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19
119화
“아~ 그래도 죽사막 전갈처럼 양심 없게 굴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허공 위로 생성되는 검을 구슬들을 바라보며, 이터널리스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사막’의 보스, ‘사막의 지배자 리비쿠스’가 보여 줬던 사람의 기를 빨고 피를 말리는 패턴을 떠올린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이제 겨우 73%네.”
약간의 허무함을 담아, 이노센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허공을 가득 메운 검은 구슬비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몸을 두들기는 충격에 신음을 흘리며 전체 회복 스펠을 외우던 리디안은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2파티 환경파괴자! 6파티 삼촌, 인드라! 9파티 스타일리쉬! 4파티 푸우, 레온! 3파티 관우! 10파티 세자! 8파티 기사!”
이번에도 역시 신사가 즉시 파악해 외쳤다.
아니길 바랐건만. 간부들의 예상대로 1씩 착실하게 인원이 증가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패턴 시마다 인원 증가 옵션이 포함된 듯하다는 확정적인 뒷말에 모두가 야유를 던졌다.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안 좋아진 상태였다.
다크 템플러인 인드라는 물론, 하이 랭커 딜러인 레온까지 당첨되어 중앙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그토록 든든했던 레온은 공포의 존재가 되어 플레이어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 빨리 레온 님부터 막아 줘요!”
리디안은 사방팔방, 마구잡이로 날아가는 레온의 검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도 모자라 로크바의 체인 라이트닝까지 떨어지니 플레이어들의 HP가 남아나질 않았다. 메인 힐러인 페페와 이모탈, 캐티스 역시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곤 서둘러 여신의 손길을 외웠다.
“야! 버텨야지, 거기서 자리 이동하면 어떻게 해!”
어찌나 위력적인지. 겁먹은 작약이 슬그머니 물러나는 걸 목격한 버베나가 쩌렁쩌렁하게 소리 질렀다.
비단 작약뿐만이 아니었다. 레온의 공격 범위에 있던 몇몇 딜러들도 지레 겁먹고 몇 발자국씩 물러난 상태였다.
보스 곁에 서있어야 하는 탱커, 그리고 대인전에 여유로운 크라이그 같은 소수의 인원만이 그 자리에 서 레온의 공격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레온의 폭주에 메인 힐러들이 좀 더 빠르게 힐을 외우는 사이, 괴자가 빠진 ‘신축’ 담당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혼령화에 걸린 인드라가 대뜸 혼란 필드를 깔았고, 가까이 있던 세인트 규호와 바드 리즌, 그리고 파파가 혼란에 걸려 이리저리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난리 통 속에서도, 다크 템플러 견제를 최우선으로 둔 누리가 급히 뛰어와 인드라를 겨우 잠재웠다.
그나마 서로 정상 수치라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인드라가 금방 잡힌 덕분에, 그레이스와 드림드림이 혼란에 걸린 이들을 차례차례 구제했다.
혼령화에 걸려 드림드림을 패고 있던 괴자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다람이 뛰어와 잠재웠다.
리디안은 이성을 잃고 드림드림을 두들겨 패는 괴자의 모습을 보며 땀을 흘렸다. 한참 전, 자신의 모습도 딱 저랬겠구나 싶었다.
괴자가 진정되자, 드림드림은 그녀에게 구타당한 어깨를 문지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바탕 소동을 겪은 후, 플레이어들은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레온 때문이었다.
“와, 레온 님 대미지도 진짜 장난 아니네. 간 떨어질 뻔.”
공격 범위에 서있어 검기류 스킬을 그대로 맞은 이노센트가 혀를 내둘렀다. 섬멸검기는 일정 범위 내, 대상을 최대 세 명 공격하는 나이트의 범위 기술이다. 이노센트와 함께 얻어맞은 이터널리스트와 꼬마의 안색도 창백해진 상태였다.
“괜히 랭킹 1위가 아니지. 80 찍으면 더 괴물 될걸?”
로크바의 팔을 방패로 막고 있던 백검이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 그에 이노센트의 시선이 자연스레 버베나를 향했다. 정말 80레벨을 찍을 생각이 없냐는 은근한 눈빛에 버베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 됐어. 레이드 때문에 경치 다 떨궈서 의욕 없어.”
