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292
에필로그
태양빛이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푸르른 하늘로부터 내리쬔 햇볕은 파도에 하얗게 부서져 쏴아아아 하는 소릴 냈다. 해변에 펼쳐진 하얀 모래는 지나치게 뜨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쾌하게 차갑지도 않아서 이불 대신 덮고 있기 딱 좋았다.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이 정도 소음이야 뭐 내 새끼 소리라 생각하면 감히 듣기 싫다 말할 수야 없다.
“아빠! 일어나!!”
그때, 아이 중 하나가 내게 외쳤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다른 아이들도 내 귓가에 달려와 경쟁적으로 왁왁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지겠지만 그냥 해야겠다. 누구에게든 한 번쯤은 말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니 말이다.
***
나, 이진혁은 마라 파피야스를 죽였다.
분신 중 하나가 아니라 이번에야말로 본체를 죽였다. 아니, 사실 모든 마라 파피야스의 분신이 다 본체니 마지막 하나를 죽였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구니들이 마지막 보험으로 숨겨둔 2번 분신까지 처치했으니, 이로써 우리 세계의 마라 파피야스는 완전히 그 명맥이 끊겼다.
악의 근원이자 근본을 끊어낸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카르마가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 포지티브 카르마의 축적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 한계돌파!
– 포지티브 카르마의 축적은 한계돌파 할 수 없습니다.
– 여분의 카르마를 소모해 주시기 바랍니다.
– 카르마 마켓으로 강제 이동합니다.
이미 한번 봤었던 메시지가 쭉 이어졌다. 이번에는 별로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카르마 마켓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제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오랜만이로군요.”
“네,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웃으며 제우스의 말을 받았다.
“기어코 마라 파피야스를 완전히 소멸시키셨군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 역시 알고 계셨군요?”
내가 지난번에 죽였던 마라 파피야스가 마지막 마라가 아님을 제우스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제가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순 없었습니다만.”
하긴, 이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이쪽 일을 마무리하고 상위 세계에 도약할까 생각합니다만.”
“아, 드디어.”
“네, 드디어죠.”
제우스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자, 그건 그렇고 저는 할 일을 해야죠. 카탈로그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우스는 밝은 미소와 함께 카탈로그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좋은가······. 이번만큼은 나도 마주 보며 웃진 못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예?”
상품 설명을 듣다가 조금 지겨워진 나머지, 나는 잡담을 꺼내 들었다.
“창조자라는 직업을 얻었습니다.”
그냥 아무 이야기나 상관없었다. 상품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꺼낸 화제였는데, 제우스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무려 손에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떨어뜨린 것이 그것이었다.
“······예?”
이렇게 되묻기까지 하다니, 꽤나 이례적인 반응이다.
“지금 창조자라고 하셨습니까?”
“어······, 네.”
“전직 퀘스트가 아니라 직업을 얻으셨다고요?”
“어느 쪽이냐고 물으신다면 둘 다긴 합니다.”
나는 전직 퀘스트를 받자마자 조건을 만족하고 직업을 얻었지만, 레벨을 올리는 데에 꽤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제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문득 내게 이렇게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카르마를 조금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카르마를요? 아, 설마······.”
“네, 상위 세계에 대한 것을 발설하려면 카르마가 필요합니다.”
갑자기 왜 상위 세계가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상위 세계에 가면 다 초기화될 신격에 소지품들이다. 카탈로그에서 뭘 골라 사는 것보다 머리에 남는 정보를 얻는 게 훨씬 이득이다.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제우스에게 카르마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그 카르마를 받자마자, 제우스는 대뜸 이런 말부터 꺼냈다.
“상위 세계에 가실 필요가 없어지셨군요.”
처음 카르마 마켓에 들어왔을 때나 카탈로그의 상품 설명을 하고 있을 때와 달리, 제우스의 표정은 지극히 굳어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어떤 떨떠름함에 가까웠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질투심?
“정말 부럽습니다, 고객님.”
“아니, 카르마는 받아놓고 갑자기 무슨 말씀이에요?”
내 항의에도 제우스는 이렇게 되물을 뿐이었다.
“고객님께서는 왜 불멸자들이 결국 상위 세계에 가고 마는지 잊으셨습니까?”
