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201
제6장 삼황채의 전설
강호를 경악시킨 삼황선원의 대참사가 벌어진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모용가의 장남인 모용위는 가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과 함께 길을 재촉해 마침내 소림사의 산문 밑까지 당도했다.
삼십 대 초반이란 나이가 어울리지 않게 중후한 모습의 모용위가 소림사로 오르는 길을 보면서 말했다.
“소림사가 코앞입니다.”
일전에 육검문에 모용가의 대표로 참석했던 그가 이번엔 직접 소림사로 온 것이다.
모용위는 계단을 오르기 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 외에도 자그마한 짐 꾸러미를 들고 소림사를 오르는 이들이 종종 보였다. 무인이 아니라 평범한 양민들이다.
“소림사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모용가의 장로이자 손꼽는 고수인 모용갈이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주변 촌락의 양민들이 소림사에 일이 생기면 맨발로 달려 나와 돕는다더니 그게 사실이었어.”
아닌 게 아니라 주변 촌민들이 쌀 몇 되, 무 몇 알이라도 들고 와서 소림사의 부상자들을 간호하는 걸 돕는다던가, 하다못해 잡일이라도 하게 해달라 자청하며 매일 소림사를 찾아오고 있었다. 손이 부족한 소림사로서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는 게지. 소림사가 자신들에게 베풀었던 일을.”
“아무래도 소림사는 쉽게 건드리기 어렵겠습니다.”
모용위의 말에 모용가의 또 다른 고수인 모용정이 코웃음을 쳤다.
“마음 약한 소리 마라. 소림사의 방장뿐 아니라 십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최고수들 모두가 목숨만 겨우 붙어있을 정도로 당했다. 하나 우리 모용가는 현명한 판단을 해 아무런 피해가 없었지. 더구나 천하제일인이 된 소림소마의 은퇴식조차 끝난 마당에 당금 강호에서 우리 모용가의 전력을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모용갈도 동의했다.
“필요하다면 소림사를 힘으로 굴복시켜서라도 뜻을 이뤄야 한다. 남들 위에 서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본가의 최고 핵심 전력을 모두 끌고 온 것 아니겠느냐. 물론 결정은 전적으로 장자인 네게 맡기겠다마는.”
모용위가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온 열 명의 고수들 중에는 심지어 가주만을 지키는 임무를 지닌 성신검대(星神劍隊)의 대주도 있었다.
모용위가 자신 있게 답했다.
“숙부님들의 말씀대로입니다. 오늘 저는 본가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일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훌륭하다!”
모용가의 고수들이 모두 흐뭇해했다.
하나 모용가의 무인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장해물을 만나게 되었다.
산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일단의 무인들 수백 명이 소림사의 일주문에 몰려 있는 걸 보게 된 것이다.
왕왕 큰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모용가의 무인들이 경공까지 쓰며 계단을 올라가니 각 문파에서 나온 이들이 각자 무리를 짓고 갈라져 있었다.
한데 일주문에서는 나한승들이 일렬로 서서 그들의 진입을 막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각 문파의 무인들이 계속해서 항의를 하는 형국이었다.
모용위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대충 훑어봐도 난다 긴다 하는 이름난 무인들이 잔뜩 모였다.
모용위는 우선 도착해 있던 무인들을 향해 포권하고 인사를 청했다.
“무림말학 모용위가 여러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도착해 있던 무인들이 귀찮은 투로 모용위를 쳐다보았다. 단단한 체구에 짧은 수염의 노인이 모용위에게 날선 한마디를 했다.
“무림말학이면 말학답게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어디 당돌하게 끼어드는고?”
대화에 끼어든단 얘기가 아니라, 소림사에 왜 왔느냐는 핀잔이다. 말을 꺼내자마자 망신을 당한 모용위의 얼굴이 굳자 모용갈이 한 걸음 걸어 나왔다.
“황보우충! 노괴물이 죽지도 않고 잘도 기어 나왔구나! 뒤에 있는 놈들은 보아하니 황보가에서 말똥이나 치운다는 적마단(赤馬團)인 것 같은데, 감히 그 정도로 본가의 소가주에게 큰소리칠 입장이 되느냐?”
소매에 하나같이 말갈기를 장식하고 손등에 권갑(卷甲)을 찬 적마단의 이십여 무인들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황보우충의 뒤에 바싹 붙어 섰다.
모용위가 짐짓 모용갈을 말리는 척했다.
“제가 주제넘게 끼어든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니 숙부께서는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잠시 참아주시지요.”
모용갈이 거칠게 ‘크흠!’하고 헛기침을 내며 황보우충을 쏘아보며 뒤로 물러섰다.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치 모용위가 황보우충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용가의 대표가 모용위라는 걸 드러내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던 것이다.
일개 후배로서가 아니라 모용가를 대표해 온 자격이라면 모용위를 모욕하는 게 곧 모용가 전체를 모욕하는 셈이 될 수 있었다.
모용위가 황보우충에게 사과하며 포권했다.
“선배님께서는 제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저 이렇게 위명이 쟁쟁하신 선배님들께서 소림사에 들지 않고 여기서 모여 계신 이유를 듣고자 합니다.”
뻔한 수작이라는 걸 알아도 이렇게 자신을 대우하고 나오면 명분상으로 탓할 수 없다. 황보우충도 한 발 물러섰다. 하나 친절하진 않았다.
“직접 알아보시게.”
황보우충의 눈짓이 일주문을 가로막고 있는 소림사의 나한들을 향했다.
모용위가 나한들의 앞으로 갔다.
“심양의 모용가에서 온 모용위요. 이미 귀사찰에 서신을 보내 본인을 포함해 열한 명이 도착한다 알렸소. 당분간 머무를 수 있는 처소를 부탁했소만.”
나한들 중에서 무 자 배의 대제자인 무진이 나와 반장하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최근 벌어진 일로 폐사(弊寺)가 손님을 접대하기에 마땅치 않아 외부 손님에 대한 수용을 일절 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굳이 찾아온 손님을 내쫓다니. 대체 이런 법도가 어디 있소?”
하지만 나한승들은 무인들만 막을 뿐 찾아온 양민들은 내쫓지 않았다. 몰려있는 무인들이 무서워 주춤거리는 양민들을 보자 나한승이 달려가 직접 일주문 안까지 인솔했다.
“겁먹지 마시고 저를 따라 오시지요.”
심지어 공손하기까지 하다. 양민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무인들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옆에서 그걸 본 모용위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아졌다.
“왜 저들은 들여보내면서 우리는 못 들어가게 막는 것이오?”
그때 일주문 안쪽에서 양민들이 들고 온 곡물들을 챙기고 있던 건장한 체구의 굉료가 예의 화통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진아! 거 시끄러운 시주분들 손에 뭐 들렸나 봐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감자 한 톨도 없어?”
“감자 같은 건 없고요. 아, 칼은 들고 계십니다.”
“그럼 그냥 밥이나 빌어먹으러 온 식충이잖으냐! 괜히 선량한 시주분들 겁먹으니까 다 쫓아내라!”
“예.”
모용위가 당황스러워 하는데 굉료가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물론 목소리가 커서 다 들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아, 남들은 바빠서 뒷방에서 배 긁으며 쉬고 있던 퇴물들까지 끌려나와 일하고 있는데, 선의로 온 것도 아니면서 어디 사지 멀쩡한 놈들이 밥만 공짜로 처먹으려고 분탕질이야. 어째 뭐라도 들고 온 놈이 하나 없네.”
모용가의 인물들 모두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감히!”
모용정이 분노해서 검의 손잡이를 쥐는데 그 앞을 무진이 막아섰다.
무진은 흔들림 없이 담담한 눈으로 모용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본사는 강호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본사의 일을 도우러 오신 거라면 응당 모용가의 선의에 두 팔을 들어 환영할 것입니다만, 그 외의 용무로 방문하신 거라면 한사코 거절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뭣이?”
소림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아예 손을 뗀다고 하니 모용정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모용정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다른 이가 큰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그건 안 되지!”
놀랍게도 일주문을 가로막고 있던 무인의 무리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를 화산파의 무인들이 거침없이 지나 왔다.
