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3
33화
내심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 떨어졌다. 동생을 상대로 호들갑을 떨기도 뭐해서 말을 아끼고 있던 찰나였다. 기회가 오자 눈을 반짝인 리디안은 조심스럽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어제 길드 레이드에 관한 얘기를 꺼낼 때, 리디안의 눈은 아이처럼 반짝였다.
턱을 괸 채 경청하던 헤른은 흐뭇하게 웃었다. 누구의 극성에 반강제적이긴 했어도, 역시 리디안이 레기온에 납치된 건 결정적으로 좋은 일이었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헤른은 자신의 친구 ‘페이지’를 떠올리며 욕지거리를 삼켰다. 평판이 어떻고 내부 사정이 어떤 길드인지 미리 귀띔해 줬으면 프리피케에 가입하지 않을 선택지라도 주어졌을 테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길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들 개성이 독특해서 그렇지. 사람 자체는 착했으니까. 그저 은인이나 다름없던 리디안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사실, 이곳에 갇힌 초기에 ‘페이지’와 얘기하던 중, 리디안과 함께 프리피케에 가입할 생각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세인트 리디안의 성향을 아는 페이지가 그분은 아마 우리랑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하는 바람에 무산됐었다.
처음엔 그저 페이지가 나이 많은 누나라 싫어해서 돌려 말했나 싶었는데, 가입하고 길드의 전반적 분위기를 보니 이해가 됐다.
프리피케는 리디안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길드였다.
생각보다 다들 착하다곤 해도, 개인주의에 PVP 성향이 더 강해 가족 같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어도 헤른 역시 친구인 페이지가 아니었으면 쉽게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을 거다. 리디안을 함부로 데려가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에고, 이만 가야겠어요.”
한참이 지나 슬쩍 주위를 바라보던 헤른이 자신의 자리를 정리했다. 리디안은 벌써 가냐며 아쉽게 바라봤다. 헤른은 거리를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은 주변 시선이 좀 그렇잖아요. 괜히 누나까지 이미지 나빠지면 안 되니까요.”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여기서 피케이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냥 오해할까 봐요. 전투 길드 마크 달고 있는 누나한테 괜한 오해 생기면 레기온한테도 이미지 안 좋고.”
“좀 그렇죠?” 하고 헤른이 예쁘게 웃었다. 리디안은 그 배려에 쓰게 웃었다.
뭘 우려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 벌써 헤어지기엔 아쉬운 감이 있었다.
“그럼 그냥 차라리 우리 집 가서 얘기할래? 나 그날 바로 집 샀잖아. 저기 12번 스트리트에…….”
자리를 정리하던 헤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헤른은 충격적인 눈으로 대꾸했다.
“헐. 누나. 그거 라면 먹고 갈래, 급인데요.”
괴상하게 구겨진 헤른의 표정에 리디안은 되레 당황했다. 크게 흔들리던 시선이 민망하여 바닥으로 향하는 순간, 헤른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진짜. 그런 말은 페페 님한테 해야죠.”
“여, 여기서 페페 님이 왜 나와?”
갑작스레 터져 나온 이름에 리디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헤른은 그 순수한 반응이 재미있어 죽겠다며 숨을 꺽꺽 참았다.
“아! 아무튼, 그때 이후로 어떻게 됐어요? 페페 님 아직도 응급실?”
패페님의 근황 말이지……. 순식간에 퀭해진 리디안은 작게 한숨 쉬었다.
“페페 님도 여기저기서 권유받은 눈치더라. 그때 잠깐 얘기하기로도 거의 마음 굳히신 것 같았어. 그 이후로는 못 만나 봤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
“그냥 누나가 먼저 레기온으로 꼬시지 그랬어요? 누나가 작정하고 꼬시면 페페 님 넘어갈 거 같았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남자의 감?”
“뭐야, 그게.”
“에이, 속으로는 좋으면서. 미리미리 꼬셔보지 그랬어요. 난 페페 님이라면 찬성.”
