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121
121화
죽은 괴자를 무심하게 지나친 레온이 향한 곳은 리디안이 있는 방향이었다. 리디안은 초점 없는 레온의 눈을 마주 보자마자 공포감에 덜덜 몸을 떨었다.
저 혼자 살 생각이라면 당장 ‘성스러운 결계’를 펼치겠지만, 지금 성결을 쓰는 건 동료 힐러들에게 큰 민폐였다. 스펠 특징상, 1분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그대로 허수아비가 되어야 했으니까.
리디안은 다급히 여신의 손길을 외우면서도 점점 가까워져 오는 레온의 모습에 잔뜩 울상 지었다. 저기 누워 있는 괴자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될 것 같다며 말이다.
다람을 처리한 후, 근처에 있던 딜러들을 제압하던 매지션들이 레온의 위험을 알아챈 건 나중이었다. 앗, 하며 시우와 테세우스가 당혹스러운 손을 뻗는 순간, 크라이그가 재빨리 뛰어와 레온의 앞을 막아섰다.
챙, 하고 쇠붙이가 맞붙는 소리가 너무나도 소름 끼쳐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그로가 바뀐 레온은 망설임 없이 크라이그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판단력을 잃고 모든 스킬을 소모한 탓이었다.
크라이그는 상체를 짓누르는 강한 힘에 인상을 찌푸렸다. 순수 힘 스탯인 레온의 근력은 어마어마했다.
어차피 힐 주는 이도 없겠다, 바로 반격해 레온을 처리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잠시 멀리 나가 있던 하츠가 급히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 크라이그는 살의를 거두었다.
덕분에 레온은 죽지 않고 하츠의 수면 필드에 걸려 침묵했다. 레온의 돌격에 잔뜩 굳어 있던 리디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크라이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덕분에 살았다.
고마움의 눈길로 바라봤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크라이그는 리디안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보스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음. 아예 적으로 간주하고 바로 처리하니까 확실히 피해가 덜하네요. 그 순간만큼은 몬스터로 간주하니 피케이에 해당하지도 않고. 인원이 많을 땐 이 방법이 제일 나은 듯…….”
백검은 쓰게 웃었다. 다소 지나친 처사이긴 해도, 오로지 클리어를 위한다면 알맞은 대응이었다. 죽음에 대해 거리낌 없는 몇 명은 진작 이렇게 할걸,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딜러들은 앞으로 혼령화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캐티스에 의해 살아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노센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사람마다 달라, 이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이지만 따끔한 양심이 무색하리만치, 이후로의 진행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일부의 걱정과는 달리 로크바는 추가적으로 회복하지 않았다.
회복 패턴이 일회성으로 끝난 것과는 달리, 오브젝트 패턴에서 공격력 증폭이 두드러지진 탓에 몇 번 위험한 고비가 있었다. 그때마다 한두 명씩 사망한 것 외에는 모든 게 순탄했다.
리디안은 순식간에 차분해진 레이드 분위기에 크게 안도했다.
랜덤 텔레포트는 이제 거의 마흔 명 가까이 이동되고 있었다. 이동될 때마다 각 포인트에서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는 모습은 마치 단체 마라톤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그간 잔뜩 굳어 있던 플레이어들의 표정도 부드럽게 풀려 갔다. 혼령화 역시, 위험인물에 대한 즉각 처리를 우선시한 덕분에 이렇다 할 큰 피해는 없었다.
매지션들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다람을 정조준하고 있는 상태였다.
설마 도와주러 와서 이렇게 어이없이 죽을 줄 몰랐다며, 다람이 징징거리긴 했지만 심각하게 화를 내거나 그러진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히죽거리는 걸 보니, 또라이답게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보스 근처에 자리 잡은 딜러들도 가장 고위험 분자인 레온과 크라이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 의아한 일이지만 크라이그는 신기하게도 혼령화에 걸리지 않고 있었다. 아쳐인 모르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세팅 덕분인가 싶어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딱히 눈에 띄는 특징은 없었다. 크라이그 본인도 신기한지, 그냥 오늘은 운이 좋다며 심드렁하게 넘겼다.
점차 농담이 오가는 분위기에 리디안은 이제 좀 숨통이 트인다며 크게 심호흡했다. 시작 전 잠깐 느꼈던 그 상쾌한 감각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한바탕 전쟁을 겪고 정신 차린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급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상당히 편안하게 모든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마, 지하 도시 레이드에 완전히 적응해서 그런 거라고, 리디안은 쓴웃음을 삼켰다. 보스가 다 죽어가는 지금에서야 적응한 게 사실 좀 부끄럽기도 했다.