화산오검이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칼날 같은 기도를 가진 청룡단의 매화검수 스무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모용가에서는 소림사와 화산파의 중간에 끼인 입장이었으나 비켜줄 수도 없고 하여 우물쭈물했다.
화산오검의 첫째인 백리도일검 학도는 모용가를 신경도 쓰지 않고 소림사의 나한들을 향해 호통쳤다.
“이번 사태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질을 함부로 놓아준 소림사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물러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무진은 놀라지 않고 반장하며 답했다.
“본사의 입장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불가(不可)! 본파에도 본파의 사정이 있음을 소림사가 양해하여야 할 것이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태도였다.
비록 백리도일검 학도가 천룡검주 고현에게 패했다고는 해도 한때 강호 무림을 주름잡던 무인이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그가 검을 뽑는다면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이가 많지 않다.
하지만 화산파를 두려워하는 문파는 없었다. 아니, 화산파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는 게 정확했다.
모용정이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학도를 향해 조소를 날렸다.
“화산파에도 사정이 있겠지! 북해빙궁을 끌어들이고 관부와 합작하여 무림을 자신들의 손에 넣으려 한 사정!”
학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본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소이다!”
방금까지 모용가와 각을 세우던 황보우충도 모용가를 거들었다.
“설사 화산파와 관련이 없다 쳐도! 자파의 존장이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죄를 지었으면 그 제자들이라도 읍소(泣訴)하며 강호에 백배 사죄해야 하거늘. 어디 사리구분도 못 하고 함부로 큰소리를 치는가!”
학도도 소리를 높였다.
“본인은 귀하가 말하는 그 일이 본파의 존장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명확히 밝히러 온 것이오!”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곤륜파에서도 화산파를 성토했다. 곤륜파의 고수가 부르짖었다.
“어이없는 소리! 이미 만천하에 검성의 속셈이 드러난 마당에 무슨 관련이 있고 없고를 따진단 말이오? 허면 본 곤륜의 존장께서 공명검에 당해 사경을 헤매신다는 게 거짓이란 말인가!”
“그게 귀 파의 존장께서 하신 말씀이오? 철장혼일(鐵杖混壹) 양 진인이 직접 들으신 말씀이오?”
“그건…….”
사실 곤륜파도 제지를 당해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원호가 최고수들의 소속 문파까지 모두 막아선 탓이다. 하여 곤륜파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파의 존장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들었을 따름이다.
곤륜파의 양 진인이 주춤하자 학도가 더 큰소리를 쳤다.
“만일 조사에서 본파의 존장이 관련되었다고 만천하에 명백히 드러난다면, 본인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천령개를 치고 자결하겠소이다!”
북해빙궁에 큰 피해를 입었던 태을문과 종남파의 무인들이 격노했다.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구려!”
“그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당장 그 목을 쳐주겠다!”
살기등등한 말이 오갔다. 그러나 화산파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마침내 학도가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화산오검과 청룡단 전원이 함께 검을 뽑아 치켜들었다. 청룡단이 원을 둘러 포진하자 다른 문파의 무인들도 거의 동시에 앞 다투어 병장기를 꺼냈다.
차라라랑!
일순간의 쇳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렸다.
학도가 노호성을 담고 외쳤다.
“모든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때까지는 누구도 본파를 업신여길 수 없다! 그땐 화산의 검이 왜 두려운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일주문 앞은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누가 먼저 손을 쓰기라도 한다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될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먼저 칼을 내려놓기에도 위험한데다 애초에 기세 싸움은 각오하고 온 것이니 서로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일각이 넘도록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대치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일주문을 막고 있던 나한들이 움직였다. 안쪽에서 누군가 나온 것이다.
대치하던 무인들은 방장 원호라도 나오나 해서 곁눈질을 했다.
한데 원호도 아니고 소림사의 승려도 아니었다. 또 다른 무인들이었다. 그중 험악한 인상의 중년 무인이 일주문 앞의 대치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어휴, 여긴 아주 난리네, 난리.”
무인을 본 학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신창?”
제남의 양가장에서 온 신창 양지득이었다. 그의 옆에는 호북 백리가의 가주인 추룡검 백리상과 그의 아들인 백리원, 그리고 제갈가의 인물들까지 함께 있었는데, 그들 역시 수행 무사들을 여럿 대동한 채였다.
“이게 무슨…….”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해명을 바라는 눈길로 무진을 보았는데 대답은 양지득이 했다.
“나는 사위 때문에 온 거니까, 신경 쓰지들 마셔. 소림사의 손님이 아니라 장 대인의 손님으로 왔수다.”
백리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사위라니요. 양 장주께서 그리 말씀하시긴 이르지요.”
“이르든 늦든 또 그걸 따지고 그러시오. 껄껄!”
양지득이 농을 하다가 앞을 막은 무인들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아, 좀 비켜봐. 사람이 지나는 가야 할 거 아니오.”
무인들이 어쩔 수 없이 대치한 채로 조금씩 움직여 길을 비키자 양지득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황보우충이 물었다.
“양 장주, 어딜 가시는 거요?”
양지득은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빼곡한 무인들을 지나치면서 대답했다.
“삼황채에 좋은 거 있대서 구경가외다!”
뭇 무인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로를 보는 눈치가 더 바빠졌다.
어차피 여기서 더 버텨봐야 얻을 것도 없고, 조사단이야 나중에 꾸려도 그만이다. 하지만 삼황채, 삼황선원의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일각이 더 지났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내린 무인들은 서둘러 소림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주문에 서서 떠나는 무림인들을 보며 무진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설마하니 하나같이 저리 단단히 무장을 하고 올 줄 몰랐습니다.”
찾아온 각 문파의 정예 무인들 중 장건과 관련된 제갈가나 양가장, 백리가만 빼고는 전투적인 태도가 아닌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본사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여차하면 저희에게도 손을 쓸 작정인 듯했습니다.”
굉료가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무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서라, 그것도 우리 소림이 짊어져야 할 업보인 게다. 저들을 원망하지 말고 앞만 보거라. 그래야 본사가 무문(武門)으로서의 입지를 포기한 보람이 있겠지.”
무진이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구합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마음이 그렇지 못하니,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봅니다.”
굉료가 껄껄 웃었다.
“수양이 부족한 걸로 치자면 우리 방장 사질만한 중이 또 있을까? 얕은꾀로 악다구니만 부리는 못된 중이지.”
무진도 어색하게 웃었다.
“덕분에 본사의 위기도 여러 번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굉료가 멀리 산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그리됐으면 좋겠다마는…….”
“그럴 겁니다.”
무진이 굉료의 시선을 따라 삼황채 쪽을 바라보며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사제는 누가 뭐래도 천하제일 고수니까요.”
☆ ☆ ☆
양지득 등의 뒤를 쫓아 삼황선원으로 간 무인들은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삼황선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좌우로 색색의 수많은 깃대가 꽂혀 있었고 깃대에 매달린 천마다 색색의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그 내용이 심히 가관이었다.
―사업권 단독 인수! 목숨을 건 무림인들의 처절한 격전의 흔적 단독 공개!
―보지 않으면 당신만 손해! 이것은 그야말로 사해 무공의 총집합!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황궁 비밀 결사단 무공의 실체!
―북해와 남만의 가공할 천년 마공이 당신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든다!
홍보 문구를 읽은 무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길거리 좌판에서나 볼 법한 싸구려 티가 역력한 홍보 문구뿐만 아니라 강호 무림 자체를 한낱 구경거리로 보는 듯한 투의 내용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의로 무인들을 자극하기 위한 문구임이 틀림없었다.
하나 화산파는 더 정도가 심했다. 화산파 무인들의 시선이 한 깃대에 꽂혔다.
―과연 인간인가! 전대 천하제일 무림 고수가 남긴 전설의 검파 무공! 금세기 최고의 걸작이 천길 절벽에 그려지다!
화산파 무인들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셔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윤언강이 남긴 검흔은 실로 소중하기 그지없는 것이나 그 검흔이 생겨난 과정은 화산파가 숨겨야 할 치부였다. 그런 치부가 만인이 보란 듯 대놓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수식어와 함께.