심지어 그는 답답해하고 있었다. 아니, 뭘 알려주고 답답해하지. 나도 답답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입 다물고 있는다고 뭘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그냥 질문에나 대답했다.
“기존의 세계에서 더 이룰 것이 없고 그저 안온히 이어지기만 하는 삶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직 그것만으로 불멸자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밑바닥으로 돌아가는 걸까요?”
밑바닥? 하긴 그렇다. 레벨도 능력도 초기화되고 소지품도 빼앗긴다는데, 따지고 보자면 밑바닥으로 돌아가는 게 맞긴 하다.
“상당수의 불멸자들이 무한히 이어지는 삶의 무료를 참지 못하고 하던 거 안 하던 거 다 해보다가 결국 보조직업에 손대고, 그러다 창조자의 전직 조건을 알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상태로는 창조자로 전직할 수 없음을 알아내게 되지요.”
“어, 왜······.”
“창조자의 전직 조건을 기억하십니까? 보조직업 50개의 최고 레벨을 달성하라고 나와 있을 겁니다만. 그런데 하나의 직업에 한계레벨에 도달해도, 최고 레벨을 달성한다는 조건은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최고 레벨은 한계레벨 위에 따로 있다는 뜻이지요.”
그건 몰랐다. 나는 한계돌파로 당연히 50레벨을 찍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계레벨에 걸려 거기까지 닿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때 불멸자들은 한계레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위 세계로의 도약을 결심하게 됩니다. 창조자가 되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서 말이지요.”
“어······.”
“상위 세계도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고 계십니까? 상위 세계라는 발판을 딛고 올라서는 곳이 바로 자기만의 세계입니다. 말씀드리자면, 결국 상위 세계는 창조자라는 직업을 가지기 위한 세계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는 울고 있었다.
“부럽습니다, 고객님. 저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저는 아직 상위 세계로의 도약도 마치지 못했는데, 고객님께서는 이미 먼저 제 목표에 도달해계셨군요. 후배라고······, 생각했었는데······.”
“후배는 맞죠.”
내 대답에 제우스가 날 째려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불편해졌기 때문에, 나는 대충 살 것만 사고 카르마 마켓을 빠져나오기로 했다.
“다시 들러주십시오. 창조자용 자재도 팔고 있으니, 언제든 환영합니다.”
내가 나올 때쯤, 제우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는 프로다. 나는 그의 프로 의식에 경탄을 보냈다.
“그러죠.”
그래서 나는 결코 그의 연기를 간파했다는 사실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
나는 카르마 마켓에서 나오자마자 상태창을 켜 내 직업란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창조자 레벨은 20이 되어 있었다. 지구에서의 [인류를 문명으로 이끌어라!]는 수련치를 만족시킴으로써 레벨 업을 달성한 모양이다.
그리고 직업 스킬로 [세계창조]라는 게 생겨 있었다.
“이게 그거로군.”
불멸자들의 최종 목적.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가진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스킬이 바로 이것일 터였다.
“그럼 바로 써볼까?”
길게 끌 것도 없이 나는 즉시 스킬을 써봤다. 그러자 대량의 신성이 빠져나가면서 작은 먹구름 같은 게 내 손아귀 안에 생겨났다.
[태초의 세계]“이게······, [세계]라고?”
나는 어리둥절했으나, 곧 깨달았다. 이 [세계]에 계속해서 [세계창조]를 걸어가며 신성을 갈아 넣다 보면 내가 아는 형식의 세계가 만들어질 거란 걸.
“처음에는 단칸방이구만.”
아니, 그냥 먼지 한 덩어리 정도니 단칸방이라는 표현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신성을 좀 모아야겠어.”
모여 있는 신성이 꽤 많긴 했지만, 이 [태초의 세계]를 진짜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가진 신성으론 턱도 없었다. 그만큼 [세계창조]에 드는 신성이 많았다.
“그건 그렇고······, 내가 꽤 오래 자리를 비우긴 한 모양이로군.”
상태창을 봤더니 이진혁교는 언제부턴가 쇠하기 시작한 상태였고, 들어오는 신성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제 마라도 다 죽여서 카르마 들어올 곳도 없으니 신성을 모으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얘들아! 내가 돌아간다!!”
이진혁의 귀환이다!