마치 아빠 같은 말투에 리디안은 어이없어 웃었다. “네가 우리 부모님이야?”하고 물으니 헤른은 어깨를 으쓱했다. “초기 보호자라고 할까요?”
그 뒤로도 실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헤른이 아쉽다는 듯 푸념했다.
“아무튼, 아깝게 됐네요. 그나저나 페페 님 갈 곳이면 거기밖에 없지. 워낙 탑급이니 당연하기도 하고.”
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입 밖에 직접 내뱉을 수 없어 리디안은 옅은 웃음으로 반응했다. 헤른은 쓸데없이 캐묻지 않았고, 빨리 가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짜 이제 가볼게요. 괴자 누님이랑 오토 형님 나들이에 잠깐 따라 나온 거고, 사실, 길마님이랑 또 사냥 가야 해서요. 1분이라도 늦으면 잔소리가 어후……. 그러니까 누나, 남은 자유 시간 알차게 보내시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땐 니플헤임 꼭 놀러 오세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다음에 또 보자.”
헤른은 손을 흔들며 게이트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리디안은 헤른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아무래도 헤른은 길드 이미지 때문에 불편하고 미안했던 모양이다. 하여간 착해빠져서. 싱겁게 웃은 리디안도 그제야 발길을 돌렸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유로웠다. 딱히 서둘러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리디안은 거리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제 제법 훈기가 도는 거리의 모습도 썩 나쁘지 않았다. 파리만 날리던 NPC 상점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반응이 꽤 긍정적으로 변한 탓이었다.
최소한의 대화만이 가능한 NPC는 플레이어에게 있어 여전히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다. NPC는 무슨 말을 걸어도 생글생글 웃으며 정해진 대답, 행동만을 반복할 뿐이었으니까.
기계적인 모습.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 그리고 게임사의 상징적인 존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의혹과 불신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초기에는 현 상황에 대한 불만을 표하려 일부러 NPC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이나 소소한 화풀이를 하는 플레이어도 많았다. 다 부질없는 짓임을 알고 대부분 소득 없이 물러났지만, 아직도 종종 NPC 근처를 배회하며 의미 없이 보복하는 플레이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NPC가 취급했다. 특히 리디안처럼 집을 구매해 터전을 만든 플레이어라면 NPC 상점 이용은 필수였다.
플레이어들끼리 거래가 가능한 거래소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은 품목 한계가 있었고, 필드에서 드롭되는 아이템은 전투에 쓰이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음식의 경우 플레이어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노르드 월드에서 음식은 오롯이 NPC의 영역이었다. 보조 직업 중 요리사가 있어, 초반에 이런저런 말이 많았으나. 보조 직업 요리사는 그 ‘요리’의 개념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는 음식 제조에 일체 관여할 수 없었고, 공복의 상황에서는 무조건 NPC에게 의존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원치 않아도 NPC 상점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다.
“아, 저기 들려야겠다.”
리디안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음료를 취급하는 상점이었다. 굳이 현실의 것으로 비유하자면 카페라고 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에 있는 데다, 오다가다 몇 번 이용했을 때, 그럭저럭 맛이 괜찮았던 곳이었다.
리디안은 자연스럽게 오렌지 주스 세 잔을 주문했다.
이곳에서는 음식의 유통기한 개념이 없어 두 잔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고, 한 잔은 이곳에서 마시고 갈 생각이었다.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 리디안은 활짝 열린 창가에 앉았다. 이왕 밖에 나온 김에 분위기를 즐길 참이었다. 마침 가게 앞으로 작은 천이 흐르고 있어 바라보는 경치도 제법 그럴싸했다.
이 천은 미드가르드 중심가 주위로 흐르고 있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노르드 청계천으로 불렸다. 비현실적인 풍경만 아니면 진짜 청계천 근처의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금쯤 그곳도 가을일 테니 풍경이 제법…….’
이런, 쓸데없는 현실 생각. 리디안은 부르르 고개를 털었다. 당장 돌아가지도 못하는 현실 생각해서 무엇 하나 싶다. 더 우울해지기만 할 뿐, 정신력 낭비다. 그보다는 다가올 겨울 침공 이벤트에 대해 알아보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원래 세계로 귀환하는 힌트에 가까운 이벤트이니만큼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말이다.