백리도일검 학도가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치워라…….”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리는데 극도의 분노가 담겨서 살기가 피부를 찌를 듯 새어나왔다.
얼굴이 굳은 청룡단 단원 한 명이 걸어 나와 깃대를 뽑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깃대를 안으며 말했다.
“아, 이거 망가뜨리시면 안 돼요.”
분노한 화산파의 무인 전원이 도끼눈으로 말한 이를 쳐다보았다.
다름 아닌 상달이었다. 상달은 짐짓 겁을 먹은 척 옆으로 눈짓을 했다.
“이거 보세요, 이거.”
화산파 무인들이 눈을 돌려 보니 깃대 하나에 ‘본 물품은 운성방의 소유이며 임의로 훼손하면 손해배상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화산파 무인들의 분노가 극대로 치밀었다.
“이 천박한 상인 놈이!”
상달이 꾸벅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상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가지고요.”
화산파 무인들은 더 화가 났다. 화산오검의 둘째인 매령신화검 맹조가 분노해서 소리쳤다.
“천둥벌거숭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입을 놀리는 구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악덕 점주 때문에 전설의 검파 무공도 못 보고 일을 했거든요.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무급 파견까지 나와서 근무하고 있는데요. 나리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니…….”
“닥쳐라! 한 번 더 우리를 비꼰다면 그 입을 찢어버리겠다!”
“예예, 아무렴 입쇼.”
학도는 분을 겨우 억누르며 깃대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으직, 소리가 나며 ‘과연 인간인가……’라 씌여 있던 깃대가 부러져 나갔다.
“어어? 그러시면 안 되는데.”
상달의 말에 학도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화산파로 청구해라.”
상달이 뭐라고 더 말을 하려 했으나 화산파 무인들이 살벌하게 상달을 노려보았다.
“네네, 그러죠 뭐.”
학도가 상달에게 말했다.
“전설의 검파 무공이 그려진 절벽이 어디 있느냐. 안내해라.”
“그냥 저 앞에 분들 따라가시면 되는데요.”
학도가 앞을 보니 앞서 가던 양지득이나 백리가, 제갈가의 인물들이 만면에 웃음을 짓고선 누군가에게 돈을 내며 들어가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문파들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며 서성이는 중이었다.
학도는 거침없이 입구로 걸어갔다. 화산파의 무인들이 사나운 기세로 뒤를 따랐다.
돈을 받고 있던 약간 마른 체구의 어린 청년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부상을 입었는지 전신에 흰 광목천을 친친 감고 있는 어린 청년은 위를 올려다보며 옆의 팻말을 가리켰다.
―관람료 일인당 동전 한 냥부터.
화산파의 무인들은 두 가지 면에서 다시 분노했다. 첫 번째는 자파의 존장이 남긴 위대한 심득을 핑계 삼아 돈을 받고 있다는 점이었으며, 두 번째는 그 관람료가 터무니없이 싸다는 점이었다.
“사부님의 검이 겨우 한 푼 값어치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화산오검은 치가 떨렸다. 화산파가, 그들의 사부가 이리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했다.
“비켜라!”
서슬 퍼런 화산파 무인들의 일갈에도 어린 청년은 겁먹지 않았다. 다만 얼굴이 좀 붉어져선 반대쪽 팻말을 가리켰다.
―삼황선원에서 홀로 수백 명을 도륙하고 은퇴한 천하무적 전 소림 제자! 그의 시험을 통과하면 관람료가 공짜!
그 순간 화산오검은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팻말과 어린 청년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네가…….”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왜소한 몸집에 부상을 입은 병약한 청년, 소년에 가까운 저 청년이 천하제일인이던 자신들의 사부를 쓰러뜨렸다고?
화산오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진정 사부님을 쓰러뜨렸느냐?”
장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산오검이 재차 물었다.
“사부님은 어디 계시지? 소림사에 잡혀 계신 거냐?”
“검성 할아버지는 사라지셨어요.”
장건의 대답에 화산파의 무인들이 분개했다.
“거짓말!”
“정말이에요. 고 대협도 함께 없어졌어요.”
“이놈! 같잖은 소리를!”
학도가 나서며 사형제들을 막았다.
“물러서라.”
“대사형!”
“물러서라고 했다!”
학도가 언성을 높이자 화산파의 무인들은 이를 갈며 장건을 노려보기만 했다. 학도가 장건을 천천히 살피며 말했다.
“너는 강호를 은퇴했다면서 우리들의 앞을 막고 있구나. 이게 무슨 수작질이냐?”
장건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저는 그저 아버지를 도와 관람료를 받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까 팻말에 운성방 어쩌고가 쓰여 있었다. 학도는 장건이 운성방의 독자로 알려져 있던 게 기억났다. 소림사의 치졸한 짓거리에 속이 뒤틀렸으나 학도는 애써 참고 말했다.
“본파의 존장께서 남기신 흔적이다. 우리 무공을 확인하는 데에 우리가 돈을 지불할 수는 없다.”
장건은 알겠다는 듯 바닥에 일직선으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은 그냥 통과시켜 드려요.”
학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린 나이에 높은 무공을 얻고 나니 강호의 행사가 장난으로 보이더냐?”
“장난으로 하는 거 아닙니다.”
장건은 학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싸우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세요?”
학도는 장건을 노려보았고, 장건은 피하지 않았다. 강호의 은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지만 금분세수식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감정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
거기에 장건도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원호는 삼황선원을 그냥 공개할 생각이었다. 삼황선원을 미끼로 던져두어 서로 다투도록 내버려두고 소림사는 빠져 있으려 했던 것이다.
하나 그것이 꼭 옳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삼황선원과 화산파라는 미끼로 만족하고 소림사를 그냥 내버려 두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탓이다.
소림사는 야율비를 놓아준 데 대한 면죄부가 필요했고, 면죄부를 사용하기 위해 다른 문파를 억누를 수 있는 억지력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반드시 장건이 필요했으나 장건은 무림인으로서는 은퇴한 마당이다.
그러다가 원호는 장건이 공짜에 치를 떠는 모습을 보고 지금의 방안을 강구해냈다. 장건을 무림인이 아니라 상인의 자격으로 나서게 한 것이다.
하여 결국 장건의 양 어깨에 소림사의 면죄부가 걸리게 된 셈이었다.
장건과 학도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데 종남파에서 네 명의 무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소림사의 방장 대사가 빠지는 척하면서 뒤로는 고약한 수작을 부려놨구나. 하기야 시전에서 무술 몇 가지 보이고 약을 파는 약장수를 무림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암, 억지스럽지만 틀린 말은 아니야.”
학도가 종남파의 사대 검수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종남파는 물러서시오.”
강호에서 화산오검과 비슷한 명성을 얻고 있는 종남파의 사대 검수가 그 말에 물러설 리 없었다. 사대 검수의 첫째인 현기수사 황유자가 검집에 손을 얹고 나섰다.
“학 대협은 북해마궁이 본파의 속가인 태을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모르시오? 한데 소림사의 방장이 북해의 마졸들을 아무런 제지 없이 놓아준 바람에 우리 종남파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오.”
“그건 우리 화산파도…….”
“화산파는 나설 계제(階梯)가 아니지.”
황유자는 단호하게 학도의 말을 잘랐다.
“지금 이 어처구니없는 짓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고 있을 터. 가해자인 화산파가 선두에서 조사단을 이끌 생각이 아니라면 빠져 있으시게.”
“으음.”
화산파 무인들이 이를 갈며 황유자를 가로막았으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학도가 말렸다.
“보내드려라.”
“대사형!”
화산오검의 둘째 맹조가 눈을 부릅뜨고 학도에게 따졌다.
“대사형. 우리가 왜 양보해야 합니까?”
그 말에 학도가 아닌 황유자가 대답했다.
“이건 단순히 못된 장난에 그치는 정도가 아닐세. 소림사에서 내놓은 제안이지.”
“소림사의 제안?”
“그러니까, 실력이 되면 통과해라…. 그게 안 되면 자존심을 굽히고 소림사가 하는 일에 입 다물고 있어라. 동전 한 냥이란 건 그런 의미일세. 실력 없는 자가 포기해야 할 자신의 자존심 값.”
