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ve Hunter's Checkmate RAW novel - Chapter 251
외전. 바라던 미래에서 (1)
두 악인의 단죄와 심판이 거행된 지 어느덧 열 달이 지나 새로운 해가 밝았다. 봄이 완연할 적에 진행된 총선은 바라던 대로 황선규가 속한 정당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지난 십수 년 동안 차정주가 쌓아 올린 성벽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그가 한평생 감추려 애썼던 치부가 세간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폐허가 된 자리 위로 지난 열 달 동안 변혁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게이트 시대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국 헌터 사회의 주축이었던 한국마력연구소의 부재를 메꿔 나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마력연구소를 완전히 함락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건 단연 차정주를 제명한 바른미래당이었다. 그들은 현 정권의 여당으로서 지닌 사회적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임상 실험 피해자들에게 해독제를 제공한 뒤 연구소 운영을 중단할 것을 명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바른미래당이 차정주와 더는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동시에 머지않아 진행될 총선을 의식한 행보였다. 그 덕분에 임상 실험 피해 생존자들에게 제공할 해독제를 빠르게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소의 운영 중단으로 인해 생긴 부작용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사용하던 각성자 등급 및 던전 등급 측정 기구의 90% 이상이 한국마력연구소에서 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행정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나선 것이 바로 나디아였다. 뉴욕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마력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고, 성물 연구계의 권위자들과 오랜 시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녀는 정부의 요청으로 정원 전자의 이성욱 부회장과 함께 도움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러한 격변을 대비하여 결성한 길드 연합 또한 각자의 위치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다. 특히 길드 연합을 결성하기에 앞서 세부 사항을 논의하는 단계에서 연을 맺게 된 현선민과 설연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합이 잘 맞는 파트너로 지내고 있었다.
평소 설연호와 같은 게이트 고아들의 처우에 관심을 품었던 리호의 설연진 마스터 또한 이번 사태를 접하고 난 뒤 하늘 보육원과 연구소에서 구출된 아이들의 거처 및 보호 시설 마련에 꾸준히 힘써 왔다.
그리하여 오늘은 현선민과 설연리를 중심으로 재단과 길드 연합이 긴 시간 공들여 설립한 대안 학교가 임시 개교하는 날이었다. 이 대안 학교는 임상 실험 피해 생존 아동‧청소년의 트라우마 치료 및 보호 종료 이후의 자립을 돕기 위해 설립되었다.
또한 설립 과정에서 황선규가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그의 언질에 따르면 이러한 행보는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기 위한 첫 번째 성과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정식 개교는 예정대로 3월에 입학식과 함께 진행할 거예요. 아직 도서관 쪽 공사가 안 끝나서 조금 소란스럽기는 한데 얼추 정리됐으니 편하게 둘러보세요. 도해에서 기증해 주신 도서는 공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비치할 예정입니다.”
현선민과 함께 복도를 걷던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왼편에 줄지어 마련된 저학년 교실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 특유의 어색한 느낌이 아직은 남아 있었지만, 정식 개교 이후 한 학기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금세 사라질 터였다.
지잉―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현선민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확인해 보니 설연호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이내 액정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방금 재판에서 징역형이 선고됐다고 하네요.”
맞은편에 있던 현선민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한국마력연구소에서 벌인 임상 실험이 세간의 화두가 되면서 연구소에 아이들을 넘긴 보육원도 함께 주목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늘 보육원의 최성일 원장이 가장 먼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최성일을 시작으로 연구소에 아이들을 넘긴 다른 보육원의 원장들과 그 사이에서 거래를 주도한 입양 브로커 단체까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방금 내가 그녀에게 전한 것도 최성일의 재판 결과였다. 죽을 고비에 처한 걸 간신히 살려 놓은 뒤 보호까지 해 주었건만 재판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며 발악하는 바람에 양형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이윽고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곳에는 설연리가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도해월 마스터. 아이들은 체육관에 있으니 만나고 갈 생각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면 됩니다.”
씩 웃으면서 손을 흔들던 그녀는 나와 현선민 곁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재단에서 보호하던 하늘 보육원 아이들과 보육원장과 관계자들이 연달아 구속되면서 더는 오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은 사양 길드와 연계된 아동‧청소년 보호 센터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건물은 충분히 둘러봤으니 체육관 쪽으로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설연리에게 눈인사로 화답한 나는 곁에 있던 두 사람에게 나가는 방향을 손짓했다. 이어서 두 사람의 안내를 받고 향한 곳은 학교 건물 오른편에 지어진 체육관이었다.
안쪽에서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다수가 왁자지껄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곳곳에서 공과 지면이 부딪히며 나는 마찰음과 특유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중이었다. 오늘 내가 이곳까지 찾아온 건 따로 만나고 싶은 아이가 있어서였다.
“어, 저기 선생님들 왔다!”
그때 무대 근처에 있던 한 아이가 나와 두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내가 찾고 있던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
아이들 대다수가 현선민과 설연리에게 달려가는 가운데 그중 한 아이만이 나에게 달려와 꾸벅 인사했다. 오래전, 하늘 보육원에 방문한 나를 따로 불러낸 뒤 연구소에 강제로 끌려간 친구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그 아이였다.