페페나 캐티스, 이모탈은 자신들도 크게 당황했다며, 괜찮다며 기운을 북돋아 줬지만, 리디안은 스스로도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걸 잘 알기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 아까 스무 명 아니었어? 지금 또 스무 명인데?”
반복된 혼령화 패턴에서 신기하게도 좋은 소식이 하나 나왔다. 플레이어들은 스무 명에서 더 늘어나지 않는 수치에 크게 반가워했다. 한참 전, 크라이그가 추측한 대로, 혼령화 인원에 제한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다들 그리 떠들었다.
서서히 지쳐 가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아마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오브젝트 패턴에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고 나서부터였다.
“11%.”
얼굴만큼이나 몹시 밝아진 또치의 목소리가 주기적으로 울려 퍼질 때마다 환호가 솟았다.
[도도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테세우스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버베나 님이 사망하였습니다.] [다람 님이 사망하였습니다.]또 한 번의 혼령화 패턴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지만, 아주 잠깐의 애도 기간을 가질 뿐.
다들 10% 아래로 떨어진 로크바의 피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긴장이 사라진 스테이지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8%!”
“7%!”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게이지 중계를 하는 상태였다. 이윽고 시간 더 흘러, 로크바의 HP가 6%로 하락한 그때, 눈치 없이 바닥에서 생겨난 하얀 마법진에 모두가 야유했다.
“와, 이 타이밍에 랜텔?”
“약 올리나 진짜.”
투덜거리면서도 다들 목소리에 흥이 가득했다. 리디안도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기분 좋게 랜덤 텔레포트를 맞이했다.
“리디안 님이다!”
“또 만났네요, 우리.”
초반에 비해 미로 스타트 포인트는 꽤 번잡해진 상태였다. 리디안은 자신을 향해 밝게 인사하는 포푸리, 규호 그리고 옅게 웃는 도도와 크라이그를 만났다.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했지만, 떠들 시간은 없었다.
길을 아는 포푸리가 자신 있게 앞장섰고 규호와 도도가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리디안은 일부러 제 옆에서 나란히 뛰는 크라이그를 바라보며 헤헤 웃었다.
“크라이그 님. 아까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덕분에 살았어요.”
잊지 않고 있던 리디안이 이때다 싶어 말했다. 그에 스륵 고개 돌린 크라이그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나랑 있는 한, 절대 죽을 일 없게 해줄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낯부끄러운 약속이 떨어지자 리디안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찌나 놀랐는지 움직이던 다리까지 꼬일 정도였다. 점점 느려지는 리디안의 모습에 크라이그는 대뜸 멈춰 손을 내밀었다.
“뭐 해요. 빨리 안 오고. 도도 님네는 벌써 앞으로 갔는데.”
그리 말하는 크라이그의 표정은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리디안은 옅게 드리워진 짓궂은 미소에 큼큼거리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제게 내민 커다란 손을 흘끔거렸다.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혼란한 눈동자를 떨었다. 물론, 평소 하던 행동을 생각하면 그냥 별 뜻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덥석 잡기엔 좀 민망하니까, 자연스럽게 소매를 잡을까?’
그리 망설이는 찰나, 크라이그가 대뜸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놀란 리디안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봤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크라이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길래 얼굴이 그리 빨개요? 난 지금 급해서 빨리 가자고 재촉한 건데?”
크라이그는 얄밉게 입가를 실룩거렸다. 리디안은 어이없어 실소했다.
“진짜, 크라이그 님 되게 뻔뻔한 거 같아요.”
“내가요?”
그럴 리가요, 라며 반문하는 크라이그의 얼굴엔 의도적인 미소가 가득했다. 아, 또 당했다. 리디안은 작게 한숨 쉬었다. 그러나 그 짓궂음에 섞인 다정다감함이 싫지는 않았다.
* * *
로크바의 HP가 6% 남은 시점인지라, 랜덤 텔레포트로 흩어진 플레이어들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중앙으로 귀환했다.
크라이그에게 거의 붙들려 달려오던 리디안도 무사히 중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 어수선했다.
“어? 뭐야? 보스 피가… 왜 17%?”
리디안은 잘못 봤나 싶어 제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로크바의 피는 현재 17%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뭐야, 누가 보스한테 힐 줬어요?”
헐레벌떡 뛰어온 파피루스가 사태를 파악하곤 세인트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그에 중앙에 남아 있던 하츠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리질리언스 필드가 잠깐 풀려서요.”