맹조가 외쳤다.
“우리 화산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꼬리를 만 개가 되지 않소!”
“상관없네. 내가 말한 건 소림사가 제시한 제안이니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건 사실 따로 있지.”
황유자가 장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검성을 쓰러뜨린 저 아이를 기준으로 각 문파들이 얼마나 실력을 보일 수 있는가 하는 걸세. 몇 합 만에 통과할 수 있느냐, 나아가 저 선 안으로 얼마나 들어갈 수 있느냐에 따라 굳이 서로 간에 싸울 필요 없이 절로 서열이 갈릴 테지.”
“소림소마는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것 같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쳐갈 거요! 그렇다면 더더욱 우리가 후발이 될 순 없소!”
“맞네. 나중에는 통과한대도 의미가 많이 퇴색될 테니 아무래도 처음 통과하는 문파가 조금이라도 더 목에 힘을 줄 수 있겠지. 발언권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그게 화산파가 된다면 다른 문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누가 감히 우리 화산파를…….”
맹조의 말을 학도가 가로막았다.
“황 대협의 말이 옳소. 먼저 가시오.”
화산파의 무인들이 씩씩거리며 옆으로 비켜서자 황유자가 조소를 지었다.
“잘 생각했소.”
황유자는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세로 화산파 무인들을 지나쳤다. 황유자는 느긋하게 말을 하며 장건의 앞, 장건이 그어놓은 선 앞에 섰다.
“소림사가 급했군. 제아무리 검성을 쓰러뜨렸대도 공세를 포기하고 수세에서의 겨루기라면 이쪽이 훨씬 유리하지. 보법만으로 승부를 볼 수도 있으니까.”
맹조의 마음도 급해졌다.
“대사형!”
학도가 고개를 저었다. 감정은 여전히 격해 있었으나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무언가의 낌새를 알아챈 듯 했다. 학도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제는 저 아이가 사부님을 이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저는 도저히 못 믿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런 아이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보아라. 저 아이의 무위가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 천룡검문의 고 문주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저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떠벌이기로 고 문주와 사명이를 동시에 상대하고 북해의 사대 고수까지 쓸어버린 후에, 마지막으로 사부님까지 쓰러뜨렸다고 하잖습니까. 그게 대관절 말이나 되는…….”
그때.
펑!
갑자기 폭음이 울렸다.
장내의 이들이 모두 놀라서 장건 쪽을 쳐다보았다.
장건이 그어놓은 선 앞에서 황유자가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있었다.
황유자의 얼굴은 당혹감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어?”
본래 황유자는 장건을 상대로 대단하게 뭘 해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선 안으로 발만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장건을 무시하거나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멋을 부리려 장건을 피해서 지나간다거나 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단지 보법을 써서 빠르게 발을 디밀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선을 넘어서 발을 디디려는 순간 갑자기 뒤로 밀려난 것이다.
황유자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뭐에 맞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맞긴 맞았는데 아프거나 하지도 않았다. 아니, 맞았다기보다는 밀려난 듯한 느낌이라는 게 더 정확했다.
‘왜 그런 큰 소리가 났지?’
장건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딱딱하게 서 있는 그대로였다. 황유자는 장건이 뭘 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허허.”
황유자는 멋쩍어서 헛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내가 발을 헛디뎠는가 보군.”
애써 변명하며 무마하려 했는데 장건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헛디디신 거 아닌데요?”
황유자는 얼굴이 후끈거렸다. 자신을 보고 있는 수백 쌍의 눈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장건에게 당해 넘어졌다는 건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 역시 이름난 고수가 아닌가!
장건의 공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황유자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다시 해보자.”
그러자 장건이 거부하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황유자가 다가서려다가 멈추고는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뭐냐?”
“열 배예요.”
“음?”
“다시 도전하실 때마다 관람료를 열 배로 내셔야 해요.”
원래의 관람료가 한 냥이고 열 배라고 해 봐야 열 냥이니까 그리 큰돈도 아니었다.
황유자는 이를 갈았다.
“오냐. 알았다!”
말을 함과 동시에 발을 내밀며 황유자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장건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 공기 중에서 공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뭔가가 허공에서 움직였다!
황유자는 자신의 팔을 들어 상반신을 보호하며 재빨리 발을 디디려 했다.
펑!
분명히 장건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황유자를 밀어냈다. 황유자는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다행인 건 그나마 엉덩방아를 찧지 않았다는 정도다. 다만 여전히 황유자는 장건의 수법을 볼 수가 없었다.
“한 번 더!”
펑.
“이익! 한 번 더!”
펑!
단정하던 머리가 산발이 되어서 비틀거리는 황유자였다. 황유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막든 피하든 보여야 하지!’
장건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을 뿐이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암경인가?’
황유자는 더 이상 낭패를 볼 수 없다 판단했다.
“노부의 손속이 맵다 욕하지 마라!”
한껏 공력을 끌어올린 황유자가 일장을 날렸다.
지켜보던 무인들이 놀라 소리쳤다.
“천지오뢰인(天地五雷印)!”
약지와 소지를 접고 나머지 손가락을 쭉 뻗은 독특한 형태의 장법으로, 상대에 적중하면 날카로운 경기가 파고들어 맞은 즉시 그 부위를 찢어놓는다. 살기가 강하기 때문에 종남파에서도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는 무공 중 하나였다.
황유자는 장건을 비켜서게 만들기 위해 위협적인 살수를 쓴 것이다.
하나 장건은 담담하게도 꾸벅 합장을 하더니 똑같이 우장(右掌)을 뻗었다. 황유자와 장건의 손바닥이 마주쳤다.
‘네놈, 실수한 거다!’
황유자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황유자의 장심에서 날카로운 경기가 장건의 손바닥으로 쏟아졌다. 천지오뢰인은 특성상 막기 어렵고 오로지 피해야만 하는데 장건은 천지오뢰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력 대결의 양상을 생각한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장건의 손바닥이 갈가리 찢겨질 듯했다.
그러나 황유자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손바닥이 맞닿는 느낌이 없었다. 허공을 때린 느낌과는 달랐다. 자신이 내뻗은 힘, 그 충격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출렁.
장건의 몸 전체가 일순간 바닷물처럼 일렁여 보였다. 손에서부터 발끝까지 출렁거렸다가 다시 거꾸로 파동이 되돌아온다.
황유자는 소름이 끼쳤다.
‘유원반배!’
칼날 같은 천지오뢰인의 경기를 어떻게 되돌린단 말인가! 아니, 만일 그게 되돌려진다면 되려 자신의 손바닥이 갈가리 찢기고 말 터다!
그때 황유자는 보았다. 장건의 왼발 옆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바닥이 베이는 것을. 장건이 천지오뢰인의 날카로운 경기만을 제거해 반대쪽 손으로 배출한 것이다. 그리고 남은 공력의 일부를 황유자에게 되돌렸다.
퍼엉!
황유자의 팔이 충격으로 튕겨졌다. 황유자는 허우적거리면서 뒤로 밀려났지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장건은 황유자가 딱 물러설 만큼만 힘을 되돌렸다.
어깨가 조금 뻐근했지만 통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황유자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장건을 쳐다보았다. 넘지 못할 산을 대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어느샌가 작은 탁자에 장부와 붓까지 준비해 놓고 있던 상달이 짐짓 놀란 척 외쳤다.
“어이쿠! 지금이 만 냥이니까 은자로 벌써 열 냥입니다. 한 번 더 하시면 은자 백 냥입니다요!”
황유자는 분했지만 차마 더 해보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은자 백 냥은 종남파에서 융통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 번의 승부에 걸기엔 너무 큰돈이다.
지금 은자 열 냥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서민은 꿈도 못 꾸는 고급 주루에서 몇날 며칠을 펑펑 쓰고도 남을 돈이다.
승산이나 있다면 모를까, 전혀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 의외로 돈에 대한 압박이 굉장히 심하게 다가왔다.
상달이 밉상처럼 능글거렸다.
“어쩔까요. 문파는 단체 할인이 돼서 특별히 오신 분들 전부 은자 열 냥에 둥쳐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문파 단체 할인이라는 건 종남파 전체가 장건의 앞에 무릎을 꿇는 거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황유자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뒤는 내 사제들에게 양보함세.”
