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75
75
9월 23일, 새해로부터 266번째의 날.
르네상스 쇼핑몰 8층이 드디어 리모델링을 끝내고 다시 재개업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 9시.
그 옛날 예배당의 건축을 의뢰한 교황 식토스 4세로부터 유래한 이름 [시스티나]라는 이름을 간판에 걸고 매장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오전 11시.
개관한지 두 시간만에 카페 시스티나는 도착한 사람들이 이곳이 놀이공원인가 착각하게 할 정도로, 인파가 바글바글 들끓고 있었다.
가장 인기있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끝도 없이 늘어진 줄을 연상케 하는 풍경 너머로 찰칵찰칵찰칵,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가 음악을 뚫고 울려퍼졌다.
카페 안쪽 강석이 그린 벽화, 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소리였다.
“(이거 사일런스! 소리가 없으니까 신기한데? 허전할 지경이야.)”
“(그러니까! 저렇게 사진을 대놓고 찍어대도 쫓겨나지 않는 것도 신기한 것 같아. 그나저나 진짜 똑같다. 바티칸에 놀러갔을 때랑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아, 아니다. 색감이 오히려 난 여기가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뭔가 더 잘 그린 것 같기도 하고···그리고 무엇보다 천장이 아니라 벽에 붙어있는데다 그림도 더 큰 것 같네.)”
“(여기가 더 마음에 든단 소리지?)”
“(맞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야.)”
한국으로 유학을 온 커플이 모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포함하여 8층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외국어가 들려왔다.
대부분이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와 이곳에 있는 가 얼마나 똑같은지 비교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물론, 외국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답게 카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한국인이었다.
“사람들이 많네요.”
카페를 둘러보던 한국인 청년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보기 좋다는 뜻 같기도 하고, 사람이 많아서 감상에 방해가 된다는 뜻처럼 들리기도 하는 모호한 말투였다.
체형에 딱 맞는 고급스러운 캐주얼 정장을 입은 채, 손목시계를 엄지와 검지로 슬쩍슬쩍 맞춘 청년은 이곳저곳을 바라보던 고개를 바로했다.
그의 정면에 일정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바리케이드가 쳐진 가 떡하니 서있었다. 카페에서 가장 명당이라고 불릴 만한 자리였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절묘하게 피해서 , 그 중에서도 인간에게 손을 뻗는 신이 너무나도 잘 보이는 위치. 커피를 마시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보인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렇죠?”
청년의 양 옆에는 같이 앉은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명은 블룸 미술관의 관장 진도욱이었고, 한 명은 블룸미술관과 협력관계이자 산강그룹이 설립한 산강문화재단 소속 이사 류정형이었다.
그 중 거의 신하와 같은 자세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던 류정형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바티칸까지 날아가서 봐야 하는 를 자동차만 이용해도 볼 수 있으니까요.”
“그건 맞죠.”
청년이 안경줄을 길게 늘어트린 류정형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바티칸에서 봤던 것보다 좋아요. 고개도 안 아프고.”
편안했다. 커피잔을 슬쩍 들어올린 청년이 웃으며 커피를 마저 들이키다 한쪽 눈썹을 슬쩍 추켜올렸다.
아이 한 명이 바리케이드를 허리를 숙여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청년이 상반신을 일으켜 아이를 쫓아가려는 순간, 옆에 서있던 경호원이 재빠르게 아이를 제지했다.
아이들의 낙서나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의 행위를 막기 위해서 정부와 건물주가 공동으로 고용한 경호업체 직원이 분명했다.
청년이 턱을 쓸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훼손되지 않게 방지 관리가 엄청 빡빡하게 보완되었다고 했던가.’
카페 곳곳에 보이는 경호인력들도 그리고 통풍이 잘 되게 돌아가고 있는 청정기도, 보존 작업을 거친 처럼 방지 관리 차원에서 들어간 것들일 터였다.
국가가 나서서 작품이 망가지는 일이 없게 관리하고, 거기에 돈을 들인다니. 청년은 상반신을 살짝 낮춰 테이블에 턱을 괸채, 벽을 바라보며 턱을 슬쩍슬쩍 움직이며 웅얼거렸다.
“이례적이네.”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그때였다.