“뭐야, 지금 몇 프론데?”
“…죽사막 도전 전에는 90%대였는데, 지금은 80%대. 관우 오빠도 이제 80% 진입했을 건데. 아, 윤재는?”
갑작스레 제게 물음이 닿자, 크라이그가 흘깃 버베나를 바라봤다.
“전 70%대 진입이었는데, 어제 죽어서 다시 60%대로 떨어졌어요.”
사망 시마다 5%가 하락하니, 대강 65% 언저리라는 뜻이었다. 아마 마제스티도 그와 비슷할 터. 거기까지 생각한 버베나는 잠시 고민했다. 예비 80레벨이 수두룩하니, 이 기회에 제대로 파티를 짜고 다 같이 폐관 수련에 돌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이다.
“뭐, 이건 일단 레이드 끝나고 제대로 의논해 보는 거로 하고…….”
한 걸음 물러난 버베나는 때마침 바닥에 생겨난 하얀 마법진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 또 랜텔…….”
지겹다는 듯 중얼거린 리디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너무 티를 냈나 싶어, 무안하여 슬쩍 주위를 살폈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페페가 위로하듯 싱긋 웃어 주고 있었다.
“혹시 길 모르는 분들이랑 떨어지면 바로 메시지 주세요.”
리디안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워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바로 달려와 주겠다는 말 같았다. 이것도 특별 대우인가? 혼자 망상한 리디안은 비교적 기분 좋게 랜덤 텔레포트를 맞이했다.
“오! 이번엔 내가 내비게이션이네?”
리디안과 같은 포인트에 떨어진 이는 버베나, 규호였다. 리디안처럼 길을 모르는 규호는 버베나를 바라보며 몹시 기뻐했다.
“누나! 저는 누나만 믿을게요!”
신기하게도 참 운이 좋았다. 리디안은 반짝이는 눈으로 버베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에게 있어 버베나는 구조선, 아니, 구세주였다. 자신을 향한 기대감 어린 시선에 버베나는 괜스레 으쓱거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크라이그 : 길 아는 사람 있어요?]곧장 버베나의 뒤를 쫓기가 무섭게 리디안은 번개처럼 뜬 메시지를 보며 작은 웃음을 삼켰다. 급히 보낸 느낌이 다분했다. 진짜 책임진 것도 아닌데 끝까지 신경 써주는 배려도 짙게 느껴졌다.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냥 뭔가, 크라이그만의 표현이라는 게 느껴져 다정다감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좀 부끄러운 건가? 큼큼거린 리디안은 바로 버베나가 있어 괜찮다는 답장을 작성해 보냈다.
“리디안 님. 아무도 없어서 하는 얘긴데. 길드 이적할 생각 없어요? 왜~ 페페 님이랑 친하다면서요~ 우리 길드에 페페보다 더 잘해 줄 사람 많은데. 어때요?”
미로를 빠져나가는 사이, 버베나는 은근하게 리디안을 꼬셨다.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반은 진담 같아서 리디안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누나, 그러다가 이노센트 님한테 걸리면 어쩌려고요?”
다행히 규호의 오지랖 덕분에 버베나의 장난은 거기서 멈췄다.
똑똑한 버베나 덕분에 리디안은 규호와 함께 1등으로 귀환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동당한 플레이어들이 모두 돌아오고 나서야, 레온은 모두를 향해 명확하게 공지했다.
“혼령화, 랜텔. 패턴 때마다 해당 인원, 한 명씩 증가합니다! 랜텔의 경우 다람 님은 리질리언스 필드 관리에 신경 써주시고, 다른 분들은 되도록 빨리 귀환해 주시길 바랍니다!”
달갑지 않은 공표에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뒤따랐다. 물론, 아직 초반인 만큼 크게 와닿지 않아 다들 웃을 수 있는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 시간이 지나 여러 패턴이 반복될수록. 플레이어들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 갔다.
“와, 진짜 미치겠네.”
디버프나 봉인, 쿨타임 증가 등은 차라리 쉬운 편이었다.
전체 공격과 이어진 혼령화 패턴을 맞이할 때마다, 플레이어들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참 전, 레온이 그랬던 것처럼 하이 랭커 딜러들이 혼령화에 걸려 폭주할 때마다 스테이지는 초토화됐다.