그러나 그 뒤에 나선 종남파의 나머지 삼대 검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장건의 유원반배에 당해서 선 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분명히 최선을 다했지만 장건을 조금도 움직이게 만들 수가 없었다.
“각기 은자 열 냥씩 해서 도합 은자 사십 냥입니다!”
종남파 사대 검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은자 사십 냥이라는 돈도 그렇지만 결국 종남파의 사대 검수가 장건 한 명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아니, 한 명이라고 표현하기도 너무 부끄러웠다.
겨우 한 걸음.
고작 한 걸음.
그것조차 나아가지 못했다.
무인으로서 이 정도로 체면이 구겨지면 당당히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어렵다. 당연히 소림사의 잘못에 따지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황유자는 얼굴 근육이 경직된 채 장건의 앞에 섰다.
“종남의 무인은 비겁하지 않으니 굳이 패배에 변명하지 않으마. 종남파는, 이유를 불문곡직하고 소림사의 뜻을 존중하겠다.”
황유자는 포권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리고…… 손에 사정을 두어줘서 고맙다. 과연 소림사의 전 제자답구나.”
종남파의 사대 검수 모두 하나도 다친 데가 없었다. 장건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어딘가 다치게 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고마운 것이다.
장건의 표정이 환해졌다. 장건은 이제껏 이런 감사 인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쩐지 이제야 인정을 받은 기분이 든다.
장건은 공손히 합장했다.
종남파의 사대 검수는 총 은자 사십 냥의 셈을 전표로 치렀고 나머지 제자들과 태을문의 무인 서른 명은 동전 한 냥씩을 냈다.
하지만 바로 삼황선원에 들어가지 않고 한편에 물러서서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다른 무인들은 어떻게 할지 궁금한 탓이었다.
장부에 기재하던 상달이 신이 나서 외쳤다.
“다음 분 없으십니까?”
그 말에 다른 무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일개 삼류도 아니고 종남파의 사대 검수가 제대로 손도 못써보고 물러났다. 자신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 ☆
상달이 탁자 옆에 놓아둔 돈자루는 점점 더 두둑해져 가고 있었다.
벌써 십 개 문파의 내로라하는 고수 오십 명이 장건에게 도전했지만 누구도 장건의 일보 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건은 아직까지도 지친 기색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장건이 금분세수식에 입었다던 부상 같은 건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천하의 검성도 이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종남파의 황유자처럼 깨끗이 승복한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여전히 소림사와 장건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장내의 분위기는 숙연하기까지 했다.
신이 난 건 돈을 세는 상달 혼자뿐이었다.
도전에 실패하고 셈을 치른 무인들은 모두 한편에서 다른 이들의 도전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계속 지켜보기만 했던 화산파가 나섰다.
백리도일검 학도가 뭇 무인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이제 우리 화산파가 나서도 되겠소이까?”
광동진가의 고수가 코웃음을 쳤다.
“해보시오. 화산파가 성공한다면, 어쩌면 화산파도 소림사처럼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오이다.”
“화산파는 당신들에게 면죄를 구걸하지 않소. 본파가 잘못한 바 있다면 응당 책임을 질 것이오.”
“솔직한 마음으로, 화산파를 응원하긴 싫으나 누군가는 녀석을 넘어서는 걸 봤으면 좋겠군.”
광동진가의 고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학도가 장건의 앞으로 다가섰다. 학도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러나 눈빛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장건을 넘어선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날고 기는 고수들도 똑같은 양상으로 장건에게 당했다. 그건 장건이 최소한 몇 배는 더 위에 있다는 뜻이다.
“한 가지 청할 게 있다.”
“네.”
“시험은 포기하겠다.”
“그럼 한 냥 내고 들어가시면 되는데요.”
“돈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내마. 거기에 내 목숨도 걸겠다. 그러면 네 권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예?”
장건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
“내 사부를 쓰러뜨렸던 ‘그 권’말이다.”
장건은 학도의 눈을 보았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목숨을 건 무인의 눈빛이다.
“내가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호의를 베푼다면 화산파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소림사에 지불할 것이다. 이건 부탁이고 또한 거래다.”
상달이 학도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장건에게 전음을 보냈다.
[장 대협! 소림사에 대가를 지불한다는 게 돈 외에 다른 것도 말하는 거 같은데요? 하다못해 화산파가 이번 일로 소림사를 물고 늘어지지 않기로만 해도 진짜 좋은 거랩니다!]장건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저는 무림인이 아니에요. 무인으로서 무공을 보여드릴 순 없어요.”
“알겠다. 명분에 어긋난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스러운 부탁을 했군.”
학도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이쪽도 따로 강호의 도의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네게는 소림사의 명운이 달려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사부의 복수가 걸려있다. 굳이 일대일을 고집하지 않겠다면 사제들과 함께해도 되겠는가?”
학도는 공공연히 협공을 말함에도 겸연쩍어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상달이 긴장해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는 건 정말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이건 진짜 위험해요!]상달이 말렸음에도 장건은 먼저 대답을 해버렸다.
“네.”
“장 대협!”
장건이 상달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까 조금만 물러서 계세요.”
그러자 학도가 검을 뽑으며 외쳤다.
“들으라! 오늘 이 자리에서 사부님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검을 들어라!”
스르렁!
화산오검은 물론이고 청룡단 전체가 검을 뽑았다.
상달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의 무인들 전부가 경악했다. 단순히 화산오검과 청룡단 전원이 장건 한 명을 상대로 검을 뽑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장건의 신위를 생각하면 그래야 한다는 건 충분히 공감되는 바였다.
정말로 놀란 이유는 화산파 무인들의 얼굴 표정에 서린 비장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수십 개의 검에서 시퍼렇게 치솟는 검기…….
무인들은 아연실색하여 외쳤다.
“동귀어진이다!”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별다른 신호도 없이 화산오검의 쇄도를 시작으로 청룡단의 무인들 여섯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의 등을 밟고 다시 여섯이 뛰었다. 그리고 또 여섯이 앞선 이들을 밟고 조금 더 높이 뛰어올랐다. 남은 이들은 화산오검의 좌우에서 함께 쇄도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그중 반 수가 몸을 뒤집고, 나머지 반 수는 장건을 향해 검을 내던지며 차례로 몸을 뒤집었다. 먼저 몸을 뒤집어 튼 화산파 무인들 열 명이 검을 곧게 뻗더니 이어 몸을 수평으로 뉘인 채 장건을 향해 날아갔고, 검을 내던진 후 나머지 화산파 무인들은 맨손으로 장을 뻗으며 검을 든 무인들의 뒤를 따랐다.
마치 인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창이 장건을 찌르는 듯했다. 촘촘하게 밀집된 검기가 장건을 뒤덮는다. 자신들의 몸은 조금도 보호하지 않고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한 형태였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격류처럼 주위를 휘몰아쳤다. 떨어져서 지켜보는 무인들마저도 저릿저릿해져 몸서리를 칠 정도니 정작 살기가 집중되는 장건은 실로 지독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건은 시종 담담한 표정이다. 아니, 사실 장건은 드러내고 있지 않았지만 서글퍼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극도의 분노심을 표하며 날아오는 이들을 바라보면 울적한 기분이 든다. 수없이 봐온 일이지만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장건은 저들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 든 윤언강조차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사부를 쓰러뜨렸다는 것만으로 목숨까지 걸며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다.
아마 장건은 평생이 가도 무림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후…….”
장건이 짧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공력을 끌어올렸다.
옷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옷깃은 빳빳하게 서고 머리카락도 하늘로 치솟았다.
그 순간 지켜보던 무인들은 소름끼치는 광경을 목도했다. 앉아있던 이들조차 벌떡 일어섰다.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 같은 외침까지 질렀다.
“아앗!”
화산파의 무인들이 내던진 열 개의 검이 허공에 꽂혀버렸다. 그건 허공에서 멈췄다고 하기엔 애매한 광경이었다. 분명히 그들의 검이 보이지 않는 뭔가에 꽂혀서 더 전진하지 못하는 듯했다.
