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4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40화
거짓말 (13)
“마지막… 거짓말?”
오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영상 속 자신을 바라봤다.
갑자기 거짓말이라니?
이 상황에서 무슨 거짓말을 할 게 있다는 말인가?
-뭐,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지금 이 영상을 볼 시점의 ‘나’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이해 못 하겠지만.
정확하다.
“이거… 정말 내가 찍은 거 맞아?”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2년 전에 이토록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응, 맞아. 오지니라면 분명….”
하은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2년 전.
오진이 한 달 동안 방에 박힌 채 스마트폰을 향해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이거였구나.’
그때부터 오진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거라고.
-그럼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설명부터 하고 넘어가야겠네.
영상 속 오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난… 아니, 이게 너라고 부르는 게 맞나? 음… 뭐, 어쨌든 편의상 ‘너’라고 부를게. 어차피 지금의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상태일 테니 말이야.
천마 그 자식이 이런 기분이었나?
투덜대듯 중얼거린 영상 속 오진이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천마랑 맞닥뜨릴 일이 있었어. 정확하게는 맞닥뜨렸다기 보단 일방적으로 놈의 손에 놀아난 거지만 말이야.
천마?
천마는 또 누구야?
-이해가 안 돼도 그냥 들어. 어차피 다 ‘알게’ 될 테니까.
“…하.”
오진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과거의 자신은 지금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할지까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제대로 싸우지는 못했지만. 이번에 놈을 보면서 하나 확신할 수 있게 된 게 있어.
영상 속 오진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 내 힘으로는 모든 걸 포기하지 않으면 놈을 막을 방법이 없어.
모든 것.
그중에는 아마 ‘자기 자신’조차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막아야 할 상대가 천마 하나라면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겠지. 이건 생각해 둔 방법도 하나 있어.
영상을 보고 있던 하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지금 영속 오진이 말하고는 있는 ‘방법’이라는 게 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놈이 지닌 흑천이야. 천마가 죽는다고 해도, 놈의 흑천이 소멸하는 건 아닐 테니까.
“다… 알고 있었구나.”
오진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폐인이 되어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고만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그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천마의 의식을 집어삼킨 흑천까지 막으려면, 포기하는 방법 외에는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해야지만 천마를 막을 수 있다는 걸.
그렇다면.
이 영상을 남긴 이유는 대체….
-근데 난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마경에서 천마와 처음 대적하던 날.
오진은 결심했다.
맹세하고, 결의했다.
자신은 손에 쥔 모든 것을 움켜쥔 채.
그 모든 것을 지켜내 보이겠노라고.
-그래서 생각했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이길 수 있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이길 수 있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이라니.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단 여기 와서 몇 가지 시도를 해봤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방법 따윈 없어.
당연하지 않은가.
애초에 문제의 명제부터가 모순되어 있는데 해답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순서를 바꿀 거야.
“순서를 바꿔…?”
영상 속 오진이 새어 나온 물음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모든 걸 포기한 다음. 포기했던 모든 것들을 되찾을 거야.
과연.
그런 뜻이었나.
손에 든 보물을 내려놔야지만 열 수 있는 문이 있다면.
잠시 내려놓고 문을 연 후, 다시 주워들면 될 뿐이다.
-잘 들어.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영상 속 오진은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있고, 천마에게는 없는 게 딱 ‘두 가지’ 있어.
두 명의 오진 사이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차이점.
-하나는 ‘거문고자리 성흔’. 베가의 성흔 덕분에 나는 놈에 비해서 흑천을 훨씬 수월하게 다룰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자신이 처음 깨어났을 때 ‘성흔’을 사용해 보라며 카시아가 말했던가.
하지만.
“나는… 성흔을 쓸 수 없다고.”
지난 한 달간 성흔을 사용해 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 성흔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는 ‘거짓말’. 나는 나 자신한테 거짓말을 해서 가짜 기억이나 환상 같은 걸 만들어낼 수 있어. 뭐, 일종의 자기 세뇌라고 보면 돼.
“아….”
아까 전 마지막 ‘거짓말’을 하겠다고 말한 게 저 자기 세뇌를 말했던 건가.
“…거짓말을 통해 가짜 기억을 만든다.”
그렇다면.
자신은 거짓말로 만들어진 가짜 기억을 ‘진실’처럼 믿은 채 살아가면 된단 말인가.
“그게… 포기한 걸 모두 되찾는 방법이야?”
거짓된 기억을, 만들어진 추억을.