‘길마님이나 간부들은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간부인 이노센트에게 나중에 살짝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창가에 앉은 리디안 옆으로 몇몇의 플레이어들이 지나갔다. 이제 막 나가는 모양이었다. 리디안은 제각각 개성을 가진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신기하여 쳐다봤다.
특히 그중에 민머리 플레이어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플레이어 정보
이름 : 호드라 / 길드 : ANG(M)
레벨 : 76 / 직업 : 워로드 / 보조 직업 : 연금술사
HP : 2980 / MP : 1000
리디안은 아, 하고 낮게 탄성했다. ANG은 친목 길드인데, 콘셉트 플레이로 유명한 음지 길드였다.
정말 부끄럽게도, 리디안은 ANG 길드에게 가입을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우리와 함께 어울리지 않겠냐며 윙크하던 그 사람.
그 ‘호드라’가 눈앞에 있었다.
“와, 그냥 콘셉트인 줄 알았는데. 길마분은 진심이었나 보네.”
스킨헤드에 근육으로 우락부락한 덩치, 징이 박힌 독특한 가죽 패션. 그리고 찢어진 민소매의 정교함까지……. 일반인이 평범하게 하고 다닐 패션은 아니었다. 저 정도면 누가 봐도 특정 취향으로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유쾌한 성격이라 여기서도 그저 콘셉트일 수 있겠다.
리디안은 왠지 어마어마한 것을 본 기분이었다. 흘긋 바라본 동행 플레이어들도 같은 ANG 길드원이었다.
지금이야 호드라에 비하면 멀쩡한 패션이지만……. 그들 역시 게임 시절 레슬링 룩, 발레 룩, 여장 룩, 앞치마 룩 등등. 온갖 괴상한 룩을 하고 다녀 나름 컨셉충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이었다.
길드원끼리 놀러 왔나 보다, 라고 생각한 리디안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 돌릴 무렵, 우연찮게 고개 돌린 호드라와 눈이 마주쳤다.
리디안은 잠시 덜컥 굳었다.
생각해 보니, 호드라는 게임 시절 종종 리디안에게 다가와 온갖 드립을 날리며 온몸으로 친해지고 싶음을 표현하던 플레이어였다. 서로의 정보 창이 보이는 거리라, 그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게임 때는 그냥 웃고 넘겼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자신보다 한참 연배 높은 상대고, 전투 길드 마크를 달고 매너 없이 굴 수 없어 리디안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 숙였다.
안녕하세요, 라는 느낌으로 고개 숙였을 뿐인데, 기이하게도 헉, 이라고. 상대방의 입 모양과 표정이 왠지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무안한 리디안은 땀을 뻘뻘 흘렸고, 빤히 쳐다보던 호드라는 번개처럼 달려왔다. 왜 그러냐는 길드원들의 부름이 이어졌고, 리디안은 사람들의 시선에 자연스레 주목받게 되었다.
“리, 리디안 님!”
놀란 목소리로 말한 호드라는 연신 안면 근육을 떨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리디안의 머릿속으로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상처받으신 걸까? 건방지게 길드 가입을 거절한 게 괘씸했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호드라는 울상을 지으며 대뜸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네……?”
놀란 리디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직됐다. “왜 그러세요?” 불안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바라보니 호드라는 몹시도 미안한 안색이었다.
“여성분인 줄 모르고 제가 게임에서 너무 실수를…….”
제 입으로 말하기 차마 부끄러워, 호드라는 푹 고개 숙였다. 암만 콘셉트질이었어도 게임상에서 리디안을 향해 ‘헤이, 게이! 우리 길드로 와!’하고 노래를 불렀으니 오죽할까?
심지어, 한 번은 길드원들을 여럿 데려가 리디안 앞에서 단체로 엉덩이춤을 춘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리디안이 점잖게 웃으며 자리를 피하던 것에 더 오기가 생겨 스토커처럼 따라다니기도 했었다.
