를 찾아야 하는지 나름대로 경험이 있던 클라리스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제법 손쉽게 토사바 군락지를 찾아내기까지 했었다.
다만.
‘나 말고도 토사바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고?’
클라리스보다 먼저 토사바를 캐 간 누군가가 있었다.
첫 실패에도 클라리스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숲은 넓으니 얼마든지 다른 토사바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흘이 흘렀다.
지난 4일, 그동안 클라리스가 찾은 토사바 군락지는 모두 열 곳.
한데, 그 모든 곳에서 클라리스보다 먼저 토사바를 털어 간 누군가가 있었다.
그것도 잔뿌리 하나 없이 싹싹!
며칠간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클라리스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다.
‘토사바를 캔 흔적은 있지만, 들어오고 나간 흔적은 일절 없다!’
그제야 클라리스는 토사바를 싹싹 털어 간 게 동일인의 소행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한 11번째 토사바 군락지도 역시나 같은 놈에게 싹싹 털린 뒤였다.
쉭쉭-.
거칠게 콧김을 내뿜는 클라리스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결국 토해 내고 말았다.
“야 이 양심 없는 새끼야! 적당히 해 처먹으란 말야! 토사바 장사라도 할 셈이냐!”
지난 며칠간 그 양심 없는 새끼가 털어 간 토사바 군락지는 모두 열한 곳.
그렇게 모은 토사바의 양이라면 한 사람이 한 달이 아니라 겨우내 먹고 내년 겨울까지 날 수 있을 정도였다.
“으아아악!”
클라리스의 분노 가득한 외침에 인근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와르르 쏟아졌다.
하지만 클라리스는 몰랐다.
자신이 욕한 ‘그 양심 없는 새끼’가 싹싹 털고 있는 게 단지 토사바뿐이 아니란 것을.
유리의 거지 근성과 양심 없는 탐욕에 시작의 숲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라리스의 분노 가득한 고성이 쩌렁쩌렁 울린 그 시각.
스스슥-.
수백 명의 흑검병이 시작의 숲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숲 외곽의 어느 지하 동굴.
교묘하게 가려진 입구를 지나, 좁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그 끝에 성인 남성 열댓 명이 동시에 누워도 될 정도의 공동이 나타났다.
이는 유리가 찾아낸 최고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타닥타닥-.
동굴 중앙에 타오르는 모닥불.
그리고 주변에 자리한 유리와 그 옆에 수북이 쌓인 뼛조각.
우물우물-.
유리는 들고 있던 고기의 마지막 남은 살점을 뜯어 삼키고 앙상하게 남은 뼈를 휙- 던졌다.
탓!
수북하게 쌓인 뼈 무덤에 뼛조각 하나가 추가된 순간 유리가 시원하게 트림을 발사했다.
거어어어억!
이후 대(大)자로 드러누운 유리가 볼록 튀어나온 배를 통통 두들겼다.
“하… 좋다.”
포만감 뒤에 따라오는 나른한 감각.
거기에 더해진 모닥불의 따듯한 온기는 한겨울 누릴 수 있는 극상의 사치였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 이것이야말로 참 행복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행복에 겨워 히죽 웃는 유리의 얼굴은 처음 숲에 도착했을 때보다 살이 올라 반질반질 빛을 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예비 기수들이 거지꼴로 변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변화.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원인은 유리의 뒤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족히 수백 명은 먹을 수 있을 듯 수북이 쌓여 있는 토사바.
훈제 처리된 조류 고기.
약초, 혹은 향신료로 짐작되는 이름 모를 각종 풀과 나무뿌리.
보기만 해도 달달함이 느껴지는 띤 석청과 목청.
잘게 쪼개져 건조되고 있는 땔감 등.
도무지 한겨울에, 그것도 고작 열흘 동안 모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비축량.
전부 유리의 탐욕과 거지 근성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뒹굴거리던 유리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꺼져 가는 모닥불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흠… 시험치고는 너무 쉽단 말이지.”
물론 쉽다는 건 지극히 유리의 주관적인 입장에서였다.
나날이 심해지는 혹한의 날씨.
숲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린 네발 달린 짐승.
심지어 냇가에는 그 흔한 물고기마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요람에서 식량 자원을 제한하려고 일부러 조성한 환경일 터.
그런 상황에서 이 생존을 ‘쉽다’라고 가볍게 말할 존재는 어쩌면 유리뿐일지도 몰랐다.
물론 유리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열흘 동안 종횡무진 숲을 돌아다니며 정말 별별 꼴을 다 보았으니까.
불도 못 피워 덜덜 떨며 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등신.
새를 잡아 보겠다고 미친 듯이 돌을 던지는 멍청이.
멀쩡한 계곡을 옆에 두고 눈을 퍼먹어 두통에 몸부림치는 바보.
이파리를 따 먹겠다고 별 높지도 않은 나무를 오르려 낑낑거리는 모지리.
‘세상은 넓고, 그만큼 병신도 많다더니…….’
여기가 그 병신들의 집합소인가?
어찌 눈에 띄는 것들마다 하나씩 나사가 풀린 거 같지?
나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것들이 어찌 저럴까?
물론 나름 잘하는 녀석들이 종종 보이기는 했지만, 열 중 아홉은 하나같이 덜떨어진 것들뿐이었다.
‘이런 것들을 견제하겠다고 빨빨대고 움직인 게… 창피할 지경이네.’
지난 열흘간 본 온갖 멍청이들 덕분에 유리는 본인이 시험을 얼마나 쉽게 치르고 있는 건지 깨닫게 되었다.
또한 다른 예비 기수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시험을 치르고 있는지도 말이다.
때문에 유리가 생존 시험이 쉽다고 말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으니까.
다만 여기서 유리가 말한 ‘쉽다’의 의미는 체감된 시험의 난이도뿐만이 아니었다.
시험의 방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단순히 한 달간 생존만 하면 시험이 끝나는 걸까?’
정말 이렇게 단순하고 쉬운 방식으로 시험이 치러진다고?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그게 뭐지?’
며칠 전부터 생겨난 의문과 알 수 없는 찝찝함에 유리는 그 원인을 찾고자 고민했다.
그리 고민을 이어 나가던 순간.
“……?!”
유리는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고 번개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저벅저벅-.
작은 발소리가 들려오는 동굴의 통로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