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박회장의 추측에 여기저기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리디안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 숙였다.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했어도 가라앉은 분위기에 마음이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생각을 바꾸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니까, 그동안의 변수도 이 상황에 딱 맞아 떨어지네요. 아까 크라이그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라서 새로운 규칙이 적용된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규칙이 바뀔 수도 있다는 추측도…….”
“아… 정말……. 우리끼리 유치하게 싸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네요.”
이트, 대장군이 차례대로 말했다. 그에 길어진 침묵 속에 잠자코 턱을 매만지던 샤봉이 얼굴을 실룩였다.
“근데 이거,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있던 게임 세계가 이쪽 세계를 침략, 혹은 침식하고 있다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반대일 수도 있죠. 아니면 또 다른 경우거나.”
풍월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샤봉은 그 또 다른 경우가 뭐냐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사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조용해진 제니스가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바라봤다.
“뭐야. 다들, 여기가 진짜 다른 세상이라고 믿는 거예요?”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어조였다.
풍월주는 아예 몸을 돌려, 턱을 괸 채 제니스를 향해 톡 쐈다.
“아니, 여태 뭘 들었어요? 그리고 확실하다는 게 아니고, 지금은 그냥 추측이에요. 근데 정황상 진짜 그럴 가능성이 커서 문제인 거고.”
“여태 아무 말 없다가 인제 와서 갑자기. 이런 일을 받아들이는 건데. 다들 너무 태연한 거 아니에요?”
별난 사람 보는 제니스의 태도에 풍월주가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럼 우리가 애들처럼 소리 지르고 비명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라도 치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도 신사 님처럼 진작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에요. 근데 뭐, 제니스 님 말대로 너무 게임 시스템이 뚜렷하니까. 대놓고 말 못 한 거고. 다른 사람들도 아무 말 하지 않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그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쩐지 다들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분위기에 제니스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들어갔다. 단숨에 표정을 일그러트린 제니스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모두를 바라봤다.
“그럼… 여기가 다른 세상이라면, 왜 갇힌 건데요? 대체 누가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건데요? 우리,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건 맞아요?”
겁먹은 질문에 공기가 수축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제니스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누가, 왜― 라는 의문에 대해선 다들 머릿속으로 또 다른 추측만 할 뿐, 섣불리 입 밖으로 꺼냈다간 이 상황에서 혼란만 가중될 게 뻔해 말을 아꼈다.
“뭐야. 왜 다들 아무 말도 못 해요? 그럼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 건데요?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해? 죽을 때까지? 그러면 여기서 죽으면 또 어떻게 되는 건데?”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한동안 잊고 있던 주제가 터져 나오자 다시금 불안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백검이 그토록 우려하던 문제였다. 앞서 예측한 대로 죽음이라는 단어에 몇몇 플레이어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에 아차, 싶은지. 다들 사색이 되어 각자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네오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진짜 우리 죽는 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백 번 맞는 말씀입니다. 정말 게임이 아니라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여태 아무 생각 없던 나도 덜컥 섬뜩해지는데…….”
혼란스럽고 집중하지 못했던 아까와는 달리,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장 털털하고 아저씨 같은 무너스키가 약한 모습을 보이니, 주변 사람들도 쉽게 동화되어 불안감을 엿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제일 많이 죽은 사람 누구지? 다들 제대로 카운트하고 있나?”
“설마 페널티 다 까면 못 돌아가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아,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무섭단 말이야.”
“여기가 진짜 다른 세상이면 우리 몸도 반 정도는 진짜라는 건데. 아무리 겉으로 수치만 깎인다 해도 죽음이 영향 없을 리 없죠.”
“조만간 죽는 거, 조심하라고 전체 공지해야겠는데요? 아, 우리 길드 분들 어쩌지?”
“그러면 사람들이 왜, 라고 물을 텐데. 그땐 어떻게 대처해요? 이 얘기 당분간 비밀로 하라면서요. 이거 알려지면 다들 기절초풍에 난리가 날 텐데?”
“일단 최대한 입조심하고,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야죠.”
“애초부터 좀 신중했어야 했어요. 근데 전투 길드에서 초반에 별거 아닌 듯이 받아들이고 맵 활동 장려했잖아요. 솔직히 지금 다들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거, 저는 전투 길드 책임이 크다고 봐요.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었대도, 너무 섣불리 선동했어요.”
마리타가 슬쩍 전투 길드 간부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잘 나가다가 갑작스레 책임을 묻는 언급에 다들 눈매를 찌푸렸다.
하지만 깊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백검 역시 마음에 걸리던 문제였고 분명 누군가에게서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당시의 공표에 크게 관여했던 마제스티, 레온은 불편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생각 없이 무책임하게 공론화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사망 페널티 최대치에 따른 결과가 확실시되지 않은 시점이라, 길드 마스터들 역시 변수를 우려해 크게 걱정하던 문제였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활동에 있어 사망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죽음을 두려워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게 당시 두 길드 마스터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래서 모든 길드 마스터들에게 철저한 길드원 관리를 요청했고, 본인들의 길드 역시 최대한 꼼꼼하게 관리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최악의 상황이 화두에 올랐고 안일하게 여기던 사망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ONE과 레기온. 전투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만큼, 길드원들의 사망 횟수도 많다. 언제가 되든 공표된다면, 필드 활동을 장려했던 두 사람은 죄인이 되는 셈이다.