“이례적인 작품입니다. 강석 작가님이 항상 전시권과 대여하는 형태로 작품을 빌려주신다는 관점에서 떠올릴 때···이 작품은 소유가 국가와 건물주에게 있으니 상당히 이례적이죠.”
진도욱 관장이 청년의 혼잣말을 받아쳤다. 물론 청년이 말하고자 하는 이례적임과는 다른 이유의 이례적임을 말한 것이었지만···뭐, 아무래도 상관 없지.
청년이 진도욱 관장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했답니까?”
“네?”
“강석 작가에 대해서 듣기로 자선경매나 다름없었던 이나 개인의 정신적 치유 문제로 제작한 말고는, 이득이 될 것 같은 상업적 작품은 남에게 절대 소유권을 넘기지 않지 않았습니까.”
“네···네, 그랬죠.”
실제로 이나 , 그리고 나 같은 경우에는 조사한 바에 의하면 모두 결국 소유권과 최종 결정권은 강석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근데 왜 만?
그 말에 진도욱이 설명을 부연했다.
“···음. 제가 알기로 이 가 고교벽화전이라고, 재학중인 학교에서 동아리 단위로 참여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공미술 프로젝트······. 그렇다고 굳이 를요?”
청년의 되물음에 진도욱이 입을 닫았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까지 그려줄 이유는 없었다. 고교벽화전 상금이 진도욱이 알기로는 우승해봤자 천만원이었다.
그 천만원을 혼자 가질 것도 아니었을 텐데···굳이?
정말 청년의 말처럼 굳이, 라는 반문이 따라붙는 결정이었다.
그때.
류정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그 당시 강석 작가님의 가세가 크게 기운 상태였다고 합니다.”
“기울어요?”
“네. 그리고 청화예술고등학교 벽화 동아리 담당 교사는 항상 고교벽화전에 상금을 가장 잘한 MVP에게 많이 배분해주며 사기를 독려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이번에도 그런 공약을 언급했을 것이고···”
그 다음 말은 류정형이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때 그 상금을 받기 위해 확실하게 우승과 MVP를 받고자 손에 힘을 줬다면 이런 작품이 나올만도 했다.
“흐음. 그렇군요.”
청년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완벽한 오리지널 작품인 강석의 다른 작품들 같은 것과는 궤가 다르긴 하지만, 이 역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었다.
근데 이걸 고교벽화전 우승 상금으로 끝내다니. 아쉬웠다. 청년이 눈 앞에 벽화를 눈에 새길 듯 바라봤다.
그림을 감상하는 눈동자에 류정형과 진도욱은 잠시간 가만히 청년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뗐다. 청년이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자신들도 를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남자 셋이 앉은 테이블엔 묵직한 적막이 깔렸다. 은은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이라거나 예배당에 울릴 법한 오르간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집중을 한 시점.
청년이 손바닥을 마주잡아 악수하듯 손뼉을 한 번 쳤다. 류정형과 진도욱이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좋은 인상이 웃기까지 하자 주변이 환해졌다. 봄과 가을이 절묘하게 섞인 남자의 얼굴엔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집안에서 교육을 잘 받고 자란 도련님 같은 얼굴을 한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의뢰하면서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했는데, 깔끔하게 해결이네요.”
좋네요. 좋아.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웃음을 지은 남자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남자의 이름은 박선우.
산강그룹 오너 일가의 막내 아들로, 이번 산강그룹 계열사 소속 호텔의 건축을 맡은 담당자이자 진도욱을 통해 강석에게 조형물 작업을 의뢰를 넣은 장본인이었다.
“미팅이 언제라고 했죠? 한달 뒤?”
“아, 잠시만요······으음.”
일정을 확인하던 진도욱이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움직였다. 긍정이었다.
“네. 그쯤이네요. 정확하게는 한달하고도···그러니까 10월 24일입니다.”
“10월 24일.”
박선우가 날짜를 곱씹으며 턱을 괸 손으로 제 볼을 툭툭 건드렸다. 눈동자가 한번 주변을 쓱 훑는가 싶더니, 박선우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가죠.”
“네?”
“10월 24일까지 준비하려면 촉박하겠네요.”
“네? 어, 어디를?”
시계를 바라보던 박선우가 검지로 천장을 쿡쿡 찌르듯 두세번 움직이며 말했다.
“이 건물 주인 보러요.”