세인트들은 현재 페페를 제외한 모두가 혼령화에 걸려본 상태였다. 그나마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다람은 다행히 아직 걸리지 않고 있었다.
혼령화도 혼령화지만 랜덤 텔레포트 패턴도 은근한 스트레스였다.
리디안은 점점 이 패턴이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고정 당첨인 것도 사실 짜증 나는 일이었고, 구불구불한 미로를 따라 쭉 걸어오는 것도 상당한 피로였다.
더군다나 점점 이동 인원이 늘어나는 바람에, 반대로 소수가 되어가는 중앙 사정을 고려해 이동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이제는 이동되자마자 멤버를 확인하곤 바로 뛰는 추세였다.
어쩐지 ‘죽사막’에서 경험한 죽음의 달리기가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회복 패턴! 다들 대기!”
몇 번의 고비를 지나, 비로소 로크바의 HP가 49%가 된 순간이었다.
게이지가 50% 아래로 깎이기가 무섭게, 로크바는 곧장 지면으로 내려와 뼈뿐인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는 모션을 취했다. 모두가 긴장하는, 회복 패턴의 전조 증상이었다.
“와, 제발…….”
별일 없기를 바란다며 너나 할 것 없이 손에 땀을 쥔 채 긴장했다. 게임 시절의 룰 그대로라면, 로크바는 1회 한정으로 80%까지 HP를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기존과 달리 변수가 있으므로… 플레이어들은 변화된 회복 패턴을 상정해야 했다.
“과연 한 번에 100% 전체 회복이냐, 아니면 단순한 회복 횟수 증가냐.”
“재수 없으면 둘 다 적용될 수도 있고요.”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클리어 확률이 변동되기에 리디안도 간절한 마음으로 로크바를 주시했다.
로크바는 현재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손을 짚은 상태였다. 곧, 뼈뿐인 손끝으로부터 검보랏빛의 기운이 생성되었다. 불길하게 꿈틀거리던 빛은 그대로 바닥으로 스며들어 틈을 따라 널리 퍼져 나갔다.
빛은 미로 입구를 그대로 지나쳐 벽과 천장. 나아가서는 맵 전체를 보랏빛으로 가득 물들였다. 시야가 보랏빛으로 꽉 참과 동시에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법 큰 진동에 플레이어들이 대다수 휘청거렸다.
리디안도 잠시 비틀거렸으나 뒤에 있던 페페가 급히 팔을 붙잡아 지탱해 줬다. 덕분에 넘어지지 않은 리디안은 고마움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몇 초 후, 진동이 멎었다. 동시에 여덟 갈래의 길목으로부터 거대한 빛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닥의 틈을 따라 질주한 빛은 다시금 로크바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회복 패턴 때는 무적 상태가 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몇 발자국 물러나 짜증스럽게 쳐다봤다.
얼굴 없이 붉은 안광뿐인 로크바는 검보랏빛 기운을 손안에 가득 쥔 채, 제 가슴으로 가져다 댔다. 넘실거리던 보랏빛 에너지는 그대로 로크바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잠깐의 빛 번짐과 함께, 모든 빛을 흡수한 로크바가 다시 허공 위로 떠올랐다. 49%였던 로크바의 피는 순식간에 차올라 90%로 고정됐다.
“아오, 이 X발!”
“X같은 회복!”
“아니, 양심 어디 감?”
“사탄도 얘보다는 착할 듯.”
“아……. 진짜 짜증 난다.”
“그냥 나가라는 거지?”
“노노. 뒤지게 고생하다 죽으라는 거죠.”
지나치게 길게 늘어난 붉은 게이지에 곳곳에서 험악한 욕설과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기껏 힘들게 깎아 놓은 HP가 도로 차오르는 것도 열 받는데 그 수치가 기존보다 더 늘어나니, 절로 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흠. 예상대로네요. 100%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인가.”
“이제 저게 한 번으로 끝날지, 아니면 두 번, 세 번이 될지 그것만 파악하면 되겠네요.”
어느 정도 예상한 범위라, 레온과 마제스티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부디 아니길 바라지만. 저게 또 반복되면 우리로선 정말 버티기 힘들겠네요.”