이건 진짜라며 믿고 살아가는 것을 과연 ‘되찾았다’고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자신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영상 속 오진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마음에 안 들겠지. 거짓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억은 어차피 ‘가짜’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내가 아무리 거짓말을 잘한다고 해도, 가짜 기억을 진짜라 믿으며 평생을 살아갈 순 없어.
-결국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은 풀릴 거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겠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니까.
영상 속 오진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속이려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대체 무얼 위한 거짓말이란 말인가.
-내가 지닌 흑천은 내가 거짓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내가 수련할 때마다 질리도록 사용했었으니까.
하지만.
-천마가 지닌 흑천은 내가 가짜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오진이 지닌 흑천과 천마가 지닌 흑천.
두 개의 흑천이 뒤섞여 지금은 하나가 되었지만.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천마가 지닌 흑천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파란색 점토와 붉은색 점토를 뒤섞었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색으로 완전히 물드는 게 아닌 것처럼.
-거짓말로 만들어낸 가짜 기억이 들어가면. 천마의 의식은 그게 진짜인지 알고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 거야.
하지만.
-원래 내가 지니고 있던 흑천은 그게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달려들지 않겠지.
즉.
그 순간.
그 시점에.
-흑천이 다시 둘로 쪼개질 거야.
쪼개진다고 해도 칼로 자르듯 깔끔하게 반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니라.
뒤섞여 하나가 되었던 게 둘로 나눠지는 거니.
필시 난잡하고, 난폭하게 찢겨나가겠지.
-물론 둘로 쪼개져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천마가 지닌 흑천도 그리 멍청하진 않을 테니까.
곧 새롭게 들어온 기억이 가짜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영상 속 오진이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그 안에 잡아먹혀 있는 내 기억을 가지고 밖으로 빠져나와.
“…아.”
오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영상 속 자신이 말하는 흑천이니 천마니 하는 것들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베, 베가 이게 가능한 방법이야?”
하은이 믿기 어렵다는 듯 베가를 돌아봤다.
[본녀도 잘 모르겠느니라. 허나….]꾸욱.
주먹을 움켜쥐며 별처럼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그대는 오진이 수련하는 모습을 그리 많이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구나.]베가는 하은과 이사벨라가 잠든 사이 밖으로 나와 홀로 수련을 하고 있던 오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실제 상처를 입은 것처럼 전신의 피부가 괴사한 채 숨을 헐떡이고 있던 오진의 모습.
[이 아이가 말하는 거짓말은 가짜라고는 하나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허상을 만들어낼 수 있느리라.]그래.
그의 계획대로 ‘흑천’이 속을 정도로 완벽한 허상을.
“그래도 애초에 그 거짓말이란 것 자체가 흑천의 능력으로 얻은 기술 아니었어?”
[아니니라. 집중을 돕기 위해 흑천의 능력을 사용하긴 했으나, 본질적으로 흑천과는 무관한 기술이니라.]베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흑천의 능력도 아니고, 성흔의 힘도 아니었다.
오롯이 오진의 노력으로 얻어낸… 아니, 그의 ‘삶’ 자체에서 터득한 기술이었다.
그와는 다른 운명을 걸어왔던 천마조차 얻지 못한.
그만의.
‘오진’만의 기술.
-기회는 한 번뿐이야.
영상 속 오진이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쪼개진 흑천 속에서 내 의식을 찾는 게 늦거나… 아니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면. 지금 네가 지니고 있는 그 한 달의 기억조차 모두 사라지겠지.
“…….”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달의 기억.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걸린 일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영상을 꺼도 좋아. 난 그놈이랑 다르게 내 생각을 네게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난.”
스마트폰의 화면을 내려다보던 오진이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준 이유.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보고 선택하라는 거구나.’
네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
오진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너 이 새끼, 내가 무슨 결정을 할지도 알고 있는 거지?”
영상 속 오진을 향해 물었다.
영상 속 오진은 마치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처럼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여기까지 영상을 끄지 않았다는 건 결정을 내렸다고 보면 되겠지?
“하아.”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설명한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아니.
설명만 들어도 쉽지 않다는 건 알겠다.
-의식 공간이라지만 고통은 실제랑 똑같을 거야.
-죽을 만치 괴롭고, 그 이상으로 고통스럽겠지.
-괜찮아. 의식 공간인 만큼 버틸 수만 있다면 실제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오진은 쓴웃음을 삼키며 영상 속 자신을 바라봤다.
-너라면… 아니, ‘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참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어째서일까.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