***
이진혁의 귀환을 예상할 수 있었던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진혁의 탐색을 중도 포기한 이들은 물론, 그토록 이진혁을 찾아 헤매던 자들에게조차 이진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돌아왔다고 선언하는 일은 예측조차 불허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이벤트는 다소 당혹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왔다!”
문자 그대로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목소리로 그러한 선언을 들은 블루 마블의 이진혁교 교인들은 기쁨이나 환희보다 먼저 다른 감정을 느꼈다.
3대 교구 중 가장 먼저 이진혁의 탐색을 포기한 블루 마블 교구 교인들은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진혁이 귀환을 선언한 지금, 그 좌절과 수치심은 모조리 공포로 치환되었다.
특히나 그들의 수장인 비토리야나와 루시피아나의 반응이 격렬했다.
“도, 도망가야 돼!”
비토리야나는 악마였던 때처럼, 루시피아나는 타천사였을 때처럼 강렬한 빛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 들었다. 자신들이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도 모른 채 차라리 본능에 가깝게 도주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게 될 리가 없다.
“루시피아나! 비토리야나!!”
루시피아나는 자신의 주인이 자신 먼저 불렀다는 희열을 느낄 새도 없이 붙잡혀 갔다. 비토리야나는 자신의 이름이 늦게 불렸다는 것에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으나 그녀도 곧 붙들렸다.
강제로 소환되자마자 보이는 번쩍거리는 신성한 빛에, 비토리야나와 루시피아나는 일단 무릎부터 꿇고 봤다!
“용서를!”
“죄송합니다!!”
바닥에 머리부터 박고 보는 그들 둘의 반응에, 이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
“하하하, 내가 상위 세계로 간 줄 알았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비토리야나와 루시피엘라는 완전히 공포와 당혹감에 휩싸여 두서없는 변명과 앞뒤 없는 읊조림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파편적인 정보를 조합하여 간신히 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용서고 자시고,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운 건 사실이니까.”
“아, 아앗······!”
내 용서를 받자 안도한 건지 비토리야나가 먼저 펑펑 울기 시작했고 루시피엘라가 그 뒤를 곧 따랐다. 내가 등을 두드려 주자 한결 더 서럽게 우는데 좀처럼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소식을 듣고 온 블루 마블의 교인들이 나와 두 공동 주교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비토리야나와 루시피엘라는 내 품에서 사흘 밤낮을 연속으로 울어제쳤다.
체력이 좋다 보니 울다 지쳐 잠들지도 않는다. 이러다 잘못하면 한 달 내내 울고 있는 것 아닐까? 내가 그런 걱정을 하기 시작할 무렵, 포탈이 열리더니 내가 아는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이진혁 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오.”
나는 아는 얼굴의 등장에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 내가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상대들, 그러니까 케이와 테스카는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어째서······, 어디 계셨던 겁니까······.”
“아, 아아아······.”
또 이거냐.
내 예상대로 케이와 테스카도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 비토리야나와 루시피엘라의 울음소리도 다시 커졌고, 날 둘러싼 블루 마블 신도들의 울음소리도 합창이라도 하듯 울려 퍼졌다.
나는 좀 참아보려고 했지만, 내 인내심은 곧 바닥났다.
“그만! 그만 울어!!”
나의 신성을 담은 외침에, 주변을 가득 메우던 울음소리는 단번에 그치······ 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 차례의 훌쩍임이 이어지긴 했지만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 이들도 노력은 했다. 나는 노력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이 자리에 다 모이지는 않은 것 같군. 키르드는 어디 갔냐? 늙어 죽었나?”
“아, 그건······.”
케이와 테스카, 그리고 비토리야나와 루시피엘라는 서로를 바라보며 대답을 망설이다가, 케이가 가장 먼저 용기를 내 내게 말했다.
“아직 주를 찾고 있습니다. 저희와 달리······.”
“응? 뭐? 아직 살아 있다고? 놀랍군. 신격에라도 오른 거야?”
키르드라면 늙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흘렀으리라고 생각했기에,
“아, 예. 이진혁교의 가장 큰 교구인 인류연맹 교구의 주교를 맡은 덕인지 잡신의 격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 그래? 하핫. 그렇군. 그럼 얼굴 좀 봐야겠어.”
