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87
86화. 지옥 (6)
재판소의 입구에서 흑검병이 턱짓했다.
“들어가라.”
펄럭-.
군말하지 않고 앞장서 막사의 천을 헤집고 들어선 유리.
그렇게 들어선 공간에는 높은 단상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는 유리가 익히 아는 이가 앉아 있었으니.
유리가 눈을 끔뻑거렸다.
“…코코 씨?”
유리의 부름에 뻑뻑 궐련을 피워 대고 있던 코코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 왔니?”
딱히 유리가 반갑지는 않은지 무성의하게 손을 휘휘 내저은 코코였다.
유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도 부업 중이신 건가요?”
“그렇게 됐네. 내가 제일 한가하다나 뭐라나. 쯧.”
“…오늘의 직업은 뭡니까?”
“보면 모르겠니? 당연히 재판장이지. 알았으면 얼른 거기 쪼르르 서 봐라, 이 죄인들아. 나 바쁘다. 너희 말고도 처리해야 할 게 많아.”
그녀가 단상의 아래를 가리키자 유리가 재빨리 거기에 섰고, 뽀삐와 아린도 눈치를 보며 그의 양옆에 자리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됐다.
코코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재판장 연기에 들어갔다.
“죄인들은 들으라, 너희는 평화로운 동물의 숲에 침입하여 분란을 일으켰다. 이를 인정하느냐?”
“인정 못 하면요?”
“상관없다, 인정 못 하고 백날, 천날 항변해 봤자 어차피 너희는 전부 유죄니까. 그건 절대 바뀌지 않는다.”
“…거참.”
그제야 유리는 이게 재판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말만 재판이지 이건 이미 유죄가 확정된 상태에서 형량만 정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모든 것을 포기한 유리는 그냥 코코가 하는 말을 그저 듣기만 했다.
“하여, 동물의 숲에 분란을 일으킨 너희 셋에게 지옥 훈련 8시간 형을 선고한다. 형 집행에 성실히 임하지 않는다면 형 집행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이며, 형 집행 시간을 모두 채우지 못한다면 이 지옥 훈련소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거다.”
그녀의 말에 유리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여덟 시간이라…….’
아마도 지옥 훈련소로 끌려오면 기본으로 8시간은 붙잡혀 있어야 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 8시간을 그냥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 아까 오면서 보았던 것들을 해야겠지.
‘가죽 모으기 퀘스트는 모두 10일.’
분명 밤마다 늑대, 곰, 호랑이가 돌아다니며 기수들을 지옥으로 끌고 올 거다.
그럼 다시 8시간 동안 입에 단내가 나도록 굴러야 할 터.
안 그래도 가죽 모을 시간이 모자란데, 지옥 훈련으로 체력마저 빠져 버리게 되면?
그건 여러모로 고난의 연속이리라.
하지만 진짜 고난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코코가 제 앞에 놓인 서류를 슥- 훑었다.
“아린 헬가, 보비크르탄카푸르타비. 보유한 토끼와 사슴 가죽이 하나씩이고…….”
그다음 대목을 읽는 코코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유리 홀랜드, 보유한 가죽이 토끼 32장, 사슴 12장, 늑대 4장이라… 그 잠깐 사이에 많이도 모았구나.”
지금까지 붙잡혀 온 이들 중 유리의 성적은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아니, 독보적이었다.
다른 놈들을 전부 합쳐도 이 녀석 하나만 못할 거다.
하지만 그럼 뭐 하겠는가.
전부 헛수고인데.
피식거리는 입꼬리를 붙잡은 코코가 다시금 연기에 들어갔다.
“쯧쯧, 이 평화로운 동물의 숲에 분란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선량한 동물들을 이리도 많이 해치다니! 고로 이 가죽들은 전부 압수하겠느니라!”
쿠궁-.
그 말을 들은 유리의 등 뒤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환영이 펼쳐졌다.