“여기는 왜 왔어요? 선생님들 보러 온 거예요? 오늘 가면 또 언제 와요?”
서둘러 다가온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재잘거렸다. 보육원에서 지낼 때만 해도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왜소한 편이었던 아이는 이전보다 혈색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선생님들 말 잘 듣고, 밥도 잘 먹고 있으면 금방 또 보러 올게. 아픈 곳은 없지?”
현선민에게 듣기로 아이는 무던히 지내다가도 이따금 나를 찾는다고 했다. 최성일이 하늘 보육원에서 완전히 손을 거둔 이후 내가 아이의 후견인이 되었다. 일이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의지할 구석이 생긴 것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인 듯했다.
이미 길드 연합 차원에서 아이들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아이의 후견인 자격을 맡겠다고 한 건 그날 하늘 보육원에서 나를 불러냈던 아이의 모습에서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을 겹쳐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도 안 아파요. 아저씨, 우리 입학식 날에도 올 거죠? 그리고 얘는 아저씨한테 말했던 제 친구예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종알대는 아이의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 여자아이 때문이었다. 아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친구는 차정주가 연구소 내부에서 방화를 시도했던 날에 구출된 뒤 꾸준히 해독제를 복용하면서 회복 중이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이어서 여자아이가 나를 향해 주뼛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여자아이는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으나 우려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해독제를 꾸준히 복용한 덕분에 차도가 보이는 중이라고 했다.
“너 아저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다고 했잖아. 빨리해.”
친구가 겨우 인사만 건네고 우물쭈물하며 망설이고 있으니 아이가 다 들리도록 속닥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저도 이제 안 아파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신히 말을 꺼낸 뒤에는 아이의 옷자락을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가만히 지켜보며 작은 몸으로 견뎌야 했을 고단한 시간을 셈해 보다가 이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딱 이맘때였었지.
주해나와 내가 보육원에서 함께 지냈던 것도 지금의 두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였다. 서로를 의지하는 두 아이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나와 그녀가 지나온 시간을 곱씹게 되었다. 함께 보낸 시절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이따금 떠올려 보게 되는 건 그녀가 나의 첫 친구였기 때문일 테다.
더불어 나는 그동안 주해나와 차정주 그리고 차진명에게 마지막으로 갱생의 기회를 주려고 했었다. 그 기회에 응한 건 주해나밖에 없었기에 마음속에 더욱 선명하게 남은 듯했다. 흩날리는 모래 폭풍 속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얼굴은 잊을 만하면 종종 떠올랐다.
“다행이네. 다음에 또 보자. 잘 지내고 있어.”
그즈음에서 짧은 상념을 거두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걸음을 돌렸다. 뒤이어 현선민과 설연리의 배웅을 받으면서 차량에 탑승했다.
다시 길드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 차창 너머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주해나의 이름을 재차 꺼내 보았다. 그녀가 나에게 넘긴 자료 덕분에 에덴 길드 또한 비교적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에덴 길드가 몰락하면서 생긴 변화 중 유의미한 것을 두 가지 꼽아 보았다. 하나는 관광용 던전 카르텔 또한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태무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정수희가 그 자리를 역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존에 헌터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교육 재단에서도 그녀가 헌터 아카데미의 특장점 중 하나인 필드 시스템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과 헌터 아카데미 설립 직전까지 여러 방면에서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참작하여 그녀를 새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지난 열 달 동안 있었던 변화를 곱씹고 있으니 금세 사무실에 도착했다. 곧장 다다른 회의실에서는 설연호와 김미솔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이들을 소집한 건 자정을 기점으로 지난 연도 하반기 용산구 길드 순위가 발표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너 내일 헌터 아카데미에 강연 나간다며? 선배와의 만남이라던데.”
한창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김미솔이 물었다. 나는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쳐 놓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들어 보니까 그쪽 학생들이 널 엄청 보고 싶어 한다더라. 간 김에 사진도 찍어 주고, 사인도 해 주고 그래.”
뒤이어 곁에 앉아 있던 설연호가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 말을 듣던 김미솔이 일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근데 있잖아, 애들이 해월이 보고 정건후 선생님이랑 똑같은 사람이 또 있다고 하면서 놀라는 건 아니겠지?”
이거 또 시작이네. 나는 미간을 슬며시 찡그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반면 설연호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음,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졸업한 지 몇 년 지나서 그런지 학교 다닐 때 보던 풋풋한 모습이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어. 그때도 성격은 좀 그랬지만……. 큼, 큼.”
“그러니까. 가끔 보면 쟤, 배 속엔 불혹의 아저씨가 들어앉아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배 속에 앉아 있다고? 그런 건 머릿속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게 대체 언제 적 얘긴데 그걸 아직……. 불혹의 아저씨는 또 뭐야?
이내 눈앞에서 만담을 나누는 두 사람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마저도 잠시, 고개를 절레 저으면서 들고 있던 태블릿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자정까지 일 분밖에 안 남았어.”
태블릿에 시선을 두고 넌지시 입을 열자 두 사람도 각자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자정이 되면서 길드 순위가 발표되었다. 나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뒤 결과를 확인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