나는 곧장 상태창을 열고 키르드를 소환했다. 내 앞에 슉 하고 나타난 키르드는 어리둥절해하다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그래, 나다. 너는······, 조금 늙었군. 나보다 나이 들어 보여.”
“아버지께선 아직 정정하십니다! 하하하!!”
키르드는 기쁘게 웃었다. 나는 그를 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디 있다 왔냐?”
“혹시 지구에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가보던 중입니다.”
“허, 그래?”
날카롭기도 하지. 실제로 난 어제까지 지구에 있던 참이었다. 지구가 내게 알려주기까지 나 자신조차 내가 이진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기는 했지만, 아무튼 키르드의 추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때가 되면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제가 괜한 짓을 했군요.”
그렇긴 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말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다.
“휴가는 잘 보내셨습니까? 이제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그래.”
키르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위 세계에 갈 이유가 사라졌으니, 내가 내 사람들을 떠날 이유도 사라진 셈이다.
“간만에 돌아왔으니, 밥이나 먹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
돌아온 나는 떠나기 전보다 더욱 정력적으로 일했다. 여기서 말하는 일이라는 건 물론 이진혁교의 중흥이었다.
내가 떠남으로써 하락세로 들어섰던 이진혁교는 내 귀환과 더불어 전보다 더욱 그 교세를 크게 부풀렸다. 원래 이진혁교가 주류라고는 할 수 없었던 유일 교단과 만신전, 그리고 천계에까지 가차 없이 포교했으니 세가 안 불어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신앙, 즉 신성은 모두 [세계창조]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보니 내 손바닥 위에 올라와 앉을 정도로 작았던 [태초의 세계]는 어느새 작은 왕국 수준으로 커져 있었다.
물론 규모로 따지면 그렇다는 이야기고, 세계의 구성 상태는 혼돈으로 뒤섞인 엉망진창인 상태라 세계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걸 빛과 어둠으로 나누고 뭍과 물로 나누고 물리법칙을 구현하는 등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리고 이 작업에는 대량의 신성이 소모되었으니,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멸망했던 지구를 다시 재생시켜 인류를 번성시키고 문명까지 이끄는 작업을 이미 한번 하긴 했지만, 아예 세계를 제로부터 창조해 나가는 작업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지구는 그나마 지구였던 적이 있으니 지구 자신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 있었지만 태초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조치하고 해결해야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지구에서의 경험은 초등학생인 양자를 들여 키우는 일이었다면 태초 세계의 경우는 자신에게 팔다리가 달려 있는 것조차 생소하게 여기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질리는 일 없이 계속해서 작업에 몰두했다. 명확하게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건 이토록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왜 불멸자들의 최종 목표가 나만의 세계를 갖는 건지 이제야 알겠군.”
할 일이 많은 만큼 피곤하긴 했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
“됐······, 다!”
비록 환경도 독창성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어서 지구의 마이너 카피 같은 느낌이고, 규모 자체도 행성 하나가 겨우 돌아갈 정도라 태양을 넣고 자체적인 자전과 공전으로 낮밤을 구현하지도 못해서 인위적으로 빛을 쏴줘야 하는 데다 그것도 내가 껐다 켰다 해줘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그나마 나만의 작은 세계를 하나 꾸며내긴 했다.
그렇게 해서 구현해 낸 작은 해변에 혼자 누워 있다가 뙤약볕이 너무 세서 빛을 조절하고 있으려니 만족은커녕 괜한 분기만 더 치솟았다.
언젠간 내가 의식적으로 조절 안 해도 혼자 잘 돌아가는 세계 하나를 만들어내고 말리라. 마치 지구처럼······.
“아니지!”
나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래 봐야 지구 복제판밖에 더 만들겠어?”
지난 세월 동안, 그러니까 지구에 있던 시절을 제하고 그 전에는 50개에 달하는 보조직업을 만렙 찍고 다니던 나다. 보통 그 정도 하고 나면 설령 그 전까진 안 그랬더라도 예술가적인 감성, 혹은 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게 발동했다.
“내가 지구 복제를 만든다고? 이 내가?”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모방이야말로 창조의 어머니라는 문장은 잘 만든 표어다. 진리이기도 했고. 그러나 이걸 거꾸로 잡으면, 모방이 만들어내는 건 창조의 어머니가 낳은 애밖에 안 된다.
사람은 성장해야 한다!
