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3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39화
거짓말 (12)
오진이 균열에서 돌아오고 난 후 한 달이 흘렀다.
죽은 줄 알았던 인류의 영웅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 세계를 뒤집기에 충분했지만.
하은을 비롯한 오진의 연인들이 입을 모아 오진이 생환했다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에 딱히 세계가 뒤집힐 일은 없었다.
오진의 생환 소식을 전해 들은 건 평소 친분이 있던 몇몇 성좌와 백무강, 사카키 료, 한준만 부장과 같은 소수의 각성자들 뿐이었다.
그들은 오진이 기억을 모두 잃었다는 소식에 그의 기억을 되살릴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하은과 이사벨라, 베가처럼 오진과 연인 관계였던 이들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들이 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있던 여느 날의 아침.
“짜잔! 오늘 아침은 흰 쌀밥에 스팸, 그리고 계란후라이랑 김이에요!”
식탁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궁극의 조합이 예쁜 그릇에 담긴 채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 예. 매일 감사합니다, 이사벨라 씨.”
하지만 그런 궁극의 조합에도 불구하고 오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식탁에 앉았다.
순간 이사벨라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붕붕 고개를 저으며 애써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이, ‘이사벨라 씨’가 아니라 편하게 ‘이사벨라’라고 부르라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 그랬죠.”
“존댓말도 하실 필요 없어요.”
“으, 응. 알겠… 아니, 알았어.”
오진은 목각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뻣뻣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라는 딱딱히 굳어 있는 오진의 등을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 앞에서 그렇게 딱딱하게 있으실 필요 없어요. 전에 오진 씨랑 저랑은 연인… 아니, 한없이 ‘부부’에 가까운 연인 사이였다고 말씀드렸죠?”
“으, 응. 그랬지.”
“그러니 조금 더 편하게 절 대해주세요! 그래야 오진 씨의 기억도 빨리 돌아올 테니까요.”
“……알았어.”
‘기억’이라는 단어에 오진의 입가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으로 숟가락을 옮겼다.
우적우적.
마치 욱여넣듯 허겁지겁 밥을 먹는 오진.
[천천히 먹거라.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그런 오진을 향해 베가가 뽀르르 날아갔다.
두 개의 흑천이 격돌한 이후.
율법의 제약이 한층 더 크게 약해지면서 이제 지구에서도 본신의 상태로 쭉 있을 수 있게 된 그녀였지만 지금은 일부러 의체의 상태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진에게 더 익숙한 건 이쪽일 테니까.
지금 그의 연인들은 오진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최대한 그에게 익숙한 환경을 만드는 데 전력을 쏟고 있었다.
베가의 신전에서 합정에 위치한 아파트로 돌아온 것도 그 이유 때문.
가구 배치부터 잠자리, 입는 옷이나 식사까지 모두 오진이 평소 즐겨 입고, 먹었던 것을 위주로 준비했다.
그 밖에도 과거 그의 기억 속에 강렬히 남아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가령, 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지냈던 보육원이라든가.
하은과 함께 살았던 곰팡이 가득한 원룸이라던가.
[이번에는 전에 놀러 갔던 해변에 간다고 했느냐?]“예. 산 프루투오소로 가보려고 해요. 그곳에서도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오진과 함께 이탈리아에 있는 유명 휴양지로 놀러 갔던 기억은 그와 함께한 무수한 추억들 속에서도 꽤나 강렬한 경험이었다.
[근데… 그때 마수들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지 않았더냐?]“최대한 예전과 비슷한 환경으로 복구해 뒀어요.”
휴양지를 복구하는데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2차 별들의 전쟁의 시발점이 됐던 이탈리아에 세계 각지에서 구호 자금과 인력이 들어온 상태기 때문에 빠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호오. 그러면 리아크도 이번에 불러야겠구나.]“산 프루투오소면… 전 빠져야겠네요.”
카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오진이 과거 경험했던 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카시아가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당시 오진과 함께 휴가를 간 적 없었으니까.
“그… 미안, 언니.”
“흥. 됐어, 오진 님이랑 늦게 만난 내가 잘못한 거지 뭐.”
카시아는 못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진 님에게 내 수영복 차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후훗.”
“…뭐야 그 웃음.”
“아니~ 그런 빨래판을 본다고 오진 씨에게 자극이나 될까 싶어서.”
“너어!”