뒤를 이어 신검합일의 자세로 날아가던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무언가에 방해를 받아 제대로 날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조금씩 나아가긴 한다.
하나 그 대가로 그들의 검기는 끝에서부터 깎여나가고 있었다. 뒤를 따라 장을 뻗으며 몸을 날린 화산파 무인들은 앞선 이들에 부딪쳐서 서로 엉켜 버렸다. 화산파 무인들이 이를 악물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건이 펼쳐낸 막대한 기운의 농밀한 역장을 검기가 관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치지지지!
매우 느릿하게 나아간 검들이 장건의 몸에 겨우 닿을 때 쯤 검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나마 몇몇의 검은 장건에 닿긴 했는데 팽팽하게 부푼 장건의 옷을 뚫지 못했다. 검끝이 장건의 옷에 닿으니 ‘둥―’하고 쇠 울리는 소리가 난다.
“금종조!”
화산파 무인들의 검이 모조리 장건에게 꽂혀 있으면서 서로 한 무더기가 되어버린 이상한 모습이다. 너무 엉켜서 심지어 화산오검조차 다른 행동을 하기가 힘들어졌다.
장건은 양 팔을 벌렸다가 어깨를 휘저으며 검들을 밀어냈다. 서로 꽉 엉켜버린 화산파 무인들이 한쪽에 쏠리자 장건은 어딘가 딱딱한 동작으로 팔을 저었다.
공중에서 엉킨 화산파 무인들이 장건의 팔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휘말려 다녔다.
“크으윽!”
검이고 사람이고 허공에서 뭉쳐지며 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느 샌가 하나의 거대한 공처럼 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공이 장건의 팔놀림에 따라 뱅글뱅글 회전했다.
화산파 무인들은 계속 돌고 도니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기도 힘들었으나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스물다섯이나 되는 사람의 공, 거대한 구체가 허공에서 만들어지며 돌고 있다…….
선 안으로 들어와서 장건의 머리 위에서 돌고 있지만 누구도 손이나 발을 내밀어서 바닥을 짚지 못하고 있었다. 화산오검이 천근추의 수법으로 몸을 내리누르려 해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쓸려 다니니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
충분히 동그란 원이 되었다고 생각한 장건은 크게 팔을 저으면서 뻗었다. 마구 회전하던 사람의 공이 별안간 붕 떠밀려서 대여섯 걸음 밖까지 날아갔다.
쿠당탕탕!
사람의 공이 순식간에 와해되어 널브러졌다.
장건이 공력을 거의 싣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넘어진 충격만 있었다. 만일 장건이 공력을 담았다면 전신의 뼈가 박살이 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휘이잉.
장건의 발밑에 이상하게 비뚤어진 태극의 형상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화산파 무인들은 재빨리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방금 당한 일이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뭔가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낭패를 당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다 버리기로 한 화산오검은 벌떡 일어서서 다시 한 번 장건을 향해 달렸다. 그들의 검 끝에 더욱 짙은 빛이 맺혔다.
검강이다.
장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대한 손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검강은 내공을 대폭 소모해 급격하게 힘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워낙 위력이 커서 지금처럼 장건이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선 꽤나 큰 위협이 된다.
끝끝내 장건의 권을 보고 가겠다는 작정이다.
장건은 주먹을 쥐었다.
윤언강을 상대할 때 그 마지막 권의 기분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권…….
그때 이후로 장건은 더 강해졌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벽을 넘기 전과 넘은 후에 보이는 사물은 많이도 달랐다.
장건은 침착하게 안법을 써서 화산오검을 확인했다.
거의 동시에 가깝게 공격을 해오지만 아주 약간씩의 차이를 두고 있다. 고수들은 혼자서 완전한 초식을 펼치는 게 유리한 경우가 있기 때문인데, 화산오검은 정도가 더 심했다. 만일 앞 사람의 공격이 통하지 않아 가로막히면 막은 사형제마저 베어버리겠다는 듯 초식을 펼쳐오고 있었다.
장건은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찰나의 순간들에서 화산오검을 구분해 순서를 세었다.
가장 먼저 선을 넘어 장건을 베려 든 건 화산오검의 둘째 맹조다. 장건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순간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이제는 전사경을 완전히 펼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몸을 옆으로 비트는 것만으로 완전히 익숙해진 나선의 경력이 발밑에서 손끝까지 도달했다. 맹조의 하복부를 지나고 있던 위기에 장건의 권이 직격했다. 맹조는 발을 내딛지도 못하고 달려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튕겨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산오검의 넷째와 다섯째가 좌우에서 검을 긋는다. 장건은 왼쪽으로 돌면서 권을 뻗고, 다시 그 힘으로 몸을 돌리며 반대쪽 권을 뻗었다. 넷째와 다섯째도 맹조와 마찬가지로 위기를 직격당하는 충격으로 몸이 멈췄다가 뒤로 날려지기 시작한다. 세 사람이 아직 손 한 뼘 만큼의 거리도 밀려나지 않은 연속적인 찰나의 순간에 셋째가 일도양단의 기세로 장건을 반으로 쪼개려 했다. 장건은 위쪽으로 권을 날려 그의 검보다도 먼저 공격을 적중시켰다. 그때 사악! 장건을 섬뜩하게 만드는 소리가 울리며 첫째인 학도의 검강이 장건의 가슴 정면 옷자락을 태우며 찔러오고 있었다. 장건은 검이 찔러오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한 치만큼 상체를 뒤로 눕히며 금강부동신법으로 몸을 반 바퀴 틀어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곤 몸을 틀 때 생겨난 나선의 경력을 실어 주먹을 뻗었다. 학도의 검이 장건의 귀 위쪽으로 흘러가고, 장건의 주먹은 학도의 무릎 부근에서 위기를 타격했다. 어찌나 동작이 빨랐는지, 처음 장건에게 얻어맞은 둘째 맹조가 그제서야 허우적대며 학도의 머리 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날아간다.
이 모든 일이 겨우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껏 잡아 당겨서 늘렸다가 갑자기 확 놓아버린 것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터터텅!
마치 한 번의 소리가 여러 번 겹쳐진 것 같은 폭음이 울리면서 화산오검은 조금씩의 차이를 두고 뒤로 날려졌다.
밀려난 건 겨우 두세 걸음씩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결국 그들은 이번에도 장건이 그어놓은 일보 간격의 선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화산오검은 망연자실해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도 장건의 움직임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뚝뚝 끊겨서 잠깐씩 보였을 뿐이다.
장건이 가뜩이나 남들보다 덜 움직이다보니 같은 위력을 내더라도 동작이 훨씬 빠를 수밖에 없는데, 공간에 대한 감을 깨달은 후부터는 ‘공격이 빗나가면 어떡하지?’하고 망설일 필요가 없어져서 이전보다도 권초가 더 빨라졌다.
지켜보던 무인들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장건이 흐릿해졌다가 낮은 자세에서 앞으로 주먹을 내밀고 있는 마지막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다.
장건은 가볍게 숨을 골랐다. 너무 빠르게 움직인 탓인지 일부 상처가 터져서 조금씩 피가 배어 나왔다.
학도가 어딘지 모르게 감정이 격한 채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 권이었느냐.”
장건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학도는 ‘허…….’하고 깊이 한숨을 내쉬면서 장건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거였구나……. 실로 아름다운 권로였다.”
학도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은 볼 수 있었다. 그가 본 장건의 권은 완벽하다 못해 소름끼치게 공포스러웠다.
‘졌다…….’
억울하다는 마음도 들지 않을 만큼 완전히.
화산오검도 한숨을 내쉬며 자신들의 몸을 살폈다.
다친 데는 전혀 없었다. 조금 머리가 띵하고 잠깐 춥다고 느낀 게 다였다.
장내에 적막이 감돌았다.
이건 그야말로 장건이라는 거대한 벽이었다. 질시할 수도 없고 부러워할 수도 없는 높은 격차가 거기에 존재했다.
수백 명 무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장건을 바라보는데, 거기에는 어떤 경외감과 함께 일종의 두려움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적막을 깨고 누군가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소림소마! 내가 누군지 기억하느냐―!”