호드라는 창백해진 얼굴로 죄스러운 눈동자를 떨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진짜 남자에게 했어도 기분 나쁜 상황인데, 끽해야 20대 초반에 불과한 어린 여자에게 했으니……. 빼도 박도 못할, 명백한 성희롱이었다.
아바타로 활동할 땐 별 죄의식이 없었는데, 현실 모습이 되고 사람들을 마주하니 심히 부끄러워 선뜻 그때처럼 행동하지도 못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이겠지만, 당연히 저희랑 같은 콘…셉트의 남자분이신 줄 알고…….”
과도하게 굽신거리는 호드라의 모습에 리디안은 그 뜻을 이해하고 뒷목을 붙잡았다. 다시금 제 흑역사가 생생해졌다.
재작년 여름 한정 패키지에 포함되어 나왔던 ‘피서지 멋쟁이의 깜찍 수영복 팬츠’는 소량의 캐시로 염색이 가능했고 무늬 선택도 가능했기에 보자마자 한눈에 꽂혀 구매했던 아바타였다.
왜 다들 그 패션을 가지고 ANG 길드랑 엮는 거지? 그 정도면 충분히 일반적인 패션 아니었나?
문제는 핑크색의 수영복이 아니라, 거구의 체격에서 비롯된 여러 부조화지만, 그걸 모르는 리디안은 짐짓 심각하게 갸웃했다.
일단은 이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리디안은 고개부터 숙였다. 그리고 정중하게 답변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의사 표현도 제대로 안 했고, 특이하게 옷을 입어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죠…….”
더 집중되는 시선에 창피해진 리디안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호드라의 길드원들도 전적이 있어 황급히 달려와 고개 숙이고 있었다. 졸지에 ANG 길드원들에게 포위된 리디안은 울고 싶어졌다. 리디안으로선 도저히 이 사태를 수습할 재간이 없었다.
“저, 진짜 죄송한데……. 제가 지금 너무 부끄러워서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냥 가주시면 안 될까요……?”
울기 직전인 리디안의 표정에 호드라가 크게 당황했다. 사과하려 했는데, 또 수치스럽게 만든 모양이다.
호드라는 연신 굽신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함에 다급히 길드원들의 등을 떠밀던 그가 잠시 멈췄다.
길드원을 먼저 밖으로 내보낸 호드라는 다시 되돌아와 리디안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근데 친구 추가해도 될까요?”
“…네?”
리디안은 또 한 번 얼이 빠져야 했다.
“갑자기 왜요……?”
반사적으로 내뱉은 순간, 리디안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닫곤 급히 입을 가렸다. 다행히 호드라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다만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전부터 리디안 님이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그때는 솔직히 룩 취향이 같아 보이고, 저랑 말이 잘 통할 것 같아서…….”
“아…….”
“앗, 그렇다고 진짜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물론, 되어 주시면 저야 좋겠지만… 또 그동안 죄송했던 것도 있고, 혹시라도 나중에 제가 도울 수 있으면…….”
약간 횡설수설했지만, 나쁜 의도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계속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 숙이는 호드라의 모습에 리디안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을 해주는데, 야박하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게임 때 ANG 길드 사람들이 와서 깐족거릴 때마다 웃기기도 했고……. 속으로 재미있어하며 방관했으니 자신도 잘한 건 없었다. 그랬기에 리디안은 큼큼 헛기침하며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감사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친구 추가가 완료되자 호드라는 연신 굽신거리며 상점을 떠났다.
남은 시선과 부끄러움은 리디안의 몫이었다. 그대로 삐걱삐걱 앉아 푹 고개 숙였지만, 몇 안 되는 손님들에게서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존재감 확실한 ANG 길드와 엮인 것이 몹시 흥미진진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몇몇 플레이어의 모습에 리디안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안 되겠다, 도망쳐야겠어. 결단한 리디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도 마시지 못한 오렌지 주스가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창피한 것보다는 낫지. 음료값이야 주문 때 미리 지불했기에, 서둘러 잔을 NPC에게 갖다 주곤 리디안은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그 상점 앞을 지나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