* * * *
[10월 20일] [좋아요 4,563개] [미쳤어!!!!!! 헤이 가이들! 꼭 보러 와. 당장 보러와. 퍽킹크레이지지저스크라이시트아티스트예아!] [#아담의_창조 #한국 #서울 #르네상스 #카페_시스티나 #미켈란젤로 #바티칸 #천재 #강석 #벽화 #프레스코 #기쁨 #힐링 #데이트] [3시간 전] [댓글 547개 보기]햇빛이 차단된 건물 안.
인공적인 노란색과 하얀색 사이에 레몬빛 조명 아래.
인별그램을 휙휙 훑어보던 조동범이 입꼬리에 웃음을 길게 늘어트렸다.
‘오늘도 난리네. 난리야.’
카페 시스티나가 재개업을 한 지 한달도 안 된 시점. 한국은 직찍 챌린지라는 것이 열려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셀럽들이 다녀가고 있었다.
요즘은 한국 아이돌들이나 배우도 이곳에서 챌린지를 하거나 인증샷을 찍는 통에 북새통이 따로없었다.
가장 짜릿한 건···그들 모두가 이 를 직접 벽에 그려넣은 강석을 만나보고 싶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와중. 이 수제자 조동범님은 스승님의 용안을 매일 눈앞에서 영접하는 중이란 것이었다.
‘짜릿해! 늘 새로워! 늘 최고야!’
조동범이 실실 쪼개며 고개를 들었다.
끼기긱. 끼이익. 끼기기기긱.
고소작업대(테이블리프트, 일명 렌탈로 테이블이 수직으로 승강하는 장치) 위. 거의 허리를 꺾어 눕다시피한 강석이 무언가를 힘껏 끼워넣고 있었다.
강석의 주변에는 태엽으로 보이는 것들이 몇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9월 22일부터 폐건물이 열리자마자 바로 작업에 착수 한지도 이제 거의 한달 가까이가 된 시점. 손이 빠른 강석은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른 채였다.
조동범이 존경을 한껏 담아 강석을 바라보는 동안, 강석은 예전에 만들어놓았던 깃털 조형물로 천장을 가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천장을 가리고 있는 가벽에 깃털을 붙이고 있는 와중이었다.
유리돔으로 햇빛이 들어왔던 곳은 하얀 깃털들이 촘촘이 채워져 있어 마치 하얀 가벽으로 천장을 대신하는 느낌이었다.
끼긱, 끼익. 괴상한 소리와 함께 깃털을 끼워넣던 강석이 천천히 손을 떼었다.
한동안 집중으로 발했던 강석이 조명 근처에서 작업하느라 먹먹해진 눈을 따뜻한 수건으로 꾹 누르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는 테이블에 난간에 달린 스위치에 손을 대었다.
고소작업대 위에서도 위아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스위치였다. 그걸 꾹 누르자, 테이블이 천천히 내려가 천장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각지대 없이 빼곡하게 들어온 것은 하얀 깃털로 덮인 천장이었다. 정확하게 천장 전체가 덮였다기보단 유리돔으로 인해서 생긴 원의 공간이 반지름을 가르듯 채워진 것이었지만, 어쨌든 가려진 건 가려진 것이었다.
강석이 만족스럽게 그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외쳤다.
“불 좀 꺼주실래요?”
“네에! 알겠습니다! 스승님! 제자가 갑니다요!”
아래에서 조동범의 신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또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강석이 고개를 슬쩍 들자 조동범이 서둘러 스위치를 끄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불상을 조각하는 내내 찾지 않았던 것이 신경쓰였는지 이번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수발을 들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겠다고 어필하는 통에 이런 것이라도 부탁하는 중이었다.
“스승님! 지금 끄겠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조동범의 외침과 함께 텅, 텅, 텅, 오래된 건물에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둠만이 남았다.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유리돔을 가벽으로 막고 그 위를 또 깃털 조형물로 막아서 그런지 한 치의 빛남도 없이 완전한 어둠이 폐건물에 찾아오는 것이 가능했다.
빛을 상실해버린 눈으로 어둠에 적응하기도 전, 이제는 한몸과 같아진 고소작업대에서 내려와버린 강석이 어둠 속에서 무대용 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사장님.”
“네, 스승님.”