처음 만든 세계치고는 잘 만들었다는 평가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나만의 세계였다.
“지구 복제를 만들 거면 차라리 그냥 지구에서 살고 말지!”
그러나 이상이 아무리 드높아도 현실은 냉혹하다. 지금 상태론 죽도 밥도 안 된다는 현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했다.
문제의 인식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첫걸음인 법. 나는 그 첫걸음을 떼었다.
그럼 다음 걸음을 걸어야지. 그다음 걸음이란?
물론 답을 내는 것이다.
“이거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되겠군.”
나는 혼자서 답을 내기는 힘들다는 답에 도달했다.
“혼자서 못 한다면 여럿이서 하면 되지!”
브레인스토밍이 필요했다.
브레인스토밍을 한다고는 해도 아무나 받을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인재는 창조자 직업을 가진 사람에 한한다.
즉, 나다.
나뿐이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통틀어 창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건 오직 나 단 하나뿐이다.
혼자서 무슨 브레인스토밍을 한단 말이냐!
이런 의문이 떠오를 만도 하지만 문제없다.
“내가 많으면 되니까.”
수많은 나를 동원하면 된다.
당연하지만 단순한 분신으로는 안 된다. 분신을 꺼내봤자 나랑 똑같은 생각밖에 더 하겠는가. 게다가 동기화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니, 수많은 나들은 그냥 나일뿐이다.
그러니 모든 내가 각기 다른 인격을 지니고,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의견을 꺼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지구에서처럼 하면 된다.
이미 나는 이 방법을 통해서 지구의 문명을 개화시킨 적이 있다.
비록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나, 여러 내가 빚어내는 화학반응의 순기능을 확신하기에는 충분한 결과물을 내놓았다고 자평하고 있었다.
지구 때에는 각각의 내게 각기 다른 개성을 주기 위해 일부러 기억과 능력을 제한했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지구 시절에 확립했던 인격들이 남아 있으므로, 이번에는 그 인격들을 재활용하는 것만으로 여러 나를 구현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나는 스킬을 시전했다.
***
결과는 성공이었다.
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수만 명의 나를 생성했다. 그 직후 이뤄진 나들의 대회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이제는 회의 결과를 [세계창조]에 반영하면 되겠다.
“다음 회의는 1년 후에 개최하겠습니다.”
아이디어는 떠올랐고 계획 또한 짜였으니 이제 남은 일은 [세계창조]에 필요한 신앙을 모으는 것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수만 명의 나는 다시 하나의 나로 합쳐지는 것보다는 각자 활동으로 신앙을 모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나들은 한 가지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일부러 무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수만 분의 1로 나눠져 격이 떨어져 신보다는 인격에 가까워진 나는 마치 지구에서처럼 인간으로서의 욕구에 눈을 떴다.
식욕? 그건 평소에도 갖고 있다. 물론 생존을 위해 배를 채운다기보다는 맛있는 걸 맛보고자 하는 쪽에 가깝지만. 수면욕? 나는 잘 필요가 없다. 가끔 자고 싶은 기분이 들면 자고는 하지만 자기 싫으면 안 자도 된다. 이건 분할한 나도 마찬가지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게 성욕인데, 성욕도 그다지 강하지는 않다. 이미 불멸자가 되어서 그런지 번식에 대한 욕구는 커지지가 않았다.
하나씩 손가락 꼽아가며 짚어보니 새삼 내가 얼마나 인간에서 멀어진 존재인지 떠올릴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이미 거론한 3대 욕구는 인간으로서의 욕구라기보다는 생물로서의 욕구에 가깝다.
이것들 말고 인간으로서의 욕구. 그것은 바로······.
“지구에 다녀와야겠어.”
다른 내가 말했다. 저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동기화가 꺼져 있어서 바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라 파피야스처럼 누굴 몇 번째 분신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아서 각자의 이름을 각자 쓰도록 해두었다.
뭐, 굳이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아무튼 지구에서 기혼자였던 저 녀석은 지구에 놔두고 온 가족들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지구에서 쓰던 인격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미혼인 나들은 달랐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지?”
“단체 미팅?”
몇 명인가의 내가 왁자하게 웃었고, 몇몇은 짜게 식어 발언한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의 나는 심드렁한 축에 속했다.