멀쩡한 한 남자가 멀리에서부터 거침없이 달려왔다. 굉장한 속도로 달려오던 남자는 순식간에 장건의 앞까지 도달했다.
모두가 ‘어어?’하는 사이에 남자가 허공으로 도약해 힘껏 몸을 날렸다.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남자는 현란하게 몸을 몇 번이나 회전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장건도 남자가 다짜고짜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그대로 서 있었을 따름이었다.
남자는 극대의 회전력을 실어 장건의 옆머리를 선풍각으로 힘껏 걷어찼다. 무쇠도 우그러뜨린다는 섬뢰비연각이 장건의 머리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남자가 소리쳤다.
“보았느냐! 내가 바로 철비각 종유다!”
순간 출렁하고 장건의 몸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어어…….”
철비각 종유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종유는 발로 찬 자세에서 반대로 휘리리리 돌다가 그대로 땅에 뚝 떨어져 무릎을 찧었다.
콩.
“…….”
종유가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무릎을 툭툭 털었다.
장건과 마주 섰는데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
잠깐의 어색함 속에서 종유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신가.”
장건도 엉겁결에 인사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종유는 조심스럽게 허리춤에서 동전 열 닢을 꺼내 장건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어이가 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문파의 무인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뭐지.”
“설마 하북의 강자인 그 철비각은 아니겠지?”
“기세를 보면 맞는 것 같긴 하던데…….”
몇 마디를 던진 무인들은 그제야 하나 둘 무거운 엉덩이를 떼기 시작했다.
“우리도 슬슬 들어가 볼까…….”
“뭐, 그러세.”
가장 긴장감이 극에 달했던 화산파의 순서까지 끝난 마당에 어차피 남아 있어 봐야 별 볼 일이 없을 터였다. 무인들은 서둘러 삼황선원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이던 화산파의 무인들도 말없이 관람료를 셈하고는 맨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장건과 상달은 서로 마주보았다.
상달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든 오늘 하루는 잘 넘긴 것 같군요.”
“예, 그런 거 같아요.”
대답을 한 후 장건은 무심코 가슴을 손으로 매만졌다. 학도가 검강으로 태운 옷자락의 촉감이 까칠거렸다.
방금 제법 큰일을 겪었는데도 정작 옷자락 조금 상한 게 아깝다는 마음부터 먼저 드니, 장건 스스로도 자기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건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웃었다.
“휴우…… 고수가 돼도 옷 상하는 건 똑같구나…….”
☆ ☆ ☆
삼황선원에는 수많은 격전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뭇 무인들의 눈을 끈 것은 단연코 삼황채 절벽 멀리에 새겨진 윤언강의 검흔이었다.
수 장에 걸쳐서 길게 이어진 검흔은 마치 벼락이 지난 듯 보이기도 했고, 길게 이어진 매화나무의 가지를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절벽에 검흔을 새기는 건 제법 이름난 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지금처럼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오의를 단 일초의 검식으로 그려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절벽의 검흔을 보던 무인들은 처음엔 감탄을 하고, 이후엔 무의식중에 절로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아무리 잘못된 길을 걸었다 한들, 그는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진짜 무인이었던 것이다.
무인들은 멀리에서 윤언강의 검적을 보고 한동안 감탄했다.
그리곤 가까운 삼황선원 안쪽부터 먼저 둘러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싸움의 흔적들 중에는 어마어마한 내공의 발현 흔적 같은 것들이나, 보법을 쓰던 중에 남긴 족적, 병기나 장력의 흔적들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특히나 북해빙궁과 황궁의 무공 흔적들도 빼놓을 수 없는 요주의 관심사였다.
그동안 화산오검은 삼황선원을 넘어서 가파른 계곡을 지나 검흔이 새겨진 천길 절벽 밑까지 찾아갔다. 그들에게는 사부 윤언강이 남긴 검의 흔적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 훨씬 중요했다.
한데 뜻밖에도 그곳에는 문사명이 남궁지와 함께 앉아 있었다. 문사명은 사형들이 온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절벽 위에 새겨진 윤언강의 검흔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맹조가 문사명을 보고 울컥하여 소리를 쳤다.
“네놈! 네가 한 짓을……!”
남궁지가 문사명의 사형들을 보고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지만 문사명은 고검(古劍) 한 자루를 끌어안은 채 절벽에서 눈길도 떼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사명! 네가 사부님을 해친 것으로 부족하여 사형들마저도 능멸하는 거냐!”
맹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문사명이 고개를 돌렸는데,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사형…….”
“네가 뭘 잘했다고!”
맹조가 더 화가 나 소리를 지르는데 학도가 맹조를 진정시키며 문사명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막내 사제. 본파로 돌아가면 네가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알고 있겠지?”
문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사명은 다시 위를 올려다본다. 학도는 씩씩거리는 화산오검을 말리면서 문사명에게 다가갔다.
학도는 문사명의 시선을 따라 함께 위를 쳐다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문사명이 손가락으로 검흔의 끄트머리를 가리켰다.
힘차게 뻗은 검흔은 마치 윤언강이 평소 매화 가지를 그려내던 붓놀림과도 닮았다. 직접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생생한 검흔이 느껴졌다. 윤언강이 검무를 추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선했다.
큰 가지가 일필휘지로 절벽 위를 달리고, 가지의 마디마다 작은 가지에서 수많은 검기의 검흔으로 피어난 꽃망울이 달려 있다.
정말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학도는 이내 문사명이 가리킨 끝부분을 자세히 보다가 약간의 서운함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까의 홍보 문구처럼 이 검흔은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걸작이었다. 이 자체를 그림이라 한다면 분명히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림이 아니라 일검의 검초라 한다면 어딘가 모르게 아쉬웠다.
강렬하고 거침없이 뻗은 가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왠지 쭉 뻗지 못하고 다소 힘이 떨어진 듯 주춤거리게 보이는 것.
그 부분이 못내 아쉬운 감이 남았다. 물론 그건 아주 작은 아쉬움이었다. 문사명이 직접 지목하지 않았다면 모른 채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하나 그 때문에 이 일검의 의미가 바래져 있었다.
학도도 내로라하는 고수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윤언강은 마지막 그 일 푼의 부족함 때문에 검초를 완벽히 완성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신이 원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문사명이 울먹였다.
“제가 사부님을 찌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사부님이 온전히 검을 펼치셨더라면! 그랬다면 쓰러진 건 소림소마가 되었을 겁니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문사명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으어어엉! 으허헝!”
남궁지가 다시 앉아서 문사명을 안아 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날 이후로 몇날 며칠을 이러고 있어요.”
화산오검은 문사명을 달래주지 않았다. 꼼짝 않고 서서 문사명을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굳이 문사명을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그들 역시 똑같은 울분과 똑같은 아쉬움을 공감하고 있었다.
“막내 사제를 돌봐주어 고맙다.”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그리고…… 이건 소림사에서 보낸 전언이에요.”
남궁지가 학도에게 짧은 전음을 보냈다. 학도는 남궁지의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가 쓴 미소를 지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학도가 정신을 차리고 문사명을 보았다. 문사명은 그때까지도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리 처연하게 우느냐.”
문사명은 목까지 쉬어서 컥컥거렸다.
“제가, 제가 사부님을……. 저 때문에 사부님이 소림소마에게…….”
학도가 낮은 언성으로 문사명을 꾸짖었다.
“그래서 사부님이 패했다 생각한다면 그건 네가 사부님을 너무 우습게 여긴 것이다!”
“……예?”
“사부님께서 너를 대견해하셨다고 들었다! 네 존재가 방해되었다면 그리 말씀하시진 않으셨을 거다. 그렇지 않으냐?”
“대사형, 하지만…….”
“소림소마도 많은 부상을 입었다. 사부님 또한 비슷한 상황이셨다면 누가 더 집중할 수 있느냐의 승부였을 게다. 사부님께서 온전한 상태가 아니셨다 해도 마찬가지다.”
학도가 침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반면에 소림소마는 자신의 권을 완성시켰다. 자신의 무공을 펼치는 데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고, 권로는 완벽했다. 내 평생에 다시 그 같은 권로를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사명은 침통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니 사명이 네가 안타까워해야 할 건 사부님의 패배가 아니다. 화산의 초인이 마지막 검초를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것, 그걸 제일 슬퍼해야 하는 거다.”