“류수헌 서기관님에게 연락좀 해주실래요?”
“······네?”
조동범이 놀라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바라봤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턱, 턱, 턱,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공간을 모두 외워버렸는지 강석은 어둠이라는 장애물이 없는 사람처럼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위험하게···! 조동범이 당황하여 본래의 의구심을 잃어버리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퍼뜩 방금 질문하려던 것이 생각나 걸음을 멈춰세웠다.
“그, 스승님···테스트도 안 해보시고요?”
방금 완성한 참이었다.
조동범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냐고 어둠 속에서 질의했다. 강석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는 순간.
칙, 칙, 치익.
성냥불 하나가 어둠을 밝혔다.
거대한 어둠 속에서 작은 불은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본인의 크기에 수십 배는 커진 성냥불이 무대계단 발코니 위에 설치된 촛대를 하나하나 밝혀갔다.
촛대가 밝아질수록 강석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유독 어둠속에서 절세의 미남이었다.
히야아.
남자도 잘생긴 남자에게는 할 말이 없어지는 법.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얼굴을 감상하는 조동범의 머리 위로 강석의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괜찮아요.”
이미 완성되었으니까.
강석의 적갈색 눈동자가 확신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불빛 속에서 와이어 하나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빗금처럼 와이어를 타고 흐르던 빛이 사라졌다.
촛대에 모든 불을 붙인 강석이 성냥을 휘둘러 훅, 하고 꺼버렸다. 상체를 일으킨 탓에 어둠 속으로 사라진 강석의 얼굴을 아쉽게 바라보는 조동범을 목소리가 재촉했다.
“어서 전화를 걸어봐요.”
“으으음네에.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후딱 이 제자가 전화를 걸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요.”
“······네? 저한테요?”
“예.”
강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동범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 * * *
주홍 노을이 아름다운 오후.
당장 좀비 사태가 터져도 그 속에 어울릴 수 있는 것 같은 몰골을 한, 이 시대의 직장인. 류수헌이 용신랜드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 ‘그, 거, 선생님께서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하시거든요.’
조동범의 전화를 받고 강석이 작업하고 있는 폐건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이제 간판도 내려 마땅한 이름이 없어 아직도 폐건물이라고 불리우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류수헌은, 입꼬리의 근육이 풀려버리고 한 사람처럼 실실 웃음을 흘려댔다.
‘내가 강석 작가님은 해내실 줄 알았지!’
나름 강석의 초창기 활동 때부터 팬이라 자부해온 류수헌은 의심한 적 없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찌든 눈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 곧 재개장도 다가오지, 강석 작가님이 참여하신다는 아트페어 일정도 있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하!’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방금은 믿었다면서 이제는 또 의심해서 죄송하다고 허공을 향해 사과를 뱉은 류수헌이 걸음을 내디뎠다.
누가 봐도 이상한 몰골이었으나 골목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익숙한 낯이라는 듯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인사를 청했다. 요즘따라 이성을 잃은 류수헌이 용신랜드 한복판에서 자주 목격이 되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서기관님! 안녕하세요.”
“네에. 안녕하세요.”
검은 기운이 자욱한 류수헌의 눈가가 반달처럼 접혔다 펴졌다 접혔다 펴졌다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제 코를 타고 혈관을 쑤시는 커피 냄새에 이끌려 모기처럼 빨대를 흡하고 빨아대었다.
중독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살자고 마신 것에 이것 없이는 못 살게 되어버리다니. 이 얼마나 슬프고 잔혹한 일인가.
쪼옥쪼옥, 모기가 피를 흡입하는 것처럼 아메리카노를 긴급 수혈한 류수헌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자꾸만 신이 났다.
그렇게 신이 나서 걸음을 내디딘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폐건물 앞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지?’
오라고 했으니까 들어가야겠지.
“실례합니다아.”
점보 커피를 보물처럼 품에 안은 류수헌이 잘 맞물려 닫힌 폐건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둠이었다. 응? 전기가 나갔나?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무대계단 위에 촛대에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작은 불빛에 이끌리듯 류수헌의 고개가 돌아가는 그때.
ㅡ 그대. 계단을 올라오시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처럼 깊고, 늙은 목소리.
조동범이었다.
“조동범씨? 여기서 뭘?”