그렇다. 인간으로서의 욕구. 그것은 가족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였다.
“그녀를 보러 가야겠어.”
다른 내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성이 있다. 이진혁으로서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이걸 내 입장에서 떠올리자니 왠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나도 그녀를 보러 가야겠어.”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물로서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고백을 하러 가야지.”
이진혁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그러나 뭐 어떤가? 나는 나일뿐인데.
“어리석은 선택이야.”
아마도 독신주의자일 터인 몇인가의 내가 나를 비웃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정해진 바였고, 행동만이 남았다.
그리고 내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
태양빛이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만의 세계, [이진혁계]를 비추는 저 태양을 만드느라 든 신앙을 생각하면 단순히 뿌듯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태양빛에 가려진 별빛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큰 공을 들인 건 아직 뜨지도 않은 달이었다.
두 개의 달을 조화롭게 움직이며 각기 다른 색의 달빛을 지상에 흩뿌리게 만들기 위해 나는 스킬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만 했다. 인류연맹이 나를 찾는답시고 발전시킨 과학기술이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애들을 보느라 기진맥진한 나는 파도소리가 부서지는 해변에 널브러져 혼자 중얼거렸다.
아무리 수만 분의 일인 나라도 명색이 이진혁 중 하나인데 이 나를 이렇게 만들다니. 애들의 체력이란 정말 무서웠다.
물론 이 아이들은 보통 애들이 아니긴 하다. 나를 비롯한 이진혁들이 힘과 지혜를 한데 모아 빚어낸 세계에서 새로 태어난 애들이다. 세계의 첫 세대니만큼 세계의 사랑과 축복을 담뿍 받는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건 둘째 치고 무엇보다 내 애들이니 평범할 리 없지. 대단한 게 당연하다.
문제는 그 대단함을 오로지 나를 조지는 데 쓰고 있다는 점이지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일상이 오늘은물론 내일도, 내일모레도, 저 아이들이 성장할 때까지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더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어, 자기?”
“으, 응?”
나는 바짝 굳어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의 끝에는 나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 안젤라의 모습이 있었다.
내가 안젤라를 처음 봤던 때로부터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별로 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나이를 잘 먹지 않는 천사가 된 덕도 있지만, 듣기론 이진혁교 수녀원의 수녀들 또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던가. 안젤라를 비롯한 수녀들이 천년 가까이 되는 세월동안 수절을 하는 모습을 보여 존경과 경애의 대상이 된 덕이 컸다.
그래도 세월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서 얼굴 여기저기에 주름진 모습이 보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 세계의 젊은 에너지로 인해 젊었던 때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이 회복은 현재진행형인지라, 옆에서 보는 내가 보기엔 하루하루 더 예뻐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어리석은 인간답게 방금 전까지 하던 모든 후회를 잊은 채, 안젤라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이 새로운 세계를 가득 채우려면 아직 아이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어.”
아아, 나는 왜 이다지도 어리석고 우둔하단 말인가.
이 세계에는 나 외에도 다른 수만의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만 명은 결혼을 했고, 몇만인가의 아이를 낳았다.
즉, 반드시 나와 안젤라 사이에서만 아이를 낳아 이 세계를 채울 필요는 없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젤라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아내의 따스한 살결과 싱그러운 웃음은 도저히 나로 하여금 자제심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진혁 신이시여, 나는 또 같은 잘못을 반복하려 들고 있습니다.
“적어도 셋은 더 낳아야지.”
나는 안젤라를 향해 달려들었고, 안젤라는 못 이기듯 뒤로 넘어졌다.
나중에는 반드시 후회하고야 말 달콤한 시간이 영원할 듯 이어졌다.
작가의말
여러분 모두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홍성은입니다.
이렇게 뒤늦게 에필로그를 드리게 되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우선하는 건 분명 몇 달 전의 제가 완전한 엔딩을 내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겠지요. 그럼에도 부족하나마 이렇게 마무리를 짓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도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긴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작가는 글로써 보답한다는 격언을 새기고, 만약 기다리고 계셨던 분이 아직 있으시다면 그 기다림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에필로그는 무료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새삼스럽게도 이제까지 성원해주심에 감사드린다는 말씀 전하고 싶고, 염치 없습니다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 조심스럽게 꺼내보고 싶습니다.
그럼 부디 당분간,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