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73
73화
【고목나무 전쟁】
베르단디, 스쿨드, 우르드. 통칭 노른 세 자매는 초보 플레이어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가이드 역할의 NPC였다.
그녀들이 머무는 곳은 ‘세계수 위그드라실’이라는 특수 맵으로 중앙 게이트를 통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그러나 저레벨 구간에서나 잠깐 수행하는 메인 퀘스트와 고목나무 꽃의 교환 퀘스트가 아니면 딱히 찾아갈 이유가 없다.
맵의 핵심 표현이나 다름없는 세계수 역시 세계관 설명에 짧게 상징성만 언급될 뿐, 특별한 역할이 없으며 플레이어들에게도 관계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단순한 오브젝트에 불과했다.
위그드라실 맵은 보통 ‘노른 방’으로 불리며, 화려한 디자인과 여유로운 공간 덕분에 친목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소꿉놀이용 놀이터로 쓰이곤 했다.
한창때의 피크 시간대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곳에서 정답게 수다를 떠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외톨이 솔플러였던 리디안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리디안이 ‘노른 방’에 찾아왔을 때도 초보들을 도우려던 목적이라, 그들의 퀘스트가 끝나길 멍하니 기다렸을 뿐. 항상 굵은 뿌리로 가득한 아랫부분만 생각 없이 봐왔기에, 리디안은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상층부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꼭대기까지 자세히 보는 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고목나무 왕도 상당한 거목이었지만, 세계수 위그드라실은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빌딩 몇 개를 합쳐 놓은 듯한 둘레에, 키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게 높았다. 거기에 나뭇가지며 잎은 또 어찌나 무성한지, 나무 기둥이 하나의 산을 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임 때는 별 감흥 없었는데, 전체적인 모습을 올려다본 탓인지 실감이 날 정도로 장엄한 풍경에 리디안은 연신 감탄사만 뱉었다.
“와, 무생숲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는데, 여긴 뭔가 더… 되게 사실적으로 느껴져요. 진짜 살아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반사적으로 중얼거린 리디안은 아차, 했다. 크라이그가 그에 동조해 줄 만큼 감성적이 아니라는 걸 몇 번 겪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크라이그는 “그래요?” 하며 공감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리디안은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가끔 게임인지 현실인지 유난히 더, 구분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여기가 딱 그런 느낌이에요.”
쉬운 비유에 크라이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 느낌이라면 알 것 같다며 말이다.
“요즘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좀 많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에는 여기가 어디냐에 대한 논쟁도 꽤 나오는 편이고.”
현실이냐, 게임이냐. 8월 이후부터 꾸준히 들려오며 끝나지 않은 논쟁이라 리디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이그 님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저는 아직 어느 쪽에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담담히 대답한 크라이그가 리디안을 바라봤다. “리디안 님은 어떤데요?” 되물음에 리디안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다시 세계수를 올려다봤다.
“음… 저도 그동안은 최대한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생각하려 했는데,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체류 기간이 길어져서 그런가, 점점 경계가 모호해져서……. 요즘은 구분을 잘 못 하겠어요.”
점점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뒷말에 크라이그도 조금 동의하는 눈치였다.
“사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몸은 그냥 데이터일 뿐인데 오감, 통각 기능이 활성화된 것 때문에 실제 몸이라는 착각이 드는 거죠. 그런 데다 적응 기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혼란스러워지는 건 당연해요.”
“…반대로 비현실적으로 생각하면요?”
“초반에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저도 지금은 100% 부정은 못 하겠어요. 아무리 현실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기술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꽤 있으니까요.”
생각이 깊어지는 주제였다. 이 주제라면 이야기가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하게 길어지기에 크라이그가 마무리 짓듯 한 방향을 향해 손짓했다.
“일단 교환부터 하죠.”
손짓을 따라 시선을 움직인 리디안이 낮게 탄성했다.
거대한 나무 기둥 중간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나있고 군데군데 테라스가 존재했는데, 유난히 화려한 테라스에 여자 세 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은 모두 은발이었고 마네킹처럼 테이블을 두고 얌전히 앉아 있는 상태였다.
계단을 찾아 노른 세 자매가 있는 플로어에 도달한 두 사람은 테라스 입구에서 잠시 멈칫했다. 여타 NPC답게 세 자매는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말을 걸려면 일정 범위 내에 있어야 했기에 크라이그는 찜찜한 표정으로 성큼 내디뎠다. 쪼르르 그 뒤를 쫓은 리디안은 흘끔 세 자매를 살폈다.
10대 소녀의 모습의 그녀들은 쌍둥이 설정인지, 세 명 모두 얼굴이 똑같았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똑같아 다른 건 머리카락 색의 미묘한 차이뿐이었다.