그러잖아도 죄스러운 입장인데, 마리타가 상처를 후벼 파고 있으니 두 길드 마스터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에 열받은 신사가 입술을 실룩이며 한 소리 하려던 순간, 풍월주가 먼저 코웃음 치며 한 소리 했다.
“그러니까 전투 길드가 죽을죄를 지었다?”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초반에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한 게 아니냐 싶은 거죠.”
“내 기억으로는 초반 랭커 회의 때 마리타 님도 페널티 오픈 관련해서 길마 자격으로 와서 투표한 거로 아는데요? HP, MP 50씩 닳는 거. 그 정도는 괜찮으니까 오픈하자, 라는 쪽으로.”
“그, 그땐 아무것도 몰랐잖아요! 알았으면 진작 반대했을 거라고요!”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모습에 마제스티가 그만하라며 핀잔했다. 보는 눈을 의식해 둘 다 말을 멈추긴 했으나 분위기는 이미 파탄 난 뒤였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퀴나스가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키듯 마무리했다.
“아무튼, 당분간 맵 활동은… 좀 자제해야 할 듯하네요. 길드 내 사망 카운트도 다시 확인해서 철저히 관리해야 할 것 같고요.”
전투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이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마제스티가 레온을 바라봤다. 그간 발언권을 양보하고 조용히 듣고 있던 레온은 진정성 있는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여러분. 간곡히 요청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처음부터 우리가 솔선수범한 만큼. 그간 안일하게 생각했던 만큼. 이런 사태에도 우리가 먼저 경각심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태를 더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봐야 하며, 동시에 새로운 현실을… 어쩌면 낯선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싫어하는 레온의 발언에도 핑크푸크와 아퀴나스, 무너스키, 네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태가 위급한 만큼, 공사를 구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침묵은 긍정에 가까웠기에 리디안은 속으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당분간은 서로 싸울 일 없이 단서를 찾는 일에 협조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절망스러운 분위기라는 건 여전했다. 결국, 겁먹은 제니스가 먼저 울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충격에 여태 조용하던 군황과 채이의 표정도 비슷하면 비슷했지. 덜하진 않았다.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았기에, 마제스티가 수습차 서둘러 끼어들었다.
“다들 혼란스러우신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모르는 것들, 혹은 이쪽 세상에 대해. 우선적으로 알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추측대로, 정말 여기가 다른 세상이 맞는지. 어쩌면 이쪽 세상의 존재일지 모르는 ‘미미르’한테 직접 확인하려고요. 장비를 챙겨 오라는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리디안 님께 호의적이었다곤 해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서요.”
미지의 존재와의 전투 가능성. 그에 장내가 술렁였다.
사방에서 불안한 눈빛이 왔다 갔다 했다. 바로 조금 전, 죽는 문제에 관해 얘기했던 탓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그곳에서 전투가 일어날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사망을 염두에 둬야 했으니 말이다.
“아, 어쩌지. 사망 페널티 때문에 되게 찝찝한데.”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잖아요. 괜히 저쪽 연합만 보내기도 그렇고.”
“그 미미르라는 NPC가 우리를 공격하면…….”
“만약 거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부활 안 되거나 살아나지 않거나. 뭐, 그러진 않겠죠?”
계속해서 불안한 대화만 오갔다. 더 앉아 있다간 절망적인 말만 길어질 것이기에 마제스티가 서둘러 말을 꺼냈다.
“30분 내로 회의를 정리하고 미미르의 샘으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미미르라는 존재에 대해 저희도 정확히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저 추측만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10분만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서 확인하실 분들만 자리에 남아 주세요.”
적막과 함께 불안한 눈빛이 오갔다.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을 존중하기 위해 마제스티와 레온 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기다렸다. 그 침묵을 뚫고 제니스가 먼저 벌떡 일어섰다.
“난 안 가요! 이런 건 전투 길드가 알아서 하세요!”
무책임한 말을 끝으로 제니스는 거칠게 주점을 나섰다.
뭐,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나 몰라라 전투 길드에게 떠넘기는 듯한 행위는 보기 불편했다. 그 모습에 마제스티가 눈살을 찌푸려 기분 나쁜 감정을 드러냈다.
한참 후, 서로 눈짓을 나누던 군황과 채이가 동시에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도저히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제 레이드 관련해서 반대의 뜻을 보이긴 했지만… 분위기가 이런 만큼 지금 추측이 확실해진다면 더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미미르의 샘에는 양측이 함께 가실 테니, 앞으로 어떤 결정이 나와도… 저희는 그냥 연합분들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일이 터져도 자신들은 맞설 힘이 없다며, 군황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였다. 어제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공격적으로 대꾸하기 바빴던 채이도 마찬가지였다.
하라, 마라 이것저것 따지고 훈수 둘 상황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인지. 아니면 다가온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채이 역시 초점 없는 눈으로 터덜터덜 군황을 따라 나갔다.
그 뒤로 플레이어 몇 명이 일어섰다, 앉기를 반복했다. 짧은 시간 동안 주점 내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후.
눈꽃동산 주점에는 최종 결단을 내린 이들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