쓰게 웃는 레온의 중얼거림에 마제스티도 한숨과 함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만약, 반복 회복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클리어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짐으로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다른 곳으로 옮겨야지. 그래도 산맥이나 신전, 동굴은 여기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데.”
“뭐야, 마제 님 진심이에요? 레이드 또 하자고요?”
“그럼 안 할 거예요?”
“이상하네. 마제 님 레이드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요.”
“에이, 뭐 좋아서 하나. 다 템 먹자고 하는 거지.”
“…스토리니 뭐니 침공 이벤트 대비해서 깨는 순수한 의도 아니었어요?”
“겸사겸사?”
양심에 찔린 마제스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본심에 레온도 어이없어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누가 비난하랴. 결국,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결과가 침공 이벤트에 대한 대비로 이어질 텐데. 레온과 마제스티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킬킬 웃었다.
“자자, 아직 포기한 거 아니니까 집중합시다!”
나빠진 상황에 늘어지는 분위기가 못마땅했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신사가 플레이어들을 향해 호통쳤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회복을 끝마친 로크바가 성가신 패턴을 난무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혼령 폭탄이 떨어지자, 전체 회복 스펠에 바로 회복된 플레이어들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나 이전만큼 쾌활하지는 못했다. 저마다 죽상을 짓고선 투덜거리기 바빴다.
“아오, 저걸 또 언제 깎아.”
“좀 할 만하다 싶었는데, 뒤통수를 때려버리네.”
“아니, 근데 다들 짜증 내면서도 잘만 치고 있네요?”
“이건 딜러의 본능이지, 본능.”
“맞음. 우린 일단 무조건 치고 봄.”
“어? 잠깐. 뭐야? 이상한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아이스 에로우’를 박아 넣던 스타일리쉬가 미간을 좁히며 갸웃했다. 곧 다른 이에게도 같은 반응이 나타났다. 자신만의 공격 스펠, 스킬을 때려 넣던 딜러들은 유난히 빠르게 줄어드는 로크바의 HP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엥? 순식간에 6%나 까였네?”
“누가 뭐 궁극의 필살기라도 씀?”
“그런 게 있었어?”
“있겠어요?”
“근데 쟤 피가 갑자기 왜 저래요?”
“어째 방어가 말랑말랑해진 느낌인데요?”
“헐?”
짜증으로 가득했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엔 실실거리는 웃음이 걸리기 시작했다. 내내 불퉁한 표정으로 소환수를 조종하고 있던 버베나의 얼굴도 활짝 피었다.
“오, 뭐야. 이러면 할 만하겠는데?”
금세 히죽거리며 보스 근처를 기웃거리는 버베나의 모습을 본 맥스비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버베나는 다 좋은데, 가끔 너무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게 문제였다.
조금 전 그 대화 이후, 하나뿐인 혈육을 바라보는 레온의 시선이 내내 삐딱한 걸 보니 레이드가 끝난 후 한바탕 뒤집힐 건 불 보듯 뻔했다. 뭐, 버베나가 실수한 건 사실이라 맥스비도 이번만큼은 레온의 편을 들어 줄 예정이었다.
한편, 함께 공격하던 레온과 마제스티 역시 로크바의 방어력이 유난히 약화한 것을 느꼈기에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로크바의 피는 거짓말처럼 쭉쭉 줄어들고 있었다. 레온은 대강 흐름을 알 것 같다며 즉각 플레이어들을 향해 외쳤다.
“아무래도 회복된 대신 방어력이 저하된 모양입니다. 추측하건대, 현재 방어 상태가 50%까지 해당할 가능성이 크니 우선 공격에 전념해 주세요!”
당분간은 보스가 ‘물 몸’이라는 뜻이었다.
그 반가운 소식에 여기저기서 환호가 치솟았다. 칙칙하게 분위기를 붙잡던 절망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몬스터의 피 닳는 느낌은 딜러들이 가장 크게 체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다들 신이 난 표정으로 로크바에게 달려들었다.
거짓말처럼 잠깐 사이에 로크바의 피는 79%로 크게 줄어들었다.