리디안은 그 모습이 신기해 중얼거렸다.
“그래도 구분 표시인지, 머리색이 각자 다르네요?”
“…다르다고요?”
갸웃하는 크라이그의 모습에 리디안이 하나씩 검지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잘 봐요. 저쪽은 청색빛, 이쪽은 보랏빛, 저쪽은 노란빛이잖아요.”
미간을 좁힌 크라이그가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머리 주위로 물음표가 뜨는 듯했다.
“그냥 다 같은 은색 아닌가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에 리디안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흠. 재료 교환은 되는데, 텍스트는 오류 메시지로 뜨네요.”
잠시 후, 베르단디의 이름을 가진 NPC와 대화를 마친 크라이그가 그리 중얼거렸다. 오류라는 말에 흥미를 느낀 리디안도 베르단디에게 접근해 봤다.
[노른 세 자매는 현재…….] [*%*&#&@^&%$@^$@%!*] [Not Found]음성도 출력되지 않은 채, 이상한 텍스트 메시지가 떴다. 노르드 월드에서 정말 보기 힘든 오류였다. 아니, 거의 처음 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른 자매인 스쿨드와 우르드 역시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교환이라 고목나무 꽃도 원래 사라져야 하는데, 계속 인벤에 남아 있네요. 버그인가 봐요.”
그에 리디안이 눈을 반짝였다.
“재사용은 안 돼요?”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 없죠.”
이미 시도해 봤다며, 사용 불가라고 대꾸한 크라이그는 리디안에게 고목나무 꽃을 건넸다. 내민 꽃에 갸웃했지만, 리디안은 금세 의도를 이해하곤 꽃을 소유한 채 베르단디에게 말을 걸었다.
[사용 불가 아이템입니다.]베르단디의 텍스트가 아닌, 시스템 알림 창이었다. 살짝 기대했던 리디안은 작게 한숨 쉬었다. 잘하면 네르투스 상자를 무한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그 티 나도록 시무룩한 표정에 크라이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진짜 될 줄 알았어요?”
“뭐… 사람 마음이라는 게 좀 그렇잖아요.”
“일단 재료는 정상적으로 들어왔으니 돌아가요. 도훈이가 아지트에서 기다릴 거예요.”
그새 테세우스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모양이다. 리디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이 끝나 돌아서던 때, 계단 위 나무 위로 무언가 움직였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상단을 바라봤다. 올려다본 그곳엔 기둥을 칭칭 감고 자란 넝쿨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생명체가 하나 있었다.
뽀송뽀송한 하얀 털, 풍성한 꼬리와 새카만 눈, 부푼 볼과 앙증맞은 앞니. 크기는 비정상적이지만 생김새 자체는 익숙한 동물의 모습이었다.
“다람쥐?”
“유동 NPC?”
리디안과 크라이그가 동시에 내뱉었다. 찌푸린 채 갸웃거리는 크라이그와는 달리, 리디안은 어린아이만 한 크기에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NPC의 모습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유동 NPC인지, 줄기와 기둥을 능숙하게 타며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런 게 있었나? 저렇게 귀여운 NPC가 있으면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저 커다란 세계수를 활보하는 유동 NPC면 이상할 일은 아니죠.”
하긴, 그도 그렇네. 리디안은 까마득하게 높이 솟은 세계수를 바라보며 이해했다. 그사이, 다람쥐는 끽끽거리며 다가와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라타토스크]생소한 이름에도 리디안은 귀엽다며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귀여운 모습에 당연히 목소리도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흘러나온 음성은 굵직한 남성형이었다.
[돌아가라.] [너희가 찾는 여신은 없다.] [거짓된 것들이 우리의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직선으로 곧게 서있던 풍성한 꼬리가 휘익 휘어져 한 곳을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노른 세 자매였다.
그러고 보니, 노른 세 자매가 운명의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었지.
리디안은 꺼림칙하게 세 자매를 바라봤다. 그녀들은 여전히 미동 없었다. 리디안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보통 NPC끼리 적대하는 편이었나요? 도시의 인간 NPC를 제외하고, 이종족 설정을 가진 NPC들은 거의 인간을 적대하지 않았나요?”
아무리 봐도 다람쥐가 노른 세 자매를 저격하는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아, 리디안은 가느다란 눈으로 갸웃했다. 크라이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의아하다는 눈초리였다. 리디안은 지난번 일을 떠올리며 의문을 표현했다.
“원래 게임 때도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저번 서브 스토리 퀘스트 때도 그렇고. 암만 NPC여도 느낌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글쎄요. 전 스토리 쪽으로는 건드려 본 적이 없어서. 비교를 못 하겠어요.”
“누구 해본 사람 없을까요?”
크라이그는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