“아, 압수라뇨!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깄다. 원래 이 퀘스트 규칙이 그래. 아니꼬우면 잡혀 오질 말았어야지.”
후욱-.
비아냥거리며 궐련 연기를 내뱉는 코코.
이에 유리가 울상을 지었다.
“우우… 불합리해. 이건 횡포입니다!”
“조용히 해라, 이놈! 아직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땅땅땅-.
코코가 재판용 나무망치를 두들겨 유리를 한 번 째려보고 다시 재판을 이어 나갔다.
“아린 헬가와 보비크르탄카푸르타비는 첫 재판이기도 하고 보유한 가죽도 그리 많지 않으니… 본 판사의 재량으로 정상 참작하여 주겠다. 하나!”
코코의 눈이 유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유리 홀랜드… 네놈의 죄는 무겁다! 첫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많은 동물들을 해하다니! 하여, 지니고 있던 가죽의 값어치인 29만 2천 포인트를 시간으로 환산하여 총 29시간 12분의 지옥 훈련 형(刑)을 추가할 것을 선고한다!”
땅땅땅-.
유리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몇 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29시간 12분이란다.
이에 유리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저…….”
“왜?”
재판장 연기가 끝났는지 코코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유리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물었다.
“지옥 훈련 형의 추가라고 하시면… 기본 8시간에 29시간을 추가한다는 거겠죠?”
“당연히 아니지.”
“아, 다행이…….”
“기본 8시간에 29시간 12분을 추가한다는 거다. 12분은 왜 빼먹어?”
“…….”
“계산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해 주마, 너의 형량은 37시간 12분이란다.”
유리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37시간……? 37시간?!’
무려 하루가 넘는 시간이었다.
물론 37시간 연속으로 지옥 훈련을 받을 수 없으니, 실제로는 그 형량을 다 채우고 나면 며칠 후일지 알 수 없는 상황.
이에 썩어 들던 유리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럼… 내 가죽은? 내 포인트는?!’
열심히 모은 가죽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포인트를 모으기는커녕 이 지옥에서 미친 듯이 굴러야 한다고?
이는 유리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유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떻게든 형량을 줄여야 한다.’
그래, 어차피 이미 뺏긴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아니꼽고 더럽지만, 그게 규칙이라는데 어쩌겠나.
하여 자신이 이 더러운 상황에 복수할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빨리 이 지옥을 빠져나가 보란 듯이 다시 포인트를 모으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시간을 줄여서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주 좋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유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의 있습니다!”
“이의?”
난데없는 이의 제기에 코코가 흥미로운 눈빛을 했고.
유리는 그런 그녀를 향해 비장하게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그거, 저 혼자 잡은 거 아닙니다!”
“혼자 잡은 게 아니다? 그럼?”
유리가 양팔을 엇갈려 뻗으며 좌우의 뽀삐와 아린을 손가락질했다.
“얘들요.”
“……?”
“얘들이랑 같이 잡은 겁니다.”
멀뚱히 서 있다가 난데없이 지목당한 뽀삐와 아린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지사.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배배배, 배고프다!”
그들은 열심히 고개를 도리질치며 아니라 하였지만, 유리의 뻔뻔한 목소리가 더 컸다.
그리고 자고로 세상이란 목소리 큰 놈이 유리하며, 아부 잘하는 놈이 승승장구하는 법이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죗값! 부디 공.평.하게 나눠 주시길 바랍니다! 어질고 현명하신 존경하는 재판장님!”
유리가 당당하고 뻔뻔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얘들아, 나 오늘부터 니들이랑 친구 하련다.’
* * *
머엉-.
재판소를 나선 세 사람의 표정은 극명하게 갈렸다.
조금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한결 후련해 보이는 얼굴의 유리.
반면, 마치 영혼이라도 털린 듯 퀭한 얼굴의 나머지 둘.
뽀삐와 아린의 동공은 살짝 풀려 있었다.
왜 안 그러겠는가.