필드가 풀렸다는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안티 리질리언스 필드를 담당하는 이는 다람이었기에 자연스레 모두가 그를 찾아 분주히 시선을 옮겼다.
“엇. 들켰다.”
때마침 세 시 방향 미로에서 살금살금 중앙으로 귀환한 다람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히히 웃었다.
“님들, 미안요. 아까 다굴당해서 죽고 잠깐 멘탈 나가서 깜빡했음!”
당당하고 솔직한, 심지어 상큼하기까지 한 그 고백에 플레이어들의 안면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가 나는 상황인데, 신기하게도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개중에는 너무 어이없는지, 미친 사람처럼 실소하는 이도 있었다.
대신 표현에 있어 얄짤없는 고독한이 뚜벅뚜벅 걸어가 다람의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그럼에도 모자라 발을 들어 다람을 두들겨 패는 행동에 모두가 한숨을 쉬며 고개 돌렸다.
“…그래서 남아 있던 하츠 님이 죽마저 스위칭하고 바로 필드 깔았는데, 보스 HP 틱이 너무 빨라서 잠깐 사이에 17%로 훅 오르더라고요.”
당시 하츠와 함께 남아 있던 그레이스가 자세한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리디안은 다람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는 크라이그를 목격했다. 레이드가 끝난 후 다람이 어떻게 될지 훤히 보여, 어색하게 웃었다.
작은 소란으로 막판에 크게 역전될 뻔했지만, 다람에게서 빌린 ‘죽마저’ 덕분에 하츠가 잘 대응했다. 어찌 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 라고 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바로 이어진 혼령화 패턴에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으나, 매지션들은 물론, 아쳐와 레인저까지 합심해 혼령화에 걸린 딜러들을 척살했다. 그 덕분에 마지막은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날 수 있었다.
“4%!”
대망의 시간이었다.
“서모너님들. 2% 되면 바로 군위 쓰죠.”
꽤 안달이 났는지, 조용한 도도가 드물게도 버베나와 독재를 향해 먼저 제안했다.
군주를 위한 희생. 서모너의 소환수 자폭 스펠로, 최후의 순간 폭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공격이었다.
레기온의 독재는 공격력이 그리 높지 않아, 잘 쓰지 않지만, 아이템 세팅으로 남다른 공격력을 가진 버베나와 도도가 사용하면 대단히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그것만을 기다렸다며, 타 플레이어들이 기대감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눈치 빠른 버베나와 독재는 도도의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서로간의 눈짓이 오가자, 서모너 셋은 소환할 수 있는 모든 소환수를 뽑아 보스에게 붙였다. 더 빠른 처리를 위해 나머지 딜러들도 모든 쿨타임을 짜내어 스펠과 스킬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2%가 된 찰나.
“군주를 위한 희생!”
약속이라도 한 듯, 세 명의 서모너가 동시에 스펠을 외웠다. 로크바에게 다닥다닥 달라붙은 투명한 소환수들은 눈부신 빛을 뿜으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펑펑 울리는 시원한 사운드에 리디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이지 언제 봐도 속 시원한 광경이었다.
“0%!”
로크바의 HP 게이지가 완전히 분필이 된 것을 확인한 플레이어들이 환호하며 슬그머니 물러나기 시작했다. 리디안 역시 반사적으로 스펠을 멈춘 채 멍하니 로크바를 바라봤다.
HP가 모두 소진한 시점에서 로크바는 몸을 뒤틀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꺼림칙한 비명을 터트리던 로크바는 갈망하듯 허공으로 손을 뻗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단순한 사망 연출이라지만 몹시도 생동감 넘치는, 정말이지 극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로크바의 전신이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굳어가듯 가늘게 금이 퍼지던 로크바의 몸은 발밑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바스스 흩날렸다.
리디안은 사라져 가는 로크바를 넋 놓고 쳐다봤다.
[혼을 부리는 마법사가 사망했습니다.] [일격필살 을 입수했습니다.] [여신의 영역 을 입수했습니다.] [단죄의 단도 를 입수했습니다.] [오른쪽 눈 을 입수했습니다.] [우르의 주목나무 활 을 입수했습니다.] [경험치가 275,550 올랐습니다.] [1,576,400 골드를 입수했습니다.] [퀘스트 알림] [오른쪽 눈 을 입수했습니다.] [오른쪽 눈 1 / 1] [퀘스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미미르를 찾아가세요.] [이벤트 스테이지 해금 조건, 다섯 번째 항목을 완료하였습니다.] [조건 보상으로 이벤트 보스 몬스터의 기운이 일부 약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