여느 때와 같이 티격태격하는 두 자매.
지난 한 달간 반복됐던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허겁지겁 밥을 먹던 오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예? 가기 싫다뇨?”
“더 이상 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싫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느냐?]“…….”
당황한 여인들을 보며 오진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꾸욱.
주먹을 움켜쥐며 쥐어 짜내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거기 간다고 해도!”
쿵!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치며 울부짖듯 외쳤다.
“또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할 거라고요!”
보육원을 찾아갔을 때도.
예전에 살던 원룸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아무런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오진 씨….”
“저도 제 기억이란 걸 떠올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랑 있었던 일들! 기억들! 추억들! 다 떠올리고 싶다고요!”
하지만.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는 오진.
“더 이상 당신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이 기억을 떠올리지 못할 때마다 그녀들이 보이는 슬픔에 가득 찬 눈빛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제가… 제가 어떤 심정인지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세계.
익숙지 않은 눈빛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들.
처음 보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자신.
“저랑 연인 사이였다고요? 편하게 대하라고요? 제가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진은 이사벨라를 노려보며 사납게 외쳤다.
“저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당신을 편하게 대할 수 있습니까?”
“…오진 씨.”
“전….”
쨍그랑.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오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떨궜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흐느껴 우는 오진을 바라보며 여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진 오진에게 억지로 ‘익숙함’을 강요하는 것이 잔혹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썩어빠진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었으니까.
그를.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미안해, 오지나.”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오진을 끌어안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해도 괜찮아.”
“…예?”
“기억을 되찾는 거.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고.”
“……”
폭주하는 흑천으로 향하기 전.
오진이 남겼던 말들을 떠올렸다.
“네가 잊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제까지의 추억들.
함께 해온 기억들.
모두 다.
간직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기억하지 않아도.”
“…….”
오진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식탁에 모인 네 여인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뇨.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그새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오진은 주먹을 굳게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저도 여러분과 함께한 기억을 되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방금 전에….”
“힘들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이 괴롭기도 했고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제게 그토록 소중하게 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도화지처럼 새하얀 세계에서.
그녀들만이 물감이 되어 세계를 밝혀줬다.
“저도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오지나….”
네 명의 여인들은 눈을 글썽이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으며 각오를 다지려고 했을 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택배라도 시키셨나요?”
“아니, 난 안 시켰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터폰으로 다가가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준만 부장의 모습이 보였다.
하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이 아침에 무슨 일이야?”
“아… 그, 그게.”
한 부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네모난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전해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전해줄 거라니? 누가 보낸 건데?”
“그….”
눈치를 살피던 한 부장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진 씨가 보낸 겁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제게 맡겨둔 거죠. 2년 전에.”
“…뭐?”
쿠당탕!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며 이사벨라와 카시아가 우다다 달려왔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2년 전이라면…!”
“지, 진정하세요!”
한 부장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은이 사납게 한 부장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2년 전에 맡긴 걸 왜 지금 와서 주는 거야?”
“그… 오진 씨가 부탁했거든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깨어나면 한 달 정도 기다렸다가 이걸 건네주라고요.”
“이게 뭔데?”
하은이 네모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건.
“스마트폰?”
2년 전 오진이 사용했던 스마트폰이었다.
“저는 그럼 약속대로 전해줬으니 이만 출근하러 가보겠습니다!”
한 부장이 도망치듯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이게 대체….”
하은이 스마트폰을 켜려고 하자 지문 인식이 필요하다는 화면이 떠올랐다.
끄응, 침음을 삼킨 하은이 오진에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네가 한 번 켜봐.”
“아, 예….”
오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엄지를 화면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아아. 이거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화면을 켜자마자 재생되는 영상.
2년 전.
천마와 싸우러 가기 전 오진의 모습이었다.
-뭐… 지금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상을 보고 있다는 건 일단 깨어나긴 한 거겠지?
스마트폰 속 오진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기억은 죄다 흑천에 집어삼켜져 사라졌고. 평소 내가 좋아했다는 요리를 먹어도, 즐겨 입었다는 옷을 입어도, 익숙하다는 곳을 돌아다녀 봐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영상 속 오진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화면 너머 오진을 응시했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보자고.
시작하다니.
대체 뭘 시작한단 말인가.
의문에 찬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오진을 향해.
영상 속 오진이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지막 ‘거짓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