학도는 뒷짐을 지고 절벽 반대쪽의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황혼이 삼황선원을 발갛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저 황혼이 비록 지금 우리 화산의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다시 새벽을 밝힐 날도 올 것이다.”
학도는 목이 메어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여의총람이라고……. 소림사에 빚을 졌으니 이제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은 남아있지 않겠구나.’
☆ ☆ ☆
장건이 나흘 동안 상대한 삼십 개 문파, 열여덟 무가의 무인들은 모두 삼백오십 명이었다. 특정 문파에 소속되지 않은 무인들까지 합하면 거의 오백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 장건에게 도전했다.
장건이 그어놓은 선은 겨우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그 한 걸음, 일보(一步) 안에 들어설 수 있는 무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개중에는 화산파처럼 여럿이 도전한 경우도 있었지만 결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강호 무인들의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건의 도전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전 무림을 상대로 한 개인의 도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누구나 돈을 내면 천하제일인과 손을 섞어볼 수 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삼황선원을 찾아오는 무인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나흘이 되자 이미 유력한 세력의 무인들은 모두 찾아온 후였기에 더 이상의 시험은 무의미했다.
운성방은 망설임 없이 종료를 선언했고, 결국 나흘째 저녁에 무영문의 백혈검이 마지막 도전에 실패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림을 향한 장건의 도전은 끝이 났다.
바야흐로 삼황채의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무혈(無血)로.
물론 일부는 떠밀리거나 넘어져서 긁히기도 하고 코가 깨져 코피를 흘리기도 했으나, 상징적으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뤄낸 업적이라 인정되었다.
호사가들 중 혹자는 소림사의 속가 제자 한 명에게 전 무림이 패배한 현실을 개탄하며 우내십존을 그리워했고, 다른 이들은 우내십존의 잘못된 정책으로 말미암아 전 무림의 평균 무위가 동반 하락한 탓이라 날카로운 평을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제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 무림이 단 한 사람, 장건을 넘어서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는걸.
그것은 비록 전(前)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 해도 천하제일인이 누구인지를 확고히 입증하는 사건이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천하제일인의 탄생을 축하…… 하려 했으나, 장건이 명분상으로는 더 이상 무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곤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서가촌에서 몇몇 문파의 주도로 무림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지난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논의하는 회합의 자리였다.
이에 소림사를 찾아온 수많은 문파와 무인들은 대부분 서가촌으로 향했다. 서가촌은 소림사의 인근에서 대량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을이었으며 상당한 편의시설까지도 개발되어 있어 수천 명이 아무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서가촌에서 열린 무림대회에 참가한 무인은 자그마치 수천 명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한참이나 진통이 계속되다가 결국 그중 명망 있는 명사들로 구성된 진상조사단과 공동 논의체가 발족되었다.
진상조사단은 삼황선원의 사건을 낱낱이 파헤치는 임무를 맡았고, 공동 논의체는 진상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전모에 따라 책임소재를 결정했다.
삼황선원에 대한 논의는 연일 이어졌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복잡하게 꼬였던 문제들이 얼추 정상적으로 수습 절차를 밟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 ☆ ☆
늦은 밤. 어두운 사당 안에서 스무 명 남짓의 중장년인들이 낮은 어조로 대화를 나누었다.
“화산파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외다. 선례를 남겨서 좋을 게 하나도 없지요.”
“동의하오.”
“동의하오.”
감정 없는 동의의 말이 스무 번 남짓 반복되었다.
“좋소. 허면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소. 화산파는 무림 혼란을 획책한 주범문파로써 손해배상의 책임을 물리도록 하겠소. 이십 년간 봉문에 배상은 최소 황금 만 냥 이상. 그 이하는 공동 논의체에서 통과시키지 않도록 하겠소.”
“동의하오.”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듯한 장년인이 고개를 들어 한쪽에 서 있는 화산파의 백리도일검 학도를 쳐다보았다.
“화산파는 이의를 제기하겠소?”
학도는 낮은 침음성을 냈다.
사람들은 공동 논의체가 전후 처리를 결정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거대 문파들이 물밑에서 은밀히 움직였다.
중소문파와 소림사, 화산파를 제외시키고 거대 문파들에서 각기 한 명씩의 대표를 선출하여 비밀리에 별개의 위원회를 구성한 것이다.
그 위원회가 지금 화산파의 명운을 결정했다.
학도는 크게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봉문 이십 년에 황금 만 냥이면 화산파는 꽤나 오랫동안 풀죽만 먹으며 연명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그가 거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이 손을 잡고 내린 결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벌어지고 말 것이다.
위원장인 장년인이 바로 결정을 마쳤다.
“학 대협은 이제 나가도 좋소. 화산파에 대한 처분은 공동 논의체에서 다시 한 번 언급된 후 통보될 것이오.”
학도는 포권도 하지 않고 얼굴을 굳힌 채 사당 밖으로 나갔다.
몇몇 위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한 일이구려. 화산파가 소림사를 물고 늘어질 줄 알았건만.”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외다.”
위원장이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다음. 소림사에 대한 안건이오.”
위원장은 다음 안건에 대해 말을 하려다가. 곧바로 말을 못하며 머뭇거렸다.
“소림사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소?”
다른 위원들도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쉽게 말을 내뱉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있소. 금분세수식의 개회제삼천에 소림소마 장건이 마지막 식순까지 모두 마치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소.”
위원들이 술렁거렸다.
“그게 무슨 의미요?”
“마지막 식순에 금대야를 북해마궁의 마두가 얼려버려 식을 온전히 마치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왔소.”
위원들의 얼굴 표정이 굳었다.
“그럼…….”
“소림소마가 은퇴를 번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오?”
“은퇴 번복이 아니라 애초에 은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오. 은퇴했다고 잘못된 소문이 났을 뿐, 금분세수식을 하려다 마음이 바뀌었다며 다시 무림활동을 시작해도 규탄할 명분을 찾기 어렵단 말이외다.”
사당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곧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마당에 은퇴를 번복…… 아니, 안 했다고 그래봤자 그게 무슨……!”
그러나 위원장의 다음 말에 위원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소림사 원호 방장의 행동이 워낙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팍한 데다 후안무치하기로 유명한 자이니, 누구도 장담할 수 없소이다. 그런 사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위원들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 원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상인이랍시고 명분을 내세운 것도 어쩌면 슬쩍 간을 보기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골칫덩어리 장건.
그 장건이 다시 한 번 강호에 나올 수 있다…….
천하제일인은 어느 문파에서든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너무 압도적이다. 장건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판도가 짜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전 문파의 공동 전인이나 다름이 없기에 누구나 장건을 가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껏 누구도 가질 수 없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기에 장건은 그저 처치 곤란한 괴물일 따름이었다.
한동안의 침묵 속에 누군가 한 명이 이를 갈며 말했다.
“소림소마는 결코 무림에 돌아와서는 아니 되오.”
다른 이들이 동조했다.
“가장 두려운 건, 놈이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을 만큼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오. 언제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는 거외다.”
“그러나 현재는 소림소마를 적대시할 수 없소.”
모두의 고민이 그것이었다.
장건을 죽여서라도 없애고 싶지만 죽일 수 없다는 것.
더욱이 누구도 장건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게 이번 관람료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증명된 터다.
몇 번이나 무언의 침묵이 지속되다가, 누군가가 결연히 말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오. 그건…….”
위원들이 모두 말한 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위원 중 한 명이 도호를 외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시천존. 본파는 이미 장 소협과 친분의 약조를 맺은 적이 있소이다. 결정에는 따르겠으나 투표는 참가할 수 없소.”
하지만 그가 애쓴 보람도 없이 무당파를 제외한 전 문파의 동의로 장건에 관한 건은 통과되었다.
위원장이 안건 통과를 선언한 후 이를 깨물며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오. 즉각 황궁의 동의를 받아, 삼 일 뒤. 이 자리에 원호 방장을 호출하고 회의를 계속하도록 하겠소.”