ㅡ 그대. 계단을 올라오시오.
류수헌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텅빈 공간이라 울리는 탓인지, 목소리가 동굴처럼 깊고 낮아서인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지?’
류수헌의 뇌리로 그때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 ‘이 건물을 작품으로 만들 겁니다.’
– ‘······무슨 작품을 만드시려고요?’
– ‘굳이 설명하자면···, 참여 미술?’
강석이 한달 전에 했던 말이었다.
‘이게 그 참여인가···!’
그러고 보니, 마치 테마파크에 입장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류수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말을 따랐다. 천천히 불빛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솔직히 촛대의 불빛 만으로는 계단을 오르기가 어려웠으나 계단 난간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가 있었다.
계단을 다 올라 촛대를 올려놓은 단상의 바닥이 보이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조동범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울렸다.
언뜻 들으면 늙은 노인 같았고, 또 언뜻 들으면 정중한 사내 같았고, 또 언뜻 들으면 누군가를 종용하는 여인을 닮아 있었다.
ㅡ 그대. 궁금하다면 촛대를 드시오.
촛대를 들어올려라.
두번째 주문이었다. 류수헌이 단상을 내려다봤다. 촛대를 향해 다가가려는데 무언가 차가운 쇠같은 줄이 손가락을 스쳤다.
소름끼치는 감각이었다.
촛대를 들지 않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 그대. 확인하고 싶지 않소. 궁금하다면 촛대를 드시오.
재촉하는 목소리였다.
류수헌이 무언가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촛대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드르륵, 소리와 함께 촛대에 달린 무언가가 끌어당겨졌다. 어떠한 장치가 되어있는지 촛대를 들어올리는 내내 힘이 들진 않았다.
음?
류수헌이 의구심에 자세히 촛대를 바라보려는데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텅 빈 공간을 울리는 소리는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게 했다.
“·········뭐야?”
류수헌이 놀라서 커피와 촛대를 떨어트릴 뻔했을 정도로, 무섭고 기괴한 소리였다. 그가 놀라서 사방을 바라보는데 재촉하는 목소리가 한 번 더 깊고 어둡게 들려왔다.
ㅡ 그대. 촛대를 높이 드시오!
“허억!”
그 목소리에 류수헌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촛대를 마치 용사가 검을 들어올리듯 저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물레가 방향성을 상실하게 빠르게 굴러가는 것 같은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더니 끝에 가서 철커덕,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뭔데.
“윽!”
어둠 속에서 눈을 멀어버리게 할 기세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환하게 밝혀지는 시야에 눈을 감으려는데 류수헌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빛이 어둠을 물들며 수천 마리의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풍경이 눈을 감지 못하게 붙잡았다.
깃털 수천개가 하늘에 떠있고, 빛 속에서 나타난 수천마리의 나비 떼가 눈을 새로운 신세계로 인도했다.
인간이 보지 못하는 신계가 그곳에 있었다.
류수헌의 동공이 확장되고 떨려갔다.
여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세계였다.
아름답다.
그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것이 무슨 색이지 인식하기도 전에 새로운 색깔의 나비가 눈을 잡아끄는 수초의 세계를 지나, 모든 수천 마리의 나비 떼가 허공에 자리를 잡는 그 순간.
하얀 두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왔다.
엠파이어 드레스를 입은 하얀색의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근두근두근.
류수헌의 얼굴이 노을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붉게 물들었다. 하루에 수십잔의 커피를 마셔대도 반응하지 않기 시작한 심장이 튀어나올듯 떨리고 있었다.
쿵쾅쿵쾅쿵쾅쿵쾅.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카락, 빗장뼈, 입술, 영혼을 담은 것 같은 눈동자.
저 섬섬옥수까지.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근데 저 여인이 하늘을 땅처럼 딛고 서 있으니 닿을 수도 없었다.
이 마음을 대신하여 류수헌이 촛대를 들이밀었다. 이미 빛이 온 세상을 물들였거늘, 이렇게 하면 저 여인의 얼굴이 더 잘 보일 것 같아서였다.
류수헌은 홀린듯 촛대를 들이밀어 그 여인의 얼굴을 어둠 속에 비추듯 바라봤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말하고 있었다.
류수헌도 이 감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아.
이건, 사랑이었다.
76. 고대 그리스 작은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