낮아진 방어력에 마법 방어력도 포함되는지, 매지션들도 펑펑 터지는 마법 대미지에 손맛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체인 라이트닝 공격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환과 디버프까지 한 번 뿌린 로크바가 곧장 혼령화 패턴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미처 잡몹을 다 처리하지 못한 팀이 허둥지둥 당황했고, 눈치 빠른 다른 딜러들이 위험을 대비해 처리를 도왔다. 덕분에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맞춰 잡몹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리디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주시했다.
이번에 걸릴 인원은 열일곱 명. 열다섯 명이 넘어간 시점부터 아군 공격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기에 다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검은 구슬비가 시야에 흩날리는 순간, 신사의 몸이 검게 물들어 가는 걸 목격한 레온이 재빨리 플레이어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의 상태를 스캔해, 신사 대신 당첨자들을 읊었다.
“10파티 탐식자, 어쿠스틱, 마프로! 6파티 페이지! 3파티 마제스티! 4파티 꼬마, 작약! 9파티 신사, 또치! 1파티 파피루스, 하츠! 2파티 드림드림, 그레이스! 5파티 맥스비, 시우! 7파티 일반인, 색시!”
머리 위로 검은 게이지가 차오르자마자, 그들은 돌변해 아군을 공격해 왔다.
매지션인 맥스비와 시우는 플레이어 특정 없이, 사방팔방으로 광역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때아닌 눈보라와 전격, 화염 마법이 플레이어들을 강타했고, 살인적인 대미지에 당황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법 공격에 의해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 그때, 혼령화를 대비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하츠가 메인 비격수들이 있는 곳으로 전진했다.
하츠는 필드 범위에 근접하자마자, 세인트들을 향해 곧장 상태 이상 필드를 시전했다.
“세인트들 후퇴!”
운 좋게 그를 목격한 이모탈이 빠르게 외쳤지만, 힐에 집중하던 페페와 캐티스가 피하지 못하고 그만 석화 필드에 걸려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 발자국 차이로 간신히 범위 밖으로 도망친 리디안은 아비규환이 된 사태에 놀라 잠시 당황했다.
사방에서 매지션의 스펠이 난무했고 파티원들의 HP는 미친 듯이 하락하고 있었다. 함께 힐을 해야 할 페페와 캐티스는 정지한 상태였다. ‘신축’ 담당 역시 두 명이나 혼령화에 걸려 괴자 혼자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거기에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까지 겹치자,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당장 뭘 해야 하는지 머리로는 아는데, 갑작스레 우선순위가 뒤엉키게 되자 리디안은 그대로 굳어 멈췄다.
“리디안 님! 페페 님이랑 캐티스 님부터 풀어 주세요!”
사고가 정지하기 직전, 이모탈의 날카로운 외침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리디안은 눈을 홉뜨며 지시대로 곧장 페페와 캐티스부터 풀어냈다. 그리고 빠르게 전체 회복 스펠을 외웠다.
리디안의 신축으로 풀려난 페페와 캐티스는 한 점 당황 없이 바로 전체 힐에 집중했다. 회복 텀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몇몇 사람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원래 상태로 돌아온 리디안은 작은 숨을 몰아쉬며, 이모탈을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따끔한 훈계를 예상했지만, 이모탈은 별말 없이 인자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한편, 두 명이나 혼령화가 되어 구멍이 생긴 ‘신축’ 팀에는 규호와 앵두군이 재빨리 들어와 괴자를 보조했다.
하츠는 반응 빠른 다람에게 이미 견제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매지션 둘이 스펠을 펑펑 써대고, 로크바까지 혼령 폭탄 공격을 가하는 탓에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미리내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누리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이터널리스트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오토마타 님이 사망하였습니다.]짧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극적으로 들어간 매지션들의 광역기 콤보에 HP가 아슬아슬했던 네 명이 바로 사망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할 말을 잃었다. 리디안은 자신의 회복 스펠로도 커버되지 못한 상황이 믿기질 않아, 멍하니 입 벌린 채 뻐끔거렸다.
덩달아 괜한 책임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곤 해도, 메인 힐러로서 파티원들의 HP를 책임지는 처지다 보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리디안은 다소 의기소침해져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절로 숙연해져 눈알을 굴리던 때였다.
페페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어깨를 두드렸다. 캐티스와 이모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도 같은 마음이라는 듯, 신경 쓰지 말라는 위로의 눈빛이 닿았다.
리디안은 간신히 무거운 고개를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