괜히 유리 옆에 서 있다가 ‘9시간 44분 추가’란 날벼락을 맞았는데.
그렇게 재판소를 빠져나온 아린이 유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그건 자신들을 끌어들인 유리에게 표출하는 합당한 분노였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지척에서 터져 나온 흑검병의 우렁찬 외침에 묻혀 버렸다.
“신병 받아라!”
그 소리에 먼저 훈련받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유리와 친구들에게 파바밧 꽂혀 들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들은 묘했다.
이 지옥에 합류한 이들에 대한 동정.
또한, 함께 고통받는 이가 생겨난 것에 대한 기쁨.
그렇게 유리와 친구들은 모두의 기묘한 환영을 받으며 곧장 지옥 훈련에 합류했다.
철컥-.
세 사람이 발목에 묵직한 족쇄를 차고.
“지금부터 팔 벌려 높이뛰기를 시작한다. 마지막 구호는 생략! 완벽하게 끝낼 시 10분간 휴식하겠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2배로 늘어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횟수는 500회. 몇 회?”
“오백 회!”
“목소리가 작다. 1,000회.”
“처어언언 회!”
“목소리가 그것밖에 안 나오나! 1,500회!”
“처어어어오배애액 회!”
“시작!”
“하나, 둘, 셋! 하나!”
“하나, 둘, 셋! 둘!”
질퍽질퍽한 진흙탕 위에서 팔 벌려 높이뛰기가 시작됐다.
유리는 묵묵하게 훈련에 임하며 이를 갈았다.
‘포인트… 내 포인트!’
애초에 요람이 쉽게 포인트를 풀 거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설마 그걸 다시 뺏어 갈 줄이야.
눈앞에서 29만 2천 포인트가 증발해 버릴 때 유리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악독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의 절망과 분노는 이내 복수심으로 변하였으니.
‘호피 아줌마… 가만 안 둘 거야. 부숴 버리겠어!’
유리는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그리고 사실 복수심 이외에도 호랑이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백날 숲속을 돌며 가죽을 모아 봤자, 호피 아줌마를 만나 지옥으로 끌려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 바로 개털 될 텐데.’
하여, 안정적인 가죽 수급을 위해서라도 호피 아줌마라는 악의 축은 반드시 없어져야만 했다.
거기다 호피 아줌마만 잡을 수 있다면 포인트 대박도 노릴 수 있고.
‘넌 내가 반드시 잡는다, 호피 아줌마!’
유리는 복수심과 철저한 계산으로 호랑이를 잡을 계획을 세워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천사백구십구!”
드디어 팔 벌려 높이 뛰기가 1,500회를 눈앞에 둔 상황.
이에 모두가 바라고 또 바랐다.
‘제발, 외치지 마! 제발!’
제발 마지막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없기를.
하지만 그런 모두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천오배액!”
가장 뒤쪽에서 아주 당당하게 1,500이라 울부짖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다른 이들의 얼굴에 황망함이 깃들었고, 유리의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야 이 빡대가리 새끼야! 그걸 틀리냐, 그걸!’
호랑이고 나발이고 간에 저 새끼부터 조질까?
하지만 유리에게 그럴 시간은 없었다.
곧장 팔 벌려 높이뛰기 3천 번을 더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유리와 친구들의 지옥 훈련은 계속 이어졌다.
“사아아암천!”
“…시발.”
한동안 쭈욱-.
* * *
옅은 눈발이 휘날리는 어느 날.
휘오오오-.
덜그럭-.
차갑게 부는 바람에 [지옥 훈련소]라 적힌 현판이 덜컹거렸다.
곧이어 현판 밑 녹슨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끼이이익- 쿵!
그렇게 활짝 열린 문 너머에서…….
“아린 헬가, 보비크르탄카푸르타비. 그리고 유리 홀랜드… 출소(出所)!”
저벅- 저벅-.
3